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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글
머리말(셰퍼드 페어리) 추천의 글(로버트 패리스 톰슨) 일기(키스 해링)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그리고 1990~2009년 키스 해링 키스 해링의 작품을 소장한 공공 미술관 옮긴이의 글 도록 찾아보기 |
Keith H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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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1978년 10월 14일 일기 중에서
우주시대의 첫 세대로 1958년에 태어나고, 텔레비전 테크놀로지와 즉각적인 만족을 구하는 세계에서 태어난 원자시대의 아이. 1960년대에 미국에서 자라고, 잡지 《라이프》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알았으며, 중산층 백인 미국인의 편안하고 안전하고 따뜻한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에서 폭동을 보았던 까닭에 나는 해결책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세상이 변하리라 꿈꾸지도 않는다. 세상을 구해내겠다는 꿈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다. 1982년 인간은 전화와 라디오, 컴퓨터와 비행기, 세계 뉴스와 비디오테이프, 인공위성과 자동차 등을 지녔지만 이천 년 전의 인간과 섬뜩할 정도로 비슷하다. 나는 죽음에 바쳐진 존재다. ---1982년 3월 18일 일기 중에서 이 일기를 읽는 사람들은 내가 작품에 대해 말하고, 내가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설명해주기를 기대하겠지만, 나는 작품이 스스로 말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보편적으로 ‘읽힐 수 있고’,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려고 애쓴다. 따라서 이 일기에서 궁금증의 답을 찾으려는 사람은 실망할 것이다. ---1984년 6월 13일 일기 중에서 많은 사람이 내게 “어디에서 이런 생각들을 해냅니까?”라고 묻는다. 그때마다 나는 확실히 모르겠다고, 내가 지금 20세기에 살고 점점 빨라지는 속도로 정보를 흡수한다는 것만을 알 뿐이라고 대답한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정보는 온갖 곳에서 주어지고, 매일 새로운 정보원源이 생긴다. 테크놀로지는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움직인다. 나는 온갖 출처에서 정보를 얻어 소화시키고 내 상상력을 통과시킨 후에 세상에 되돌려준다. 나는 이런 식으로 정보를 세상에 내놓을 새로운 방법, 또 ‘예술가’의 정의를 넓혀갈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끝없이 고민한다. ---1984년 6월 13일 일기 중에서 그림을 그리는 가장 좋은 이유는 그림을 그려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것도 본 적이 없고 어떤 것도 읽은 적이 없으며 어떤 것도 들은 적이 없는 척하면서……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다. 나는 뭔가를 만들어낼 때마다 그것을 보게 될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뭔가를 볼 때마다 그것을 만든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모든 것이 중요하다. ---1986년 6월 25일 일기 중에서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훌륭한 교사이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또 아이들을 위해서 그림을 그릴 때 나는 가장 정직하고 순수해지는 듯하다. ---1986년 7월 7일 일기 중에서 어린아이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면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아기’가 내 상징과 서명이 된 이유는 아기가 가장 순수하고 긍정적인 인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즐거워하는 생명체다. 나는 어린 시절 내내 내 삶에 관여했던 어른들을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때로는 무척 짧은 만남이었지만 지금까지 무척 생생하게 계속되는 좋은 충격을 남긴 사람도 있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그런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유익한 일이 될 거라 생각한다. 언젠가 나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로 가득한 책을 출간하고 싶다. 실제로 나는 방문하는 곳마다 그런 사진을 많이 찍었다. 모든 나라, 모든 전시회에서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과 만났다. 내가 세계 전역의 어린아이들에게서 받는 편지가 이런 관계를 증명해준다. 나와 어린아이들이 함께 떠들고 웃으면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유가 재밌게 생긴 내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성격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하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갈 이유를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 삶에 ‘의미’라는 것이 있다면 말이다. ---1986년 7월 7일 일기 중에서 나는 이제 스물여덟 살이다. 겉으로는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열두 살에 불과하다. 나는 죽을 때까지 내면으로는 열두 살에 머물고 싶다. 내 생각에는 삶을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듯하다. 나는 70대나 80대이면서도 삶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숫자는 늙은 몸뚱이 뒤로 지워버린 사람들을 적잖게 만났다. 생명은 한없이 허약하면서 이해하기 어렵다. 삶에 대해 ‘이해’했다는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미스터리가 나타난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마음가짐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열쇠가 아닌가 싶다. ---1986년 7월 7일 일기 중에서 예술은 삶보다 중요하다! 나는 죽어도 영원히 죽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을 테니까. ---1987년 3월 28일 일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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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해링이 온 세상 구석구석을 달리면서
그리고 색칠하고 사색하고 사랑하며 써내려간 단 하나의 일기장 단순하고도 뚜렷한 선, 강렬한 색채, 튀어 나와 브레이크댄스를 출 것 같은 역동적 캐릭터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낙서화가 키스 해링의 예술과 사랑에 대한 당당하고도 익살스런 고백 1980년대를 질주한 뉴욕의 낙서화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와 더불어 팝아트의 최전선에서 유쾌한 전설을 만들었던 키스 해링의 일기 『키스 해링 저널』이 작가정신에서 출간되었다. 2010년, 키스 해링 사후 20주기를 기념하여 새로이 출간된(1996년 초판) 이 책에는 열아홉 살 때부터 서른한 살 사망하기 직전까지 키스 해링이 직접 쓴 일기를 비롯해 그의 다양한 작품과 폴라로이드 사진 총 90점이 실려 있다. 삶과 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구하고 학습하고 경험하면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키스 해링은 1980년대 초 뉴욕 지하철의 검은색 광고판에 단순한 만화풍의 드로잉을 그리면서 대중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거리의 담벼락, 쓰레기장에 폐기 처리된 시멘트벽에도 그림을 그렸고, 유명해진 후에는 자신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도시라면 어디라도 찾아가 거리 복판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비트박스를 해가며 신명나게 세상을 향해 자신의 메시지를 발신해나간 거리의 즐거운 예술가였다. 활동 기간은 십여 년 남짓이지만, 해링은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고, 미래의 꿈과 두려움을 대중과 공유한 (자기 스스로 인정한 대로) 대중예술가였다. 그는 인간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고, “가장 순수하고 긍정적인 인간 존재”인 어린이들과의 작업을 가장 행복해했으며, 아동 건강, 마약과 에이즈 퇴치, 인종차별 반대를 위한 대의의 행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행동하는 미술가였다. 다채로운 이미지를 창조하고, 반복하고, 오리고, 변형하고, 실험하고, 통합하면서 자기 내면에 자리한 소년 같은 순수함과 열정, 예술가로서의 광기와 혼란, 인간으로서의 불안과 우울을 숨김없이 드러내었던 솔직하고도 맹렬한 미술가 해링의 일기에는 그가 어떻게 예술가로서 또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명성을 얻게 되는지, 또 학생 시절부터 에이즈 진단 이후 사망하기까지 그 짧은 생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가감 없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는 예술서적을 탐독하고 선배 화가들의 회고전에서 큰 자극을 받았으며, 때로는 마티스를, 때로는 레제를, 또 이집트의 상형문자나 중국의 그림에서도 시각적 상상력을 키우는 영감을 받으면서 자기만의 예술 철학과 방식을 완성해갔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살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뉴욕과 세계를 수놓은 유쾌한 예술가, 키스 해링 “그림은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림은 마법처럼 존재한다” 키스 해링은 1980년대 초 자신의 그림을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기길 바라며 지저분한 낙서만 가득하던 뉴욕의 지하철 검은 광고판에 하얀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지하철 드로잉’은 어둡고 탁한 지하철 역사를 즐겁고 환한 장소로 탈바꿈시켜주었고 통근하는 뉴욕 시민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이러한 작업은 이후 파리, 런던, 니스, 베를린, 크노케, 밀라노, 함부르크, 마라케시, 마드리드, 몬테카를로, 도쿄 등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한 벽화 작업으로 이어졌고, 뉴욕 타임스스퀘어가든과 프랭클린 루즈벨트 거리, 피사의 성당 외벽, 베를린 장벽, 도쿄의 간판 등에 남겨진 그의 작품들은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도시의 랜드마크로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키스 해링’이란 이름은 우리에게 별로 친숙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고 나면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인다. 키스 해링의 그림은 한 번만 봐도 마법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된다. 단순한 선과 형태, 경쾌한 원색, 왠지 ‘나라도 그릴 수 있겠다’고 생각될 만큼 그의 그림은 쉽고 친근해 보인다. 수전 손택은 키스 해링의 작품 자체가 “아티스트의 의지의 서명”이기에 해링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스쳐 지나는 사람이라도, 그의 어휘는 바로 알아차릴 수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개’가 컹컹 짖고,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아기들이 기어 다니고, 춤꾼들이 서로를 의지해 인간 탑을 쌓으면서 어우러지고, 사이좋은 단짝이 어깨동무를 하고, 빛나는 광선총을 든 인간의 심장으로 또 다른 인간이 들어가고, ‘빨간 하트’가 걸어 다니고, 비행접시와 피라미드가 교신하고, 사랑을 약속한 남녀가 사랑스러운 포즈로 ‘우리 결혼해요’를 알리며 보는 이를 행복하게 만든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해링만의 상징이었고, 독자?인 개성을 표현하는 ‘움직임’과 ‘선의 혼’, 그것이 해링 작품의 본질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끊임없는 변화들을 포착하고, 에너지와 환경을 잘 조합해내는 능력. 해링은 자신의 작품을 주어진 공간에 대한 적시의 기록이라 여겼고, 그에게 그림은 ‘퍼포먼스’였다. 1970년대에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녹화한 일부터 1980년대 운집한 군중 속에서 비트박스를 하면서 그렸던 대규모 벽화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는 공기에서 음악에서 주변 환경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나온 에너지를 자신 가까이에 있는 어떤 화면으로든 옮겨서 그려냈다. 1988년 에이즈 양성 반응 판정을 받은 해링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1990년 사망할 때까지 에이즈와 에이즈 공포, 그리고 동성애자 차별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예술가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사회 정치적 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졌는데 1982년에는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자비로 제작한 반핵 포스터를 배포하고, 1985년에는 남아프리카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해 2만 장의 포스터를 나눠주었다. 이때 작업한 〈남아프리카에 자유를〉연작 석판화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또한 에이즈 캠페인에도 적극적이어서〈침묵=죽음〉이라는 작품을 통해 에이즈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죽기 직전 키스해링재단을 설립해 사후에까지도 에이즈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후원에 참여하고자 했다. “예술은 삶이나 죽음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믿었던 키스 해링은 마지막 순간까지 왕성하게 활동하였고, 그의 마지막 작품은 이탈리아 피사 시의 성 안토니오 성당 외벽에 남긴 대형 벽화가 되었다. ※팝스타 슈퍼스타 키스해링展 (2010년 6월 17일~9월 5일) 작가 사망 20주기를 맞아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에서 ‘팝아트 슈퍼스타, 키스 해링’전이 열린다. 전시는 해링이 에이즈 진단을 받은 뒤 에이즈 기관과 어린이 프로그램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위해 설립한 키스해링재단이 소장한 판화 130여 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한국 아라리오 갤러리가 소장한 조각 3점 등도 전시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