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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자들에게
추천사 저자서문 머리말 제1장 오리엔탈 섹슈얼리티 제2장 오리엔탈리즘에서 이슬람 페미니즘으로 제3장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와 문화적 차이의 정치학 제4장 이슬람 원리주의와 그 노스텔지어적 공범 제5장 여성, 모더니티와 사회적 변화 제6장 원리주의 집권: 갈등과 타협 제7장 이슬람 페미니즘과 그 논쟁들 참고문헌 찾아보기 옮긴이의 말 |
Haideh Moghis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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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지만 간단하게 갑시다, 보편적 인권이라는 틀로!
컨텐츠팀 손민규 (종교, 역사와문화 담당 / lugali@yes24.com)
2010.08.18.
1. 낙천주의자 캉디드
프랑스의 계몽주의 볼테르. 왠지 점잖게 들리는 이름이지만 볼테르는 조롱의 대가였다. 그는 「낙천주의자 캉디드」란 소설로 라이프니츠라는 위대한 철학자를 신랄하게 비웃었다.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로 유명한 근대 사상가. 사실, 볼테르의 소설 자체는 볼품 없다. 드라마틱한 반전도, 뜨거운 사랑도, 통쾌한 복수도 없다. 등장인물의 숫자도 적고 서사 전개도 단순하다. 그렇다면 볼테르의 소설, 「낙천주의자 캉디드」가 오늘날까지 고전으로써 널리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계몽주의가 지향한 가치를 대변했기 때문이다. 볼테르를 비롯하여 디드로, 루소, 칸트 등 일련의 계몽주의자로 묶이는 사상가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바로 '이성'.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을 구원하는 주체가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이성이 있기에 인간은 무지몽매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낙천주의자 캉디드」의 주인공 캉디드는 라이프니츠를 상징한다. 캉디드는 세상이 더없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폭풍과 지진 등 연이은 자연재해로 죽음에 이르는 점근선에 올라탔지만 캉디드는 말한다.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있는 형태 중에 가장 최고라고. 캉디드의 생각은 라이프니츠의 신정론과 일치한다. 흔히 '예정조화설'이라고 불리는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은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 형태 중 최고라고 주장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을 통렬하게 조롱한 점이 바로 볼테르 소설의 매력이다. 2. 전근대(전통)과 근대라는 도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현대 볼테르와 라이프니츠, 이성과 신앙의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성이 신화로 전락하여 폭력으로 귀결되었다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푸념에서부터 이성을 무기로 내세운 근대는 실패한 기획이라고 단정지은 리오타르는 이성에 의한 계몽주의적 기획에 회의감을 표명했다. 이에 대항해 하버머스는 근대는 실패한 계획이 아니라 다만 완성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볼멘소리를 뱉었다. 이성에 대한 확신감이 떨어진 만큼 종교를 대안으로 보는 세력이 탄력을 받았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 대표적인 예다. 서구 지성사에서 다른 세계로 눈을 돌려 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의 이슬람 혁명, 얼마 전 선거에서 여당의 자리를 물려주긴 했지만 여전히 선전하고 있는 인도의 힌두 근본주의 정당 등이 그러한 예이다. 신앙에 호소하는 힘은 근대를 추진한 동력에 못지않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만 이전의 대립과 다른 점은 전통과 근대, 전근대와 근대라는 대립항이 더 이상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 종종 해체주의, 탈근대, 후기근대로 번역되곤 한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 : 후기식민주의, 탈식민주의로 번역된다)이 구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전통의 굴레로부터 자유를 주겠다는 근대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다소 과장하여 표현했듯 권력의 이해관계에 충실했고,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 비판하는 것처럼 제국주의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었으며,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것처럼 가부장제를 도왔다. 이 때문에 전통을 근대가 비판하면, 포스트콜로니얼리즘·포스트모더니즘·페미니즘이 근대를 역으로 공격하는 복잡한 상황이 도래한다. 인도의 사띠 풍습을 보자. 다른 사회가 그러하듯, 인도 역시 가부장제 사회이다. 남편이 먼저 죽으면, 아내는 남편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가야 한다. 그것도 불에 활활 타서…….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면서부터 사띠 풍습은 야만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사띠는 제국주의자가 계몽주의자로 둔갑할 수 있는 훌륭한 근거였다. 하지만 힌두 근본주의자들은 이를 다르게 공격한다. 서구 근대성으로 다른 사회를 제단하는 것은 제국주의적이고 폭력적이기에 올바르지 않다는 반박이다. 이 때문에 비교적 최근까지 사띠는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비호 아래 슬며시 행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이슬람 여성이 쓰는 '헤자브'에서도 발견된다. 3. 헤자브, 전근대의 상징에서 저항의 도구로 헤자브, 차도르, 브르카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이것은 이슬람 여성이 쓰는 베일이다. 헤자브도 인도의 사띠 풍습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의 기호가 다양한 기호를 나타내는 것이다. 터키를 위시하여 세속국가가 이슬람 지역을 점령할 때, 근대성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헤자브를 맹비난했다. 이슬람의 여성과 일부 남자도 동조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헤자브는 전근대, 가부장제, 정체, 무지를 상징하는 여성 억압의 도구였다.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 이슬람 혁명은 이슬람 세계 일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제3세계에 가져온 것은 기껏해야 끊이지 않는 빈곤과 전통? 대한 경멸이었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는 전통 세계가 차라리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이란을 기점으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권력을 잡았고 이슬람적 가치가 근대성을 대신하게 된다. 2004년 프랑스가 공립학교에서 이슬람 여성에게 헤자브 착용을 허용하지 않기로 한다. 이 때 헤자브는 역설적이게도 저항의 도구로 다시 태어난다. 일부 이슬람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헤자브를 착용한 것이다. 프랑스는 특정 종교나 인종으로 사람을 차별할 수도 있다는 우려와 엄격한 정교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헤자브 착용 금지를 발표했지만, 이러한 프랑스 정부의 행동은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공격으로 여겨졌다. 더 많은 이슬람 여성이 헤자브를 쓰기 시작했다. 4. 이슬람 페미니즘은 가능한가 인도의 사띠나 이슬람의 헤자브 문제에서 보듯 식민지의 경험을 겪은 곳에서는 진보와 보수, 좌와 우, 전통과 근대의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계몽주의는 진보였지만, 계몽주의가 타고 온 배는 제국주의였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문제를 결코 간단히 해결할 수 없다. 성차, 계급, 인종, 종교 등으로 얽히고설킨 실타래는 풀려고 하면 더 복잡해질 뿐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복잡할수록 간단하게 가야 한다. 『이슬람과 페미니즘』은 이슬람 혁명의 성지, 이란에서 성장한 페미니스트의 저작이다. 그녀는 기본에 충실하고자 한다. 1999년에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10년이 넘은 2010년에서야 번역되었다. 그렇다고 저자의 주장이나 책이 제기하는 문제가 시류에 뒤떨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문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고? 행동가들에게 좌절을 주기에 충분하지만, 불행히도 사실이다. 여전히 이슬람 지역에서 여성은 남자에 종속된 2등 인간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게 바로 종교,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슬람의 권력이다. 하이다 모기시는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에서, 이슬람 세계에서 여성의 입지가 좁아졌다고 말한다. 트럭 운전사로, 의사로, 법관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여성이 어느날 집안에 박혀서 아이만 봐야 한다면 믿겠는가. 혁명 세력은 과감하게 그렇게 했다. 명예살인이 버젓이 행해지는 나라가 이란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이슬람에서 여성의 위치가 서구사회보다 낮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 에드워드 사이드라면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오리엔탈리즘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했군. 그러나 저자의 논지는 훨씬 섬세하고 복잡하다. 그녀는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을 위시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을 이해한다. 보편적인 인권에 호소하는 전략이 실제로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한 일환일 수 있다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은 다양성과 차이를 강조한다. 따라서 서구의 잣대로 판단하지 말자는 게 요지다. 이 지점에서 헤자브 착용은 무지몽매가 아닌, 저항을 표시하는 기의를 획득한다. 하이다 모기시는 이러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논의에 충분히 동의한다.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무슬림 여성학자가 밝히는 포스트모던 분석의 한계'에서 보듯 주체가 아닌 타자를, 동일성이 아닌 차이를 지향하는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콜로니얼리즘은 명백한 한계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은연중에 권력과 공모했다는 비판을 받듯, 이슬람 여성을 향한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발언은 이슬람 원리주의의 주장을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출발한 운동이 권력을 도운 역설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하이다 모기시는 다시 한 번 근대성을 옹호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명시적으로 자신이 서구의 근대성을 옹호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보편적인 인권적 잣대가 서구 근대성의 성취라는 점을 비춰본다면 앞서 사용한 표현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이다 모기시는 이렇게 말한다. 중동에서 더 인본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 대안을 내놓지도 않으면서 모더니티를 거부하는 것은 원리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고, 비서구적·비유럽적·토착적·문화적으로 화합 가능한 가치를 이슬람 세계에 적절하고도 유일한 희망이라고 공표하는 일이다. (107쪽) 서구적 포스트모더니즘에 무비판적으로 매료되다가는, 중동 지식인은 엄청난 지적 체험의 수업료를 지불해야 할지 모른다. 그것은 이 지역의 가장 효과적으로 은폐된 억압적 체제인 이슬람 원리주의를 의도치 않게 후원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117쪽) 만약 저자에게 서구 근대성이냐, 이슬람 원리주의냐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를 던진다면 그녀는 당연히 서구 근대성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식민의 경험 그리고 중동에서 이슬람을 부정하는 것은 서구에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교회와 자본, 국가를 부정한 아나키스트가 어떻게 역사 속에서 잊혀졌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이슬람 사회에서 이슬람의 정체성을 부정하며 대안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슬람적 상황에서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흐름을 이슬람 여성주의라고 칭할 수 있겠지만, 이슬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여성주의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슬람은 전혀 여성 친화적인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페미니스트는 꾸란에는 성차별적인 발언이 없다고 말한다. 꾸란을 해석한 하디스나 이슬람 세계의 법인 샤리아가 여성을 억압했지, 성스러운 경전인 꾸란에는 섹시즘(생물학적 성으로 여성을 차별하는 이데올로기)의 요소가 없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일리는 있으나 꾸란에도 여성은 남자의 비호를 받아야 한다는 존재로 규정했고, 설사 꾸란에서 여성차별적인 요소가 없다고 한들 꾸란 못지않게 중요한 하디스와 샤리아가 여성을 억압하는 한, 이슬람적 정체성을 가지고 페미니스트가 되는 일은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5.이슬람 원리주의자, 21C 캉디드? 이 책을 읽으며 줄곧 떠오른 작품이 서두에서 언급한 볼테르의 소설 「낙천주의자 캉디드」였다. 이성에 의지하느냐, 신앙에 의지하느냐의 기로에 선 유럽 문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작품, 캉디드. 신정주의 국가라는 비아냥을 받는 미국을 제외하면 서구는 충분히 세속화된 사회이다. 이에 비해 이란을 비롯한 중동 지역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의 이슬람 세계는 세속화에 역행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이다 모기시의 주장처럼, 그래도 대안은 이성에 기반한 세속화라고 생각한다. 제국주의와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서구 근대성에 대한 반성과 회의가 두드러졌으나, 이러한 사실이 특정 종교의 원리주의가 옳다고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이슬람과 페미니즘」과 같은 목소리가 거듭 나온다면, 이슬람 원리주의 역시 서구 근대성의 대안이라고 보기 힘들다. 2010년 보수성향의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가 이란의 대통령으로 재집권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대선과정에서 이미 분열의 징후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슬람 혁명 이후 미국과 오랫동안 반목하며 자존심을 세우는 데 성공했으나 물질적 풍요나 정치적 자유, 보편적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이란의 체제가 성공했는지 쉽게 판단하기 힘든 실정이다. 특히 최근 미국의 대 이란 제재는 향후 이슬람 원리주의의 성패를 가늠할 정도로 이란에게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이성이냐, 신앙이냐. 모더니티인가 이슬람 원리주의인가. 캉디드는 온갖 불행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행복하다고 외쳤다. 과연 이슬람 원리주의 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여성들도 똑같이 생각할까. 이 같은 문제는 다른 세계종교에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D. L. 카모디는 『여성과 종교』에서 현재의 세계종교인 기독교, 불교, 이슬람이 가부장제에 공모했다는 지적을 했다. 비록 예수나 붓다, 마호메드가 당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하기 힘든 여성주의적 발언을 했으나, 이후 조직은 가부장제와 밀월하는 방향으로 흘렀다는 비판이다. 나는 여전히 소망한다. 칸트가 꿈꾸었던 세계영구평화를. 이를 위해서는 젠더 문제도 슬기롭게 풀어햐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슬람과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골치 아픈 문제를 한 더미 던져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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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에 앞서.......
‘이슬람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몇 가지 선입견들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소개하려면 무엇보다 그런 선입견들과 이 책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밝혀야만 한다. 우선, 1. 이 책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슬람 여성이 처한 억압적 현실(명예살인, 복장규제, 일부다처제, 인신매매 등)을 폭로하는 책이 아니다. 2. 서구의 입장에서(특히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이란, 수단 등을 경계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비난하기 위한 수단이나, 원리주의 체제하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의 페미니즘을 거론한 책도 아니다. 3. 그렇다고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간섭에 반대하기 위해, 따라서 이슬람 문화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 원리주의 통치하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의 삶의 현실에 눈을 감거나 그것을 과소평가하려는 입장도 아니다. 4. 또 이슬람의 문화적 차이라든가 문화적 진정성을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원리주의 정권의 여성에 대한 각종 비인간적 관행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상대론적 입장도 아니다.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페미니즘이란, 다양하게 주어진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을 반영하고 그에 맞는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시 되어야 할 점은 우선순위는 다를지라도 누구에게나 통하는 ‘열망’은 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슬람 페미니즘의 미시적인 현안은 분명 다른 문화권의 페미니즘 현안과 차이가 있고 또 이슬람 국가들마다도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서구 여성들과 똑같은 기본권 획득이다. 패션으로서의 베일? vs.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서의 베일?!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지혜로운 왕비 세헤라자데는 독특한 매력으로 서구인들에게 이미지화되었다. 특히나 무역종사자, 의사, 선교사 등이 서구로 보고한 문서나 기록을 통해 ‘베일’로 가려졌던 아라비아 여인에 대한 이미지는 묘한 에로티시즘으로 각인되었다. 이슬람교는 여성을 학대하는 종교라는 이미지가 존재해왔고,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슬람교의 부도덕한 성차별 관행은 무슬림 여성을 무슬림 남성의 횡포로부터 구원해야할 존재라는 관념을 낳았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유럽 남성들에게 ‘동양 여성’에 대한 일종의 성적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지나치게 단순화된 무슬림 여성에 대한 은유와 불편한 이미지들에서 유래한 오리엔탈리즘이 『이슬람과 페미니즘』의 출발점이며 그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베일’ 이다. 사용방식과 호칭의 다양성만큼이나 베일(헤자브)이 상징하는 이미지도 다양하다. 이미 패션으로 자리 잡은 헤자브는 고급 소재와 화려한 디자인을 가미한 소위 ‘명품 차도르’로 비무슬림 여성들에게도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또 뜨거운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의 이슬람 국가들에서의 차도르 착용은 모래바람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눈만 빼고 온몸을 가리는 아프카니스탄의 부르카는 몇 년 전 방송에서 이를 착용하지 않고 출연했다는 이유로 명예살인은 당했던 한 여성 앵커의 죽음으로 인해 억압의 대표적 상징이 되기도 했다. 한편 대학 강의실에서 차도르의 착용이 금지되어 있는 터키에서는 퇴학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차도르 착용을 고집하는 여학생들로 인해 ‘저항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베일’을 언급할 때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다양한 이미지와 의미를 고려해야 하며, 그 베일에 숨은 무슬림 여성들의 문제 역시 다양하고 다층적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이슬람의 페미니즘 논쟁을 따라가다 보면, 오리엔탈리즘이 만들어낸 무슬림 여성의 이미지 중 많은 부분이 실체가 없는 거짓임이 분명하게 밝혀지게 될 것이다. 안티오리엔탈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 이슬람 여성에 대한 허구적 이미지는 서양과 동양의 극단적 구분(종교적)에서 비롯된,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대로 ‘오리엔탈 타자’의 표상, 즉 오리엔탈리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의 구분 아래 자신에게 ‘낯익음’과 ‘낯섦’의 차이는 이내 우월한 서양이 미개한 동양을 ‘문명화할 사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착각이 ‘식민주의’를 낳았고 식민주의는 이슬람 페미니즘을 표면화하긴 했으나(무슬림 여성의 고통을) 그것은 여성의 도덕성이나 옷차림 등에 초점을 맞춰 문제를 지나치게 축소시켰다. 그렇다면 이에 반해 반식민주의, 혹은 안티오리엔탈리즘의 입장을 견지한다면 문제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 비록 이슬람교가 남녀평등을 부정하고 이슬람 사회가 가부장적 사회라는 것을 바꾸기 어렵다하더라도, 동시에 여타의 서구적 기획을 거부하면서도 저자는 문제 ?결의 실마리가 이슬람 내부에서 찾아질 수 있음을 밝힌다. 학계에서는 최근 4~50년 동안 포스트모니즘이 대세로 자리 잡아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이념인 ‘관용’은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에서 비롯된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존중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상대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볼 때, 낯선 남자에게 미소를 지었다는 이유로 한 여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살해당하거나, 마을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는 것조차 무슬림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나 인도 사람들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정도의 지역적 혹은 문화적 차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이국적인 것’과 ‘토착적인 것’의 무모한 추종은 회의주의라는 함정에 빠져 오늘날 하나의 종교,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은밀히 결탁한 셈이 되었다는 점을 이 책은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을 말하려는 것 역사를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사람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한번 계몽된 의식은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식민주의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비록 소수이긴 하나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나타났고, 비종교적 성향의 지식인들도 생겨났다. 특히 그러한 과정에서 미약하게나마 ‘젠더의식’을 갖게 된 여성들은 원리주의 통치하에서도 페미니즘 운동과 관련해서 다양하고 신선한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가 이슬람 페미니즘을 낙관하는 근거는 세상이 빠르게, 그것도 아주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구적 페미니즘’이 아니라, 그리고 미국과 같은 비무슬림 세력에 의해 이슬람 원리주의가 무너져서 얻는 반사이익으로서의 여성해방이 아니라, 이슬람 내에서의 ‘새롭고 혁명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이슬람과 페미니즘이 서로 융화할 수 있는 방법이 가능한 지 그 가능성과 한계를 짚어보자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문제의식이다. “개혁은 불확실하지만 어젠다는 남아있다.”는 말로 저자는 이슬람 내에서의 여성 투쟁의 미래를 확신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과 그 때문에 다급해진 원리주의자들이 더더욱 조급하게 행동해온 지난 20년 동안 많은 여성들이 저항과 투쟁을 지속해왔다. 이란과 수단에서, 또 파키스탄에서 그들의 근거지를 조금씩 확장해오면서 법치국가와 개인의 권리와 같은 사회적 변화를 끊임없이 촉구하고 있는 한 변화는 불가피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