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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아침햇발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천안 가는 길 티그리스강의 아침 눈다래끼 수호천사 벚꽃 아침햇발 같은 시를 쓰고 싶다 호반풍경 삼청공원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안개 세월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단단한 길 햇볕 따스한 봄날 벚꽃나무 아래서 남몰래 흘리는 눈물 봄마중 섹시하네요 아기 폭포 소주 한 잔 합시다 동상, 잘 가 뒤로 걸으면 장사 상강에서 해운대 풍경 개똥 소유 가랑잎의 무게 용서 명상 서로 다른 나무가 만나 다 내버려 두고 맷집 달리기 단잠 제2부 내 집은 어디에 경계 교신 무덤 숲에 살이 위하여 세상의 모든 힘 가을 찬란한 빛 마법사 참 신기한 일이다 활어 손맛 정분 봄 소리 도둑에 집을 맡기고 내 집은 어디에 날개 싸락눈 정화수 손님 맘대로 철쭉 시 열 편 낚시꾼 목련 흰 눈 보름달 박새 달빛 제3부 아버지를 닮았다 일 명품 안방차지 개화 골목길 사랑 몸 덕유산 바람이 무기 일요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세대 아버지를 닮았다 감자 약속 넥타이를 매며 꽃무늬 스타킹 빵 굽는 여자 파운데이션 작별 인사도 못하고 달콤한 긴장 가을산 매미 지팡이 등 뒤로 해가 한 바퀴 돌아 벼메뚜기 아차산 곱게 썩지도 못하고 풍장 죽어도 살아나는 소리 연속극 아내의 꿈 나사못 숨바꼭질 호수에 발목 잡혀 막차가 닿는 곳 해설 가랑잎 한 장에 실은 발자국 소리_이민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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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경계도 무화시키는 환상세계를 산책케 하는 시집
김정수 시인의 시집 『티그리스강의 아침』 출간 1994년 계간 『자유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첫 시집 『티그리스강의 아침』을 펴낸 김정수 시인은 현대건설에 근무하여 수많은 건설 현장을 두루 거친 도시건설자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는 첨단 유비쿼터스 빌딩도, 마천루 같은 아파트도, 눈부신 아케이드도, 유혹적인 백화점 진열장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동물들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사람과 자연이 서로 닮았으며, 지배적 관계에서 벗어나 문명 이전의 유희적 관계로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마침내 삶과 죽음의 경계도 무화시켜 버리는 환상의 세계를 시인은 산책하고 있다. 김정수는 산책자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의 보폭을 가지고 있다. 보들레르처럼 파리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틈에 있는가 하면, 모파상처럼 도시의 가장자리에서 환멸과 고통의 삶을 사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 것이다. 보들레르가 자본의 거리를 냉소하며 배회자로서 사람의 물결 속으로 흘러갔다면, 모파상은 철학적 사유를 버리지 않고 사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였다. 신문 보는 사람 휴대전화 동영상에 킬킬거리는 사람 꾸벅꾸벅 조는 사람 생각에 골몰한 사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 지탱하고 있는 걸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한 순간도 버릴 수 없는 내 삶의 소중한 시간 속에 함께 한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도 못하고 그만 다음 정거장에 내리고 만다 ―「작별 인사도 못하고」전문 김정수는 모파상과 같은 걸음으로 이 거리를 사유하며 걷고 있다. 그러므로 김정수의 문체는 난삽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 담담하게 세상을 관조하는 듯하지만 가랑잎 구르는 소리처럼 내밀한 속삭임을 차분히 간직하고 있다. 자연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풀어감으로써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보여주려 함이다. ‘아침햇발 같은 시’를 쓰고 싶은 고독한 도시의 산책자 또 한편 김정수는 ‘도시 건설자’다. 그런데 자신이 만든 거리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상념에 빠진 것인가? 로마시대 네로 황제처럼 흐뭇하게 즐겨야함이 마땅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는 자신이 축조한 풍경에서 눈길을 거두어 다른 시공간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역설적이다. 세련된 수식으로 치장되어야 할 그의 시는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 여백을 고독이라 이름 붙여도 괜찮을 듯싶다. 그것은 다분히 반성적 사유에서 비롯된다. 도시의 이미지로 시를 채우기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추구하는 생태학적 사유이기도 하다. 이놈이 차면 이리로 저놈이 차면 저리로 길바닥에 나뒹구는 낙엽 아무리 막 굴러먹어도 돌아갈 자리는 있어야 하는데 죽어야 다시 태어날 텐데 도회지에 산다는 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죽는 게 죽는 게 아니여 ―「곱게 썩지도 못하고」전문 발터 벤야민은 오늘날 도시인의 파괴적 행위를 19세기 부르주아의 불확실성과 무기력에서 찾았다. 새로운 산업시대를 구가했던 유럽의 도시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사람들 속에서 멸종의 조짐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도시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불안한 듯 황야를 배회하는 부랑아’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자기 파괴적 배회는 일종의 군중 속 고독을 암시하고 있다. 김정수의 시에도 고독이 있다. 그러나 그 고독은 아직도 철학적 산보자의 풍모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도덕적 성향이 짙게 묻어나고 때론 너무 완고하여 그의 삶의 자세를 다 헤아릴 수 없고 온전히 좇을 수 없는 독자를 멀리 떼어 놓기도 한다. 그의 고독은 철학적이다. 그러므로 때론 낯익기도 하지만 낯설기도 하다. 이는 그의 역설적 사유와 문체의 아이러니에서 기인한다. 그의 시선은 한 장 ‘가랑잎’에 가 닿고 있다. 가랑잎의 삶은 허무적이다. 그러나 거기에 자신의 온 생을 실을 줄 아는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다분히 노장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를 읽는 우리가 다 왔다 싶으면 어느새 그는 한 걸음 더 멀리 가 있다. 그는 여전히 ‘아침햇발 같은 시’를 쓰고 싶어 한다. 그래서 첨단 테크놀로지의 위력이 휘감고 있는 21세기 거리에서 아침햇발을 좇아 걷는 자체가 고독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