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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작은 밥상 하나 차리는 심정으로
짬뽕 그 아픈 봄날의 꽃전 국수와 거시기 돈까스, 촌놈의 자존심을 건들다 첫 원고료의 쓰임새 죽일 수는 있어도 길들이진 못한다 무얼 먹었는지 기억하라 - 사잇글 하나 그 때 그녀를 상상하다 그 처참한 날들의 기억 잊고 사는 것에 대하여 한여름의 눈사람 희한한 라면 조리법 미리 보아버린 인생의 참 풍경 배고프다 - 사잇글 둘 성철스님과 엘비스 프레슬리 간장 한 종지 까마귀가 날아간 자리 당신 품안에 있는 것 차 한잔 - 사잇글 셋 동리 선생의 '귀한 음식' 밥 먹었니? 완전식품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맛 고독한 식사도 감사하다 담배는 사랑스러운 애첩이었다 자연은 절대 쓰레기가 될 수 없다 죽 한 그릇 - 사잇글 넷 글을 마치며: 뒷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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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훈의 추억담 속에는 현재 잘 알려진 문인들과 소싯적 함께 한 일화들도 여러 편 숨어있다. 물론 저자는 그것을 정면으로 드러내고 있진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떤 추억을 공유하였는가’이기 때문이다.
출판사 일로 시인 곽재구 선생을 만나러 광주에 간 저자는, 그와 5.18묘지를 둘러보게 된다. 그간 개념적으로만 광주혁명을 접했던 저자는 죽은 자들의 영정사진이 모여있는 돔 안으로 들어가자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오열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후 착잡한 마음을 달래러 곽재구 선생과 한 허름한 식당에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맛본 갈치구이의 맛을 잊지 못한다. 가두어지거나 길들여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갈치의 속성처럼, 광주의 허름한 식당에서 먹었던 갈치구이는 작가에게 적지 않은 에너지를 주었다고 쓰고 있다. 이 외에도 대학원생 시절 때 김동리 선생 댁을 방문했다가, 아주 귀한 음식이라며 조심스럽게 밀크초콜릿을 뜯어주시던 선생의 천진스러움을 담기도 하였고, 소설가 김훈과 함께 먹었던 꽁치구이의 기막힌 맛도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무엇보다 가난을 몸소 체험하며 살고 있는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 댁에 원고청탁이라는 실리적인 이유로 찾아갔다가, 그로부터 밥 한 공기에 간장 종지 하나라는 귀한 밥상을 대접받았던 일화는 두고두고 곱씹으며 읽게 만든다. 본문 가운데 몇 개의 문장만 옮겨본다. 어느새 내 부엌에는 쌀 봉투 대신에 작은 항아리가 놓여있었고, 그녀는 수시로 쌀 항아리를 점검하여 가득가득 채워놓았다. 물론 그녀는 자기네 집에서 퍼 나르는 것이다. ‘딸은 다 도둑’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렇게 귀여운 도둑은 얼마든지 환영이다. 그녀가 나를 먹여살린 것이다. 오 귀여운 것! 사랑스러운 것! 그런데 가만히 주위를 살펴보니, 나와 같이 쌀 동냥을 다녔던 친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녀석도 쌀 봉투를 버린 지 오래되었다. 녀석은 사학과, 나는 영문과에서 골라잡았다. 참 기가 막힌 놈들이다. 그때 또 나는 깨달았다. 사랑이라는 거, 그것은 빈 쌀독에 쌀을 채워주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알게 된 것이 있으니, 그건 좀 늦게 알아도 되는 건데, 사랑한다는 건 결국 같이 밥 먹는 거였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본문 176쪽) 그녀는 참으로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사람의 아픔, 남자의 아픔 같은 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은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하면서도 나의 이야기에 세심히 귀기울여 들여주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것, 그것은 슬픔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는 사람이다. 기쁨에 들떠있는 사람들은 그걸 할 줄 모른다. 슬픔에 너무나 푹 젖어있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남의 얘기를 들어줄 수 없다. 그녀와의 대화에는 빈 의자가 존재한다. 나는 거기에 편안히 앉을 수 있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왜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나에게 익명의 여인이었다. (본문 151쪽) 먹는다는 행위는 가장 세속적이면서 가장 고결한 영혼의 행위이다.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수도승이 되기도 하고 돼지가 되기도 한다. 나는 권정생 선생과의 점심식사를 통해서 그 맛을 보았다. (……) 음식을 천천히 입안에 넣고 씹으면 교감의 시간이 찾아온다. 생각해 보면 음식을 먹는 것처럼 완벽한 교감의 시간이 없다. 혼연일체의 순간이다. 먹는 것은 위로 들어가 완전히 분해되어 피와 살이 된다. 이런 간절한 사랑의 표현이 또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은 서로 교감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이해하고 싶어한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본문 144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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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려울 때, 우린 비로소 ‘인간’을 찾는다
지난 1998년, 이른바 IMF 사태로 인해 세상은 구조조정, 명예퇴직, 실업, 부도의 찬바람 속에 때아닌 추위를 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세상 일엔 그 반대급부도 존재하듯이, 당시 출판계에는 ‘아직도 세상은 따뜻한 곳’임을 알게 해주는 에세이나 일화 형식의 책들이 봇물처럼 선을 보였다. 보통 사람들의 작지만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을 모은 논픽션 류의 책이, 경제한파로 인해 얼어붙은 당시 일반 독자들에게 책을 읽는 그 순간이나마 위로를 받게끔 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2003년 초겨울이 되었다. 추워지는 날씨야 자연의 순리이니 반갑게 맞이할 수 있으련만, 대한민국의 경제사정은 5년 전 그 IMF 시절보다 더 악화됐으면 됐지 결코 나아지지 못했다는 이야기들이 술렁이고 있다. 이렇게 세상이 어려울 때, 사회가 기력을 잃어 방황하고 있을 때, 일반 대중에게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도움 혹은 삶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게 어쩜 ‘책’이라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돈 많이 버는 법을 활자로 풀어낸 책도 있고, 너 자신부터 계발하라고 일침을 가하는 책도 있으며, 겉 껍데기의 ‘나’가 아닌 더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라는 책도 나와 있다. 무엇이 더 좋은 내용이라고 어떻게 재단할 수 있겠는가. 바다출판사에서 새로 나온 신간 '내 인생의 밥상'은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돈 버는 법을 제시해주지도, 내면을 단련시키는 방법도,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라는 냉철함도 요구하지 않는다. 저자 원재훈은 그저 담담히 자신의 과거 추억들을 한 개씩 한 개씩 꺼내가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읽는 그 순간만이라도 휴식할 것을, 그리고 행복한 삶이라는 게 돈 이외에도 ‘무언가 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실제 이야기를 통해 증명해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도 정의하지 않는다. 이것이 여타 ‘마음 서적’과 구별되는 이 책의 특징이다. 이는 소설가 김훈 선생이 쓴 발문에서도 드러난다. ‘밥은 삶이며 정서이다. 밥은 추상이 아니다. 목구멍으로 먹이가 넘어가는 질감은 삶의 근원정서이다. 그래서 밥은 절박하고도 간절하다.’ 결국 추상적이고 감상적으로만 흐르는 인생 추억담의 한계에 머무르지 않고, 아무런 현실적 언급 없이 ‘삶은 무조건 따스하고 행복은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순진한 독자들 앞에 달콤히 속삭이지도 않는다. 다만 지나온 과거의 흔적들이 ‘삶의 근원’이라는 한 가지 지점에 도달하는 면면들을 다양한 이야기 톤으로 읊어나가는 것이다. 삶이라는 게 코믹하면 코믹할 수도, 절규할 것 같은 울음이라면 또 그렇게, 황당하기도, 감동스럽게도, 철없게도 흘러갈 터이니, 저자 원재훈도 이런 다양한 감정을 여지없이 오르내리면서 써내려가고 있다. <삶과 사람 사이에 언제나 ‘음식’이 있다> 이 책은 시도 쓰고 소설도 쓰는 작가 원재훈의 에세이집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는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사람 만나 인연맺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항상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음식이다. 가족이 함께 어울려 밥을 먹고, 친구들은 모여서 떡볶이를 먹는다. 사랑하는 여인과 멋진 저녁식사를 꿈꾸고, 업무에 지친 동료끼리 술 한잔에 꼼장어 구이를 뒤집는다. 저자는 40년 제 인생 가운데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인연이든 혹은 잠시 스치고 지나간 인연이든, 그와 어떻게든 관계지어졌던 여러 사람들을 이 에세이집의 주인공으로 옮겨 놓고, 자신과 각 인물들을 이어주는 공통된 매개물로 ‘음식’을 배치시켜 놓고 있다. 아니, 그는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억지로 음식이라는 존재를 끄집어 낸 것이 아니라 ‘내 삶 혹은 지나간 숱한 인간관계들을 기억해내면 그때엔 어딘가에라도 왜 꼭 음식이 놓여있었는가’ 하는 발견으로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어릴 적 방랑을 일삼던 큰아버지와 함께 짬뽕을 먹던 저자는 당시 옆 테이블의 노동자들이 자장면을 먹는 것을 본다. 이때 큰아버지의 한 마디에 그는 성공과 가난의 모호한 구분법을 처음으로 느끼게 된다. “열심히 공부하고 착하게 살아야 된단다. 그래야 돈도 많이 벌고 우리처럼 이렇게 짬뽕을 먹을 수 있는 거다. 공부 안 하고 놀기만 하면 저 사람들처럼 자장면밖에 먹을 수 없는 거야.” 어떤 선배와 추운 겨울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찾아간 영등포 사창가의 한 포장마차. 청년 시기의 저자는 그곳에서 막무가내로 자신을 잡아끄는 한 윤락녀를 보고 당황하지만, 뭉개진 화장 사이로 깊게 패인 눈주름과 삶에 대한 극심한 피로의 흔적을 보이던 늙은 창녀가, 결국 남자가 아닌 기계국수 한 그릇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며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사유하게 된다. 그것은 ‘허름한 성욕보다는 절실한 식욕이 더 아름답다’는, 단순하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사실 하나이다. 그러나 음식을 매개로 한 각각의 추억담 속에서도 유머러스와 따스함 역시 빠지지 않는다. 돈까스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촌놈 친구가 맘에 드는 아가씨와 첫 데이트에서 돈까스를 시켰다가 일어나는 해프닝을 꽁트처럼 묘사한 글은 배꼽을 쥐게 한다. 습작생의 꼬리를 달았던 대학 신입생 시절, 마치 시를 쓰는 고뇌하는 시인입네, 하고 하릴없이 대학로 한 카페에서 룸펜처럼 생활하던 그 무렵, 첫 원고료를 탄 한 선배의 ‘한 턱’으로 우르르 몰려갔던 혜화동 떡볶이집. “오늘 우리가 이것 모두 ‘도리’합니다”라는 선배의 한 마디를 시작으로 폭풍처럼 순식간에 휩쓸려버린 떡볶이 판……. 그렇게 저자는 내 생을 살게 한 소중한 사람들과, 그 소중한 사람들의 식욕을 채워주었던 더욱 소중한 음식물들에 감사해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