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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말 _4
궁성과 문 _10 창경궁 개관 - 세 분의 대비를 위한 궁궐 _11 홍화문 - 백성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하는 문 _27 선인문 - 죽어서야 선인문을 나간 장희빈 _44 월근문 - 매월 슬픔에 잠기는 문 _56 집춘문 - 불시에 치르는 과거시험 통로 _74 치조 일원 _78 옥천교 - 후금사신에 대한 박대가 큰 재앙을 부르다 _79 명정문 - 특명: 조선왕실의 대를 이어라 _96 명정전 - 청계천 준설을 시작하다 _108 문정전 - 사도세자의 비극이 시작된 곳 _119 숭문당과 함인정 _134 숭문당 -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영조의 패착 _135 함인정 - 혜경궁 홍씨는 왜 대비가 아닐까? _143 내전 일원 _151 경춘전 - 인수대비가 서열 2위가 되기까지 _152 환경전 - 사도세자에게 한 약속을 뒤집는 영조 _163 통명전 - 계모가 먼저냐? 조강지처가 먼저냐? _174 양화당 - 삼전도의 굴욕을 기억하자 _187 영춘헌과 집복헌 - 정조는 과연 독살되었을까? _199 춘당지 일원 _207 춘당지 - 과녁을 못 맞추면 벌주를 마셔라 _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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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 장희빈의 죽음을 함께한 선인문
창경궁 홍화문 남쪽에 위치한 선인문. 정면 2칸의 작은 문이지만 많은 역사적 사건을 목격한 문이다. 우선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가 폐서인되어 사가로 쫓겨 갈 때 이 문을 통해서 나갔고, 중종반정 때의 연산군도 이 문을 통해 궐 밖으로 나갔다. 선인문이 목격한 사건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은 바로 사도세자와 장희빈에 대한 것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사건은 많은 미디어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매체에서 많이 봐왔던 것처럼 사도세자는 정전 앞에서 뒤주에 갇히고 최후를 맞이했을까? 궁은 기본적으로 명당 위에 세워지고 그 명당의 기운이 궁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물길로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모든 궁궐은 돌다리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그 자리에는 나쁜 기운이 생겨나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는 명당기운이 약하거나 다른 곳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 장소를 골라 놓여졌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요소를 따져봤을 때 그가 최후를 맞이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 바로 선인문 안마당이다. 사도세자와 같은 이유로 사약을 받은 장희빈의 시신도 이 문을 통해 궁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숙종 27년(1701) 10월 10일 / 장씨의 상을 선인문으로 나가게 하다 하교하기를, “장씨(張氏)의 상(喪)을 단봉문으로 내보낸다면 건양현(建陽峴)을 지나갈 것이니, 일이 미안한 데 관계된다. 어느 문으로 내보 내야 할 것인가? 병조로 하여금 품정(稟定)하게 하라.” 하니, 병조에서 아뢰기를, “취선당이 건양현과 명정전 사이에 있으니, 서쪽으로 건양현을 지나고 동쪽으로 명정전의 어로(御路)를 지나는 것은 모두 미안할 듯합니다. 선인문(宣仁門)으로 나가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아들을 질투한 인조의 상식 밖 행동?! 인조는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면서 자존심에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볼모로 끌려간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잘 적응하며 백성을 살핀다는 미담은 그에게 더욱 큰 불안감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청나라에서는 노골적으로 세자를 언급하며 인조를 압박했는데, 심지어 병자호란 때 차라리 인조 대신에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웠으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말까지 흘렸다. 어찌보면 자신의 정치 라이벌인 세자가 자신보다 유능해 보이는 것이 결코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조는 소현세자 내외에게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바로 세자빈 강씨의 부친상에 그들이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청에 볼모로 잡혀있던 세자내외는 세자빈 강씨의 부친상 조문의 이유로 임시귀국을 허락 받았는데, 인조가 빈소참배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신하들도 참배를 허하라 청하였지만 인조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세자가 기나긴 볼모생활을 마치고 완전히 귀국했을 때, 마중도 가지 않았으며 잔치도 열지 말라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소현세자의 사후 시신의 상태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어 충분히 설득력 또한 얻고 있다. 인조 22년(1644) 2월 9일 / 영의정 등이 세자빈이 부모를 찾아뵙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아뢰다 영의정 심열, 좌의정 김자점, 우의정 이경여가 아뢰기를, “세자빈이 이역(異域)에서 나그네로 붙여 있다가 뜻밖에 어버이의 상을 만났으니 슬픈 마음으로 궤연(?筵)에 임하고 또 모친을 살펴보는 것이 인정이나 예의로 보아 폐할 수 없는 일인데 돌아갈 기일은 임박하고 어버이를 살펴보았다는 말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중략)… 세자께서 당초에 빈궁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할 때, 부친은 죽고 모친은 병중에 있다는 것을 아울러 거론하여 그 이유로 내걸었는데, 이제 찾아가 곡하고 모친을 살펴보는 절차가 없으면 저쪽 청나라가 그 말을 들을 때 또한 반드시 의아해 할 것입니다. 신들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때 아무래도 미안한 바가 있으므로 감히 소견을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과인이 지금 재변이 참혹하고 민심이 안정되지 않은 것을 걱정하느라 법 밖의 예나 외람한 거조는 생각이 미칠 틈이 없다.” 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은 지덕체를 모두 갖추어야 했다?! 한 때, ‘한 우물만 파면 된다’라는 문구가 들불처럼 번지던 시기가 있었다. 그 이후 ‘하나만 잘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문구가 다시 번지면서 한 사람에게 다재다능을 추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래서 지금은 공부는 기본에 악기, 운동은 물론 취업 면접까지 학원을 다니며 배우고 있다. 이처럼 한 사람에게 다양한 재주를 바랬던 건 비단 현 시대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루 종일 글공부만 했을 것 같은 성균관 유생들도 글공부는 기본에 무예까지 익혀야 했음을 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성종 8년(1477) 8월 3일 / 성균관에 나가 석전을 행하고 명륜당에서 유생을 시험하도록 명하다 …(전략)… 술이 세 순배 돌자,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는데, 헌 가(軒架)에서 풍악이 연주되니, 임금이 네 대의 화살[乘矢]을 쏘아 1시(矢)를 맞혔다. 그리고 나서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 과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이하 68인이 차례로 짝을 지어 활을 쏘았는데, 맞힌 자는 상(賞)을 주고, 맞히지 못한 자는 벌(罰)을 주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후략)…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활쏘기를 무예만이 아닌, 심신 수양의 방법론으로 보았다. 활을 쏘는 예법을 사례(射禮)라고 하고, 종류에는 대사례(大射禮)와 향사례(鄕射禮)의 두 가지가 있는데, 주관하는 곳에 따라 임금이 주관하면 대사례, 대부나 지방관이 주관하면 향사례라고 하였다. 무려 왕과 함께 활쏘기를 하는 것은 물론, 과녁을 맞히지 못했을 때는 벌까지 받았다니 유생들에겐 과거시험보다 더 어려운 행사가 아니였을까? 이처럼 각 건물들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우리가 접하는 문화재를 컴퓨터로 예를 들자면 유물 또는 문화재들은 하드웨어이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역사)는 소프트웨어이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컴퓨터를 제대로 작동시킬 수 없듯 문화재 속에 담긴 역사를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문화재 답사를 했다고 볼 수 없다. 스스로 한번 자문해보자. 우리는 항상 겉으로 들어난 창경궁의 하드웨어만을 둘러보고 있지 않은가? 본 서적에 실린 소프트웨어(역사)를 잘 숙지하여 창경궁의 하드웨어와 접목시킨다면 그 순간부터 새로운 창경궁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