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 산촌동화(山村童話)
〈2〉 피의 불꽃, 악몽의 하늘 〈3〉 하, 수상한 시절에 대하여 쓰다 〈4〉 적승(赤繩) 〈5〉 초야화우(初夜花雨) 〈6〉 암전(暗轉) |
이지환의 다른 상품
|
한동안 고개를 외로 꼰 채 괜히 손에 닿은 풀줄기를 쥐어뜯던 은리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제 우리, 큰일 났다. 결이 오라버니.” “왜?” “어머니가 그랬는데, 옷 벗고 사내에게 안기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쪽하고 혼인해야 한다는데.” “뭐가 어렵겠니. 혼인하지 뭐.” 세결은 반 체념하여 중얼거렸다. 돌아보는 검은 눈이 오목해졌다. 어쩐지 좋아선 은리의 볼이 탱글탱글 꽃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그게 그동안 네 소원 아니었니? 이왕 이렇게 된 거, 혼인하지 뭐. 난들 없던 일로는 못해.” “음, 좋아. 그럼 정표로 은리에게 뽀뽀를 해.” 어린 것이 앙큼도 하다. 기회가 생겼으니 절대로 놓치지 않는고나. 은리가 얼른 돌아앉았다. 사뭇 수줍어하면서도 대담하게 볼을 내밀었다. 세결은 고개를 숙여 통통한 분홍빛 볼에 입을 맞추었다. 살포시 눈을 감은 은리의 긴 속눈썹에 무지개가 어렸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수줍은 언약식이 끝난 후 은리가 또 야무지게 요구했다. “혼약의 정표도 줘.” 조그만 놈이 할 건 다 하잔다. 세결은 잠시 한숨을 쉬다가, 몸을 일으켰다. 언덕을 타고 내려와 머리 위에서 한들거리는 보라색 칡꽃 한 송이를 따 들었다. 곧추세운 채 기다리고 있는 은리의 작은 손가락에 매듭지어 꽃반지를 만들어주었다. “이젠 됐어?” “꽃은 곧 시들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줘.” 네에네에, 가지가지 하시는군요. 세결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정말 혼인을 하게 되면, 평생 이 녀석 고집에 휘말려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좀 걱정도 되었다. 그렇지만 잔뜩 기대에 가득 찬 은리의 눈동자가 기다리고 있다. 그 눈 속에 실망감이 번지는 것을 그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궁리하던 세결은 지금껏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청옥으로 만든 작은 해태상, 생모 귀비께서 돌아가실 적에 이야기해주셨지. 자신이 태어났을 때, 부황께서 직접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 걸어주었다고. 결국 그 목걸이는 황제의 표식이었던 것. 하여 나이가 비슷했던 형이자 두 번째 태자 가우는 늘 목걸이를 몹시 탐내하고 투기하기도 했다. “내가 가진 건 이것뿐이니까.” 그러니까 은리야, 넌 모를 테지만 넌 지금 사유타의 태자비가 된 거야. 난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다 주었어.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고백을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리며 세결은 은리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나중에 혹여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응.” “네가 사유타로 날 찾아와. 우리 집에 와서, 문지기에게 이걸 보여줘. 그럼 당장 널 나에게 데려다줄 거야. 그럼 우린 언제든 만날 수 있어. 잊지 말고 간직해. 알았지?” 은리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더니 허리를 굽혀 제 발치에서 조그마한 돌멩이를 하나 주워 들었다. “천지신명에게 약속해. 은리와 결이 오라버니가 혼인하였다고. 여기다 오라버니랑 은리 이름을 새겨.” 말 잘 드는 꼬마신랑 세결은 주머니칼을 꺼내, 꼬마 신부 은리가 시키는 대로 둘의 이름을 나란히 새겨놓았다. “칼로 돌에 우리 이름을 새겼으니, 금석지약이다.” “쳇, 약조는 돌에다 새기는 게 아니지. 마음에 새기는 거랬다, 뭐.” “넌 나보다 훨씬 쬐그만 게 그런 걸 어찌 다 아니?” “새언니가 그랬어. 원래 보이지 않는 마음에 새긴 맹세가 제일 중한 거라고. 자, 이제 이 돌멩이를 숨겨놔야지. 누가 보면 부끄러우니까. 헤헤헤.”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