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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공론정치의 새로운 전개
18, 19세기 향회, 민회를 중심으로 반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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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머리말

Ⅰ. 서론 ― 조선시대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공론정치’ ―

Ⅱ. 조선시대 ‘공론정치’의 구조와 그 전개
1. 조선 정치사 이해와 공론정치론
2. 공론정치의 구조
3. 공론정치의 전개와 지방 향회

Ⅲ. 공론정치의 지속과 단절
1. 여론과 공론정치
2. 조선의 정치 발전과 공론정치의 성쇠
3. 18세기 공론정치의 단절과 지속

Ⅳ. 18세기 향회의 성격변화
1. 향중공론의 분열
2. 관 주도 통제책 강화와 ‘대소민회의’
3. 사족 자치기구에서 부세운영 자문기구로

Ⅴ. 19세기 향회, 민회와 공론정치의 새로운 전개
1. 19세기사 이해의 방향
2. 향회의 다중성과 공론 실현방식의 대립
3. 19세기의 향회
4. 19세기 민회의 전화

Ⅵ.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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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저자 소개 1

金仁杰

197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선후기 향촌사회 변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한신대학에 근무하였고, 1986년 9월 이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시기 사회사 연구법』 (공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20세기 역사학, 21세기 역사학』 (공저, 청년사, 2000) ,『朝鮮의 政治와 社會』 (공저, 집문당, 2002),『정조와 정조시대』 (공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朝鮮時代 社會史 硏究 史料叢書』 1, 2, 3(공편, 보
197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선후기 향촌사회 변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한신대학에 근무하였고, 1986년 9월 이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시기 사회사 연구법』 (공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20세기 역사학, 21세기 역사학』 (공저, 청년사, 2000) ,『朝鮮의 政治와 社會』 (공저, 집문당, 2002),『정조와 정조시대』 (공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朝鮮時代 社會史 硏究 史料叢書』 1, 2, 3(공편, 보경문화사, 1986),『한국현대사 강의』 (공편, 돌베개, 1998) 등이 있다. 주로 조선시대 향촌사회사 관련 글들을 써 왔고, 근자에는 전통문화와 한국인의 정체성에 관한 주제에 관심 갖고 글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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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8월 15일
판형
반양장 ?
쪽수, 무게, 크기
208쪽 | 350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52119612

책 속으로

16세기에 들어오면 조선 정치사에서 하나의 ‘투어(套語)’로 자리 잡게 된 문구, 즉 “공론(公論)이 공경(公卿)에게서 행해지지 않으면 대각(臺閣)으로 돌아가고, 대각이 못 맡으면 초야(草野)로 돌아간다. 공론이 공경에 있으면 다스려지고 대각에 있게 되면 어지러워지며, 환시(宦侍)한테로 돌아가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하는 명제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이후 정치운영의 한 기준이 되었다.--- p.26

각 지방의 사족들은 향중공론이라 할 향론에 따라 일정 범위 이내의 사족만을 엄선하여 향안을 만들고, 이 향안에 입록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향회를 구성하여 한 고을의 대·소사를 처리하고 있었다. 향회는 크게 1년에 1-2회 정기적으로 열리고 전 향원이 참가하는 대회(大會)와, 전직 임원과 일정 연령 이상이 중심이 되어 사안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열리는 소회(小會)가 있었다. 향회를 개최하거나 긴급한 현안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향청에서 향원을 대상으로 통문을 돌렸다.
향회는 유교적 윤리의 실천이나 교화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었다. 구성원 참여를 놓고 권점을 통해 가부를 결정하는 것, 그리고 주론지원인 향로(鄕老)·향장(鄕長)·향유사(鄕有司)의 소견(所見)이 각각 다르면 정론(正論)을 따르고, 그러고도 정론이 둘로 갈라지면 종다시행(從多施行), 즉 다수결에 따른다는 약속조목에서 볼 수 있듯이,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고 하는 공론을 따르면서도 그것에 일정한 규약을 두어 합의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 공론정치 전개의 또 다른 한 특징을 발견한다. --- p.47-48

19세기 향회는 주로 부세 문제와 관련하여 다루어져 왔는데, 민란의 조직기반이 된 향회의 경우 기존 수령의 부세 자문기구로서의 향회와 구별하여 요호부민층(饒戶富民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간 향회로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기도 하고, 기존의 향회 가운데 관의 거수기 역할을 하는 ‘작은 향회’와 아직도 그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큰 향회’로 구분하여 후자에서 반관적(反官的) 저항의 움직임이 나온다고 보기도 하며, 아예 저항조직을 ‘민회’로 차별화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민회라는 새로운 명칭을 부여하자는 주장은 ‘대·소민인’이 같이 모여 거사를 진행하는 가운데서도 일반 민은 과거와 같이 동원되는 수동적 지위로서의 중민(衆民)에 머물지 않고 독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명칭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p.102

19세기 일련의 사태 진전과정에서 농민들은 동리 단위에서의 결집력을 바탕으로 등소(等訴)를 올리는가 하면, 민란기에는 읍, 면, 리(동) 단위에서 지배층 피지배층을 떠나 대·소민인들이 공동으로 문제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전통 위에서 기존 향회와는 또 다른 의사결정기구를 만들어 나갔다. 모이는 장소나 방법에 따라 읍회나 도회로 불리기도 하였고, 같은 향회란 명칭이 사용되는 경우에도 반관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가운데는 ‘민론’을 반영하는 ‘민회’라는 명칭의 집회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1893년에는 한 고을을 넘어서 삼남지방을 넘어 온 지방 사람들이 다 같이 모이기 쉬운 충청도 보은에서 전국적인 ‘민회(民會)’를 개최할 수 있었으니, 이는 민중의 탄생으로 19세기 정치사가 이룬 커다란 성과였다. 그렇지만 이 같은 시대적 경험은 기억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정치적 현실에 갇혀 시민권을 획득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로 대·소민이 참여하는 ‘거족적’ 공론의 장은 사라진 듯 보였다. 이 거족적 공론장은 일제의 압박하에 ‘천도교’ 등을 매개로 다시 살아났지만 아직 독립된 민족국가에 자리 잡을 수가 없었다.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동학군이 물러간 자리에 새로이 들어앉은 독립협회는 친일 개화파나 동도서기론을 내세운 보수 관료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정치의 공백을 틈타 안경수, 정교 등은 쿠데타를 통한 정권 장악을 기도하는가 하면, 대중적 기반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만민공동회 역시 러시아를 견제코자 하는 일본(영국, 미국)의 후원을 받아 활동하였지만 그 집회의 범위는 종로거리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19세기 이래 삼남지방에서 볼 수 있었던 대·소민들의 동향이나 1904년을 전후한 서북지역에서의 ‘민회’에서 볼 수 있듯이 전 주민의 의견들은 ‘민론’으로 새롭게 자리 잡아 나가고 있었다.

--- p.159-160

출판사 리뷰

조선후기에는 과거 조선왕조를 이끌어 온 ‘공론정치’에서 양반계급이 중심이 된 ‘공론’과 병행하는, 때로는 그것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전 인민의 이해를 반영하는 공론의 장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향회’와 ‘민회’가 바로 그것이다.

향회와 민회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지방사회 대소민인의 의사를 결집해 내고 있었던 조직으로서 당시 새롭게 제기되고 있던 지방사회 공론을 대변하였으며, 기존 양반 문화와는 다른 전 주민들의 새로운 정체성의 기반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 새로운 공론장은 기존 공공영역과 충돌하면서도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던 것으로서 합법적 공간과 비합법적 공간을 넘나드는 것이었는데, 기존의 공론장을 대체하는 데까지는 아직 상당한 시간을 더 필요로 하였다.

머리말 중에서

조선시대의 공론정치가 역사학계만이 아니라 철학계 및 사회과학계의 관심 대상이 된 것은, 서구의 공론장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자극제가 된 것이기도 하지만, 사방이 꽉 막힌 한국 현실이 그렇게 만든 측면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이러한 현실적인 고민을 가지고 보았을 때 조선의 공론정치는 매력적인 주제임이 틀림없다.

현실이 아무리 문제가 많고 어렵더라도 만세토록 없어지지 않을 그 무언가를 부여잡고 유교적 이상사회를 추구하며 자신들이 그 공론의 담지자임을 자부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렇지만 사림공론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공론정치는 자부심의 대상이면서도 한편으론 그 원칙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의심이 가는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었다. 입을 닫고 있는 것이 상책이라는 조정 신료들의 함묵성풍(含?成風) 풍조 속에 새 돌파구를 찾아야 했던 국왕 정조의 노력도 시세(時勢)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정조의 죽음으로 시작된 19세기에 들어오면 예의 세도정치가 열린다. 중앙정치만을 놓고 볼 때 세도정치기에 들어오면 공론은 사라지고 그 결과 ‘민란’이 만연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과연 조선후기에 들어와 공론정치는 막을 내린 것인가.

이 책은 바로 위와 같은 위로부터의 시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에서 시작한다. 1980년대 이래 크게 성장한 사회사적 연구에 기반 해서 본다면, 기존 공론정치와 대립하면서도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방 향촌사회에서는 새로운 공론장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 19세기의 대소민인(大小民人)이 같이 만들어 간 향회(鄕會)와 민회(民會)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사회를 흔히 양반사회라고 하지만, 조선사회는 국왕과 지배계급인 양반, 그리고 그 밑을 받쳐 왔던 민 등 이들 3자가 연출한 역동적인 사회였다. 그러니 조선후기는 공론정치가 종식된 것이 아니라 공론정치가 새롭게 전개되어 간 시기로 자리매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근대’ 국민의 형성과정에서 큰 갈등 없이 ‘민주공화정’을 스스로 선언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면 지나친 억단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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