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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부 2부 에필로그 작가의 말 작품 해설 나쁜 소설이 오다_강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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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는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돌렸다. 민우는 손톱으로 아녜스의 등을 꾹꾹 눌렀다. 아녜스는 말이 없었다. 민우는 자꾸만 아녜스를 쓰다듬었다. 몸이 고민을 잊게 만들었다. 임신.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병원에 가면 해결될 일이었다.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아녜스는 경험했을지도 몰랐다. “선생님도 좋았으면 좋겠어요.” 처음 잤던 날 아녜스가 그렇게 말했다. 마치 몸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두 안다는 듯, 섹스에 자신 있다는 태도였다. 그 노련함이 기분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 애에게 첫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고마웠다. 쉽게 떠나려면 특별하지 않아야 했다. --- p.47
“장애인이라고 꼭 한번 준 정을 죽을 때까지 유지해야 되는 건 아니잖나. 장애인이기 때문에 의무가 더 크다고 강요한다면 그것도 일종의 차별 아닌가? 사랑의 본령이 뭔지 고민되는 거 있지. (……) 레지나가 장애인이니까 내가 마음을 잘 쓰기로 했는데, 그 애 장애를 내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나니까 마음이 달라지던걸? 내가 이 애랑 살 수 있을까 하는…….” --- p.142 민우는 고개를 돌렸다. 레지나가 샤워를 할 때 세키가 어떻게 할 것인지……. 몇 차례 그런 상상을 했다. 레지나와 한 집에서 살려면 세키와는 별거해야 할 것 같았다. 세키와 레지나의 대화는 몸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레지나의 말을 세키가 일방적으로 들을 수만은 없을 것이었다. 말을 건네고 싶어지면 세키는 점자를 배웠으니 그걸 이용하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점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글자였다. 즉흥적인 말을 전하려면 세키는 레지나 몸에 손을 대야 하는 사람이었다. 레지나는 안내를 받아야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 pp.163-164 선생님은 아녜스 쪽에서 부르기 전엔 연락이 없었다. 선생님은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첫 경험이 언제였는지를 계속해서 물었다.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당신이……. 아녜스는 손톱으로 선생니미 가슴을 쓰다듬었다. 밉고 원망스럽고 그러나 사랑스러웠다. 개학이 내일모레였다. --- p.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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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나와 아녜스. 부모가 일찍 죽고 수녀인 이모에게 보호받는 이 자매의 이름은 아름다운 성녀의 이름에서 따 왔다. 자매는 서로를 미워하고 또 사랑했다. 세키와 민우. 고향을 버리고 일찍부터 나와서 함께 지내던 이 사촌 형제는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살아오고 있었다. 그들 역시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어느 순간 사랑했다.
어느 날 언어 장애를 가진 세키가 맹학교에 다니던 아름다운 레지나에게 반하면서 이 네 남녀의 일그러진 관계가 시작되었다. 야간 여상의 교사였던 민우는 자기 학급 학생인 아녜스와 밀회를 갖는 사이였고 예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레지나를 만나 알고 지내던 터였다. 그런 민우는 세키가 갑자기 레지나에게 관심을 갖자 자신이 예전 레지나에게 품었던 욕망을 떠올리고 복잡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한편 레지나는 민우의 학교 동료이자 아녜스의 담임 선생인 김일면과 깊은 관계에 빠져 있던 중으로, 이미 김일면의 아이를 가진 상태이다. 세키와의 포커 판에서 세키를 위협하는 김일면, 아녜스의 임신 사실을 알고 고민하는 민우, 대학을 포기하고 김일면의 아이를 낳고자 하는 레지나, 그리고 김일면에게 많은 돈을 잃고 레지나와 민우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한 세키. 그리고 복잡하게 얽혀만 가는 관계 가운데, 어느 날 민우가 실종된다. 외제차를 렌트하여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민우의 흔적을 찾아 그의 집을 찾은 아녜스는 민우의 집에서 세키와 처음으로 알게 되고, 친구처럼 자신의 곁을 지켜 주는 세키에게서 민우와는 다른 따스함을 느낀다. 그런 아녜스가 천진하게 털어놓는 비밀 이야기를 통해 민우가 감추었던 사실, 모든 관계의 진실을 세키는 알게 되는데……. 오랜 실종 기간 이후 경찰의 연락이 오게 되고 다시 모두의 앞에 나타난 민우는 예전과는 달리 아무런 말을 할 수 없게 된 상태다. 말하지 않았던, 말할 수 없었던 그 모든 비밀은 과연 무엇인가. 어긋난 운명의 자침은 과연 어느 방향을 가리킬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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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식탁』에서 장애인, 미성년자, 결손가정의 소녀는 단순한 호명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다. 박금산은 도덕적 분개라는 손쉬운 위선을 버리고 오히려 윤리적 지탄이 될 만한 사건들을 향해 걸어간다. 하지만 윤리에 대한 질문은 비윤리를 통해 가장 극명해지지 않을까? 결국 독자들은 이 나쁜 소설의 이웃이 될 것이다. -강유정(문학평론가)
이 시대 장애인의 성과 사랑을 정면에서 조명한 문제작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불모를 품은 채 사랑을 꿈꾸는 네 명의 남녀 그러나 끝내 사랑을 알 수 없었던 젊은 얼굴들의 슬픈 초상화 서울과학기술대학 문창과 교수로 재직 중인 작가 박금산이 9년의 집필 기간을 거쳐 완성한 첫 번째 장편소설 『아일랜드 식탁』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속의 계산과 방황과 욕망을 진지하게 얘기하면서도 그 무게에 깔리지 않기 위해 유머를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작가”(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라는 평을 얻으며 2001년 등단한 이래 욕망과 인간성을 날카롭게 통찰해 온 그는 이 작품에서 숨 막힐 듯이 강렬한 이야기와 일상의 틀을 전복하는 불온함을 통해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공간 안에서 비일상을 펼쳐 보인다. 앞을 볼 수 없는 여자 레지나와 말할 수 없는 남자 세키,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을 바라보지 않는 여자 아녜스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 남자 민우가 엇갈린 운명 가운데 서로를 향한 각자의 욕망을 이야기하는 이 파격적인 작품은 결손가정, 장애인, 미성년자 간음 등 그간 금기시되어 온 소재를 있는 그대로 다루며 우리 안에 내재한 신체적·정신적 장애와 욕망의 함수 관계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그동안 우리 문학에서 ‘본격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다루는 것을 암묵적으로 막아 왔던 이와 같은 ‘비윤리적 욕망’을 일말의 가장도 은폐도 없이 날것으로 다룬 이 소설에 대해 문학평론가 강유정은 “오히려 뜨거운 감정적 분개의 노선을 버리고 윤리적 지탄이 될 만한 사건들을 향해 걸어”가는 작품이라는 평을 남겼다. 『아일랜드 식탁』은 모두와 같은 욕망의 주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보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장애인과 미성년자의 이중적인 입장에 대해서, 아름다운 시각 장애인 레지나와 어른스러운 여고생 아녜스를 둘러싼 서로 다른 이야기를 통해 우리 안에 내재된 가장 분명하고 내밀한 욕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하는 대신 서로를 욕망할 뿐인 고아들의 이야기 애정에는 과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없이 아이 같은 자신의 제자를 욕망하는 고교 교사, 소통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앞을 볼 수 없는 여성을 사랑하게 된 언어 장애인 청년. 한편 고교 교사는 언어 장애인 청년과 15세 이후 동거해 오며 애증을 품고 있고, 앞을 볼 수 없는 여성은 평범한 여고생인 자신의 여동생을 질시한다. 한편 고교 교사는 앞을 볼 수 없는 여성과 오랜 지인이고 그 사실을 동거인인 청년에게 감추며, 고교 교사에게 임신 사실을 알린 여고생은 언어 장애인 청년과 우정과도 닮은 기묘한 관계를 시작한다. 두 번 겹친 삼각관계, 윤리의 경계마저 희미해진 그 안에서 방황하는 고독한 젊은 군상들은 완전한 사랑과 소통을 꿈꾸지만 결국 상대의 행복 대신 자신의 욕망을 우선한 채, 서로를 파괴할 뿐이다. ‘화낸 거 미안해. 하지만 언니 중심으로 생각해 줘. 언닌 마음이 아픈 사람이야.’ 민우는 전화기를 들고 망설이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나도 네 언니를 안다. 우린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야. 나도 두 장애인이 연결되는 거 원치 않아.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우린 아무도 모르게 병원엘 가야 하는 거 아닐까? 네가 그러는 동안 배 속에서 그게 자꾸 자라고 있지 않니. - 57쪽에서 그러나 이 비틀린 운명의 사중주 가운데 우리는 작품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중 아무도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진정한 행복을 상대에게 전하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모두가 외로워하면서도 누구도 먼저 마음을 열지 않는 이 관계는, 비일상적인 풍경으로 다가왔다가 어느새 우리 모두가 품고 있는 가장 일상적인 고독을 비춰 준다. 결국 이 작품은 먼 곳에 있는 것 같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의 내면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두려울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난 ‘우리 안의 장애’ 박금산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모두가 짊어진 욕망과 무엇인가 결여된 자들의 감성이다. 그런 그가 오랜 구상을 통해 완성한 『아일랜드 식탁』은 욕망과 결여라는 두 가지 테마를 영리하게 결합하여 ‘장애’라는 단어를 설명하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는 많은 것이 결여되어 있다. 시각, 언어, 부모, 고향, 직업, 미래, 희망……. 또한 모든 결여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탈된 것으로, 그 상실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어릴 때 시력을 잃게 된 레지나는 또한 장애를 갖게 된 딸을 아낌없이 지원하고 도와주던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잃게 된다. 레지나의 동생 아녜스는 언니에게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박탈당한 뒤 역시 부모님을 잃는다. 세키는 민우에 의해 언어장애를 갖게 된 이후 고향을 버리게 되고, 민우는 아버지를 잃은 뒤 세키와 함께 작은 평온을 손에 넣지만 곧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게 된다. 이 젊은이들의 고향 상실과 부모 상실, 그리고 정신적 불모는 책을 읽는 우리로 하여금 시각 장애와 언어 장애라는, ‘보이는 장애’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음을 서서히 깨닫게 한다. 고속도로에서 돌을 던져 가지고 25중 추돌사고를 냈다. 인생이 허무해서 그랬다고. 죽은 사람은 없다고. 그러고 나면 내 소개는 끝이었다. 허무와 죽음 이상의 말은 필요 없는 거야. 허무해서 던졌는데 죽은 사람이 없다. 난 내가 뭐에 화가 났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 283쪽에서 박금산의 작품에서 인간은 누구나 크든 작든 자신만의 장애를 안고 타인의 장애를 견디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쓸쓸하면서도 한없이 사랑을 추구해 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그 사랑스러우면서도 가슴 아픈 인간의 진실을 이 책은 전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해설 중에서 고백하자면, 『아일랜드 식탁』을 읽었을 때의 첫 느낌은 격렬한 멀미였다. 여기서 장애인, 미성년자, 결손가정의 소녀는 단순한 호명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다. 우리 문학사는 그들을 보호의 대상, 인권의 사각지대와 같은 단순한 이름으로 호명해 왔다. 호명을 통해 그들은 단순히 정치적인 보호의 대상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욕망의 복잡한 층위가 제거되고 인권이라는 거창하면서도 단일한 이름에 알맞게, 단순하고 정치적인 욕망만을 허용받았다. 그러나 박금산은 도덕적 분개라는 손쉬운 위선을 버리고 오히려 윤리적 지탄이 될 만한 사건들을 향해 걸어간다. 배려라는 미명으로 분류했던 대상들은 이 작품에서 입체적 욕망의 주체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독자가 지니고 있는 상식적 윤리의 층위를 건드리는 이 ‘나쁜 소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에게 던진 한마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는 욕망의 진앙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박금산은 우리가 그다지 확인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누추한 욕망을 일일이 드러내 보여 준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의 윤리가 죄다 위선과 가식일 수도 있다는 그 삐딱한 시선. 하지만 윤리에 대한 질문은 비윤리를 통해 가장 극명해지지 않을까? 결국 독자들은 이 나쁜 소설의 이웃이 될 것이다. - 강유정(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