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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해제 영남악부서嶺南樂府序 금합을 열어보다啓金盒 기출변旗出邊 진풍탑鎭風 회소가會蘇歌 시림계始林鷄 경성내京城內 치흔왕齒痕王 영오랑迎烏郞 물계자勿稽子 초선대招仙臺 장부인夫人 박제상朴堤上 묵호자墨胡子 용저악杵樂 달도가歌 풍월주風月主 구형왕仇衡王 팔관회八關會 가야금伽倻琴 비형랑鼻荊郞 성제대聖帝帶 왕이여, 가지 마소서王毋去 김화랑金花郞 천관녀天官女 송화방松花房 원효대사元曉師 김원술金元述 만파식적萬波息笛 장미 여인薔薇女 옥보고玉寶高 죽죽사竹竹詞 용치탕龍齒湯 처용무處容舞 포석정鮑石亭 동경구東京狗 황창랑黃昌郞 효불효孝不孝 유두연流頭宴 시를 새긴 돌題詩石 상서장上書莊 절영마絶影馬 구인랑蚓郞 삼분수三分水 능화봉陵華峯 정과정鄭瓜亭 두 가마솥 안의 시신兩釜屍 대혼자大子 금시랑琴侍郞 안회헌安晦軒 황마포黃麻布 이문학李文學 이익재李益齋 무신탑無信 참된 정언眞正言 문공의 목면文公棉 소주도燒酒徒 철문어鐵文魚 까치 쫓는 명령鵲令 무고악舞樂 옥섬섬玉纖纖 정당매政堂梅 정시중鄭侍中 김농암金籠巖 길재야吉再爺 산유화山有花 영동신靈童神 월명총月明塚 만어석萬魚石 영남악부嶺南樂府 원문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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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것을 지음은 대개 바른 체재體裁와 엄격한 성률聲律을 택한 것이 아니다. 다만 본래 사적을 서술하고 참된 마음을 전달하여 향산香山 백거이白居易와 석호石湖 범성대范成大가 했던 바와 비슷하게 되면 되는 것이다. 또다시 생황과 종소리의 절주에 어울리고 고운 베와 수놓은 비단의 문채와 나란히 하여 높은 벼슬의 여러 군자들의 반열에 아첨하기를 바랄 일이 있겠는가? --- p.30 「영남악부서嶺南樂府序」중에서
백결선생百結先生은 그 이름을 잃었다. 신라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으로, 집이 매우 가난하여 백여 곳 기운 옷을 입었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금琴을 잘 다루었는데 무릇 희로애락의 일에 있어 반드시 금琴으로 마음을 풀어내었다. 한 해가 저물려 할 때 이웃 마을에서 곡식을 찧었는데 그 처가 절구 소리를 듣고 “남들은 모두 곡식을 찧는데 우리집만 홀로 그러질 못하니 어떻게 한 해를 넘기리요?”라고 하였다. 선생은 탄식하며 “죽고 사는 데에는 천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린 것인데 당신은 어찌 걱정을 하는지요?”라고 하였다. 이어 금을 튕겨 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그를 위로하였다. 그뒤 세상에 전해져 대악?樂이라 하였다. --- p.61 「용저악」중에서 김후직金后稷은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사람이다. 왕이 사냥을 좋아하여 후직이 간절히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가 죽을 때에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신하가 되어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였구나. 내가 죽거든 왕이 사냥 다니는 길가에 묻어라.”하였다. 그의 아들이 그대로 따랐다. 훗날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도중에 “왕이여, 가지 마소서.”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왕이 이것을 듣고서 물으니, 시종侍從이 “김후직의 무덤입니다.”하고, 드디어 임종 때의 말로써 간하였다. 왕이 눈물을 글썽이고 종신토록 다시는 사냥을 다니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것을 ‘묘간墓諫’이라 하였다. --- p.81 「왕이여, 가지 마소서王毋去」중에서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 아들 일곱을 둔 과부가 있었는데, 사통私通하는 남자가 물의 남쪽에 있어 아들들이 잠든 것을 살피고 나서 그 곳을 왕래하였다. 아들들이 서로 말하기를 “어머니가 밤길에 물을 건너다니시니 아들로서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고 돌다리를 만들었다. 어머니는 부끄러워하여 행실을 고쳤다. 당시 사람들이 이 다리를 이름하여 ‘효불효孝不孝’라고 하였는데, 다리는 경주부 동쪽 6리에 있다. --- p.119 「효불효孝不孝」중에서 고려 신우辛禑 2년(1376)에 왜구가 합포合浦[지금의 창원부昌原府]에 쳐들어왔다. 이보다 앞서 원수 김진金鎭이 도내의 기생과 악공들을 크게 모아놓고 휘하들과 함께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놀았다. 군중軍中에서 그 무리들을 ‘소주도燒酒徒’라고 불렀으니, 김진이 그들과 함께 소주를 즐겨 마셨기 때문이다. 또 형장刑杖이 지나치게 혹독하여 모든 군사들이 원망하고 분통해 하였다. 왜구가 이르자, 군사들은 뒤로 물러서서 싸우지 않고 말하길 “원수는 소주도로 하여금 적을 칠 터이니, 우리들이 무엇을 하리요.”라고 하였다. 드디어 패함에 이르렀다. --- p.169 「소주도燒酒徒」중에서 고려 말에 배원룡裵元龍이란 자가 있었는데,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백성을 수탈하는데 백성들의 쇠스랑[鐵杷]까지 걷어서 집에 싣고 가는 정도였기에, 부민府民들이 ‘철문어鐵文魚 부윤府尹’이라고 불렀다. 팔초어八梢魚는 속칭 문어文魚인데, 쇠스랑의 형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p.171 「철문어鐵文魚」중에서 주인원朱印遠이 경상도 안렴권농사按廉勸農使가 되었는데, 까치 소리 듣기를 싫어하여 늘 사람들에게 활과 화살로 쫓아내도록 시켰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은병銀甁을 징수하니, 사람들이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다. --- p.173 「까치 쫓는 명령鵲令」중에서 영동신靈童神은 풍신風神이라고도 한다. 영남의 풍속은 매년 중춘仲春에 각 집에서 명수明水를 떠놓고 술과 고기를 갖추어 풍신에게 제사지내는데, 제사는 반드시 어두울 때에 해야 한다. 이 달에는 문상과 송장送葬, 그리고 온갖 상서롭지 못한 것을 꺼리는데, 특히 개를 잡는 것을 꺼린다. 이에 대해 선비들에게 물으니, 이 풍속이 누구에게 시작되었고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모두 모른다고 한다. --- p.194 「영동신靈童神」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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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벽한 유배지에서 부른 ‘역사의 노래’
이 책은 순조 연간을 대표하는 시인인 낙하생洛下生 이학규李學逵(1770-1835)가 신유박해를 당해 경상도 김해 지방에서 24년 간 유배자의 몸으로 적거謫居하면서, 그 지역의 역사적 인물과 유적들을 ‘악부樂府’ 체의 시로써 표현한 시문집 [영남악부嶺南樂府]를 오늘날의 언어로 옮긴 것이다. 이 시집에는 주로 신라와 고려 때의 인물과 사적에 관한 이야기들이 시와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그 수효는 신라 유리왕 때의 [계금합啓金盒(금합을 열어보다)]으로부터 고려말?조선초의 [만어석萬魚石]에 이르기까지 모두 68수에 이른다. 요컨대 궁벽한 유배지에서 ‘유가적 비판의식’을 지닌 시인이 국토의 옛 역사와 인물들을 자신의 언어로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이다. 조선조 비판적 지식인의 현실 체감과 적극적인 문학 의식의 한 표명 이학규는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일원으로 일찍이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다, 특히 "역사는 독서하는 선비가 몰라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역사를 독서하는 선비의 필수지학必須之學으로 인식한 이다. 그가 궁벽한 적거지에서 역사적 인물과 사건, 그리고 민간의 풍속과 전설 이야기 등을 자신의 문집 속에 녹여 담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역사적 자각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이학규가 유배생활을 하던 19세기 초는 조선왕조의 붕괴를 재촉하는 말기적 현상들이 도처에서 포착되고 있었다. 또한 세도정치로 국정은 극히 어지러웠고, 지방에서는 수령과 아전, 토호들의 착취가 날로 심해져 삼정三政이 문란하였으며, 그에 따라 민民의 생활도 도탄에 빠졌다. 이학규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서 24년 동안 유배 생활을 겪는다. 물론 그 역시 같은 배경 하에서 비참한 양반의 처지로 전락하였으며, 그의 집안 또한 정치적?경제적 고통을 겪게 된다. 이는 봉건 지배계급 내부의 심각한 모순과 갈등이 고질화함에 따라 소수의 문벌 귀족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현상이었다. 이 와중에 억울하게 유배 생활을 했던 이학규는 유배지에서의 체험에 기초하여 당대 사회 현실의 구조적 병폐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가짐으로써 부패한 관리들의 실정을 낱낱이 포착하고 기록해 나간다. 또한 그가 [영남악부]를 짓게 된 데는 절친했던 선배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쓴 [탐진악부耽津樂府]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이학규는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이학규는 경상도 김해로 이배되는데, 이러한 유배의 와중에서도 둘은 서로가 서로의 시에 화답하며, 자신의 글과 생각을 주고받는다. 일례로 [강창농가江滄農歌]는 다산의 [탐진농가耽津農家]에 화답하여 쓴 작품이며, 이 [영남악부]도 다산의[탐진악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후에도 다산의 [전간기사田間紀事]에 화답하여 [기경기사己庚紀事]를 짓기도 한다. 두 사람의 긴밀한 관계는 해배 후에도 지속되어, 이학규는 충주로 이주한 뒤에도 남한강의 뱃길을 이용하여 정약용을 자주 방문하였다. 정약용과의 이러한 교유交遊를 통해 이학규는 실학파의 ‘현실주의적 문학의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 결과 그의 작품 속에서 김해 지역의 민간 풍속과 농촌 주민들의 생활상이 ‘가감 없이’ 형상화되고, 나아가 유배지에서 체험한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그로 인해 고통 받는 민民의 현실이 적실하게 묘파되기도 하였다. ‘사실’을 보는 눈, 객관적이며 적극적인 취재 이학규는[영남악부]를 지을 때, 자잘한 이야기들을 찾아 풀고 주위에서 본 바에 증험하되, 고증을 통한 사실적 기록이 아니면 취재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였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하더라도 연대가 틀리거나 사실과 어긋나는 것들은 취재의 대상에서 배제한 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라도 부정부패한 세상을 비판하고 도를 담론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기록하였음을 아울러 밝혔다. 이를 통해 유배지라는 제한된 공간과 부족한 서적이나마, 그 속에서 고증을 통해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기록을 지향하였다. 그는 실제로[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고려사高麗史][금관군지金官郡志][문경현지聞慶縣志][개령현지開寧縣志][경주부지慶州府志][보한집補閑集][동국사략東國史略][탁영집濯纓集]등의 문헌을 두루 참고하였으며, 인용된 문헌은 역사서와 영남지방의 읍지가 대부분이다. 그는 또한 [삼국사기][삼국유사][동국여지승람]등을 참고하여 고증함으로써 [영남악부]가 황탄荒誕한 이야기가 아님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학규의 악부 창작 태도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이 책에는 영남 지역의 민풍과 토속 및 전설과 민담?고사 등을 예시하는 흥미로운 시들이 릸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를 적극 취재하여 기록함으로써, 생동하는 기층 민民의 생활상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특히 그 저변에는 민民을 향한 애상哀傷의 정조가 담겨 있어, 그의 문학적 자세와 역량을 가늠해볼 수 있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