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서문
1부 / 나의 어머니 · 스물 셋 아버지의 유언 · 기독교 4대 · 외할머니집 · 한글을 깨우친 어머니 · 남편의 사랑 · 가정교육 · 할머니의 새벽기도 · 기독교 선생의 모델 · 이웃사랑 · 전도사가 된 어머니 · 낮고 소박한 삶 · 부지런한 어머니 · 지성보다 강한 영성 · 고요한 임종 2부 / 삶의 의미를 찾아서 · 허무 · 사춘기 · 애국심 · 새벽송 · 여학교 입학 · 나라 사랑, 독립 운동 · 유치원 보모가 되다 · 삶의 의미를 찾다 · 풍요로운 삶 · 광야의 시련 · 핍박의 나날들 · 죄를 지어도 모르는 마음 · 중생의 체험 3부 / 38선을 넘어서 · 은혜의 시간들 · 기독교 박해 · 순교 · 여름성경학교 · 강량욱 목사 · 1948년 여름, 남하(南下) · 자백 · 장맛비 · 기아(飢餓) · 38선을 넘다 · 식구들을 만나다 · 장로회신학교 편입 · 영해교회 이야기 · 환란의 날 새 생명을 얻다 · 한 장의 위로 편지, 비상할 용기를 주다 · 해방촌 신학교 여자기숙사 · 평생의 친구 · 남산의 장로회신학교 · 손양원 목사님의 수양회 인도 · 담을 넘어 다니는 기도꾼들 · 기도가 마렵다 · 행상하는 신학교 고학생들 · 단벌옷의 찬양대 · 한경직 목사님 곁에서 ·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목회의 길로 접어들다 · 6·25 동란과 또 한 번의 피란 · 백남조 집사님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 · 캐럴송에 북한 포로가 뛰쳐나오다 · 사모와 여전도사 사이 · 영문과 진학과 가정교사 그리고 친구 · 친구 이연옥과 자취생활 4부 / 유학, 새로운 기회 · 신망원에서의 첫 은혜 · 복숭아밭에서의 부흥회 · 안길이에게 주신 은혜 · 200명 거지들과의 크리스마스 · 대구 성경학교 사감으로 · 태평양 바다를 건너서 · 뉴욕 성서신학교에서 · 용서와 화해 · 쉬지 말고 기도하는 길 · 창고에서 시작된 기도 운동 · 미국학생의 산기도 · 내가 만난 와이코프(Wycoff) 장로님 · 뉴욕성서신학대학 (지금의 뉴욕신학대학) · 과테말라 선교여행 · 멕시코 선교여행 · 서울 여대를 시작하며 · 숭실대학 기독교 교육학과 과장 · 1959년 장로교 총회 분열과 그 합동운동 · 여전도회 전국 연합회의 재기 · 제2차 유학의 길 5부 / 기독교교육의 실천 · 기독교교육과 실천 · “성서와 생활” 커리큘럼 · 여교역자 양성 · 『장로교 여성사』 출간 · 여신학자 협의회 · 여성 지도자 교육원 (평신도들을 위한) · 여자신학 교육원 · 기독교 교육 연구원 발족 · 장로회신학대학 선교관 건축기금 모금 · 늦은 나이에 도전한 운전면허 · 새마을운동 강사 · 나의 새로운 가정 · 망원동 빈민 선교 1 · 망원동 빈민 선교 2 · 망원동 내 집 갖기 운동 6부 / 감격적인 사역 일지 · 농촌 교회 강습회 · 지리산 전도 여행 · 지리산 머루 농장 수도원 · 목회지원회 · 기독교 중고등학교 학습지도 개발 연구 · 주간(週間) 성경학교 · 여성 안수 문제 · 1961년, 농촌 여교역자 강습회 · 최초 초교파 여교역자들의 집회 (YWCA에서) · 예장 전국 여교역자 연합회 창립총회 · 여교역자 안식관 · “복음의 삶”(장년을 위한 신구약 성경교재) · 모스크바 장로회신학대학 · 바른 삶 실천 운동 · 우리 집 이야기 · 교회의 망각 지대, 윤락 여성들 · 수도원들 그리고 은성 수도원 ·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 · 연예인교회 7부 / 땅끝의 사람들, 탈북자 · 내 고향 평양 방문 · 황장엽 선생님 · 노화된 육체에 맞는 섬김의 길은 없는가 · 통일의 날을 위해 미리 보내준 탈북 청년들 · 남북평화신학연구소 · 탈북자 구원 운동 · 나라를 위한 어머니 기도모임 에필로그 부록 |
|
회고록은 외식을 행하기 쉬운 작업입니다. 정직하게 쓴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자기의 허물과 죄 또는 내적 욕심 따위를 감추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내가 죽고 난 후에 제삼자가 쓰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자료만 모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 하용조 목사님이 나의 회고록을 출판하고 싶다면서 작가를 집에 보내셨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회고록 집필을 작가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젊은 사람이 나의 생을 어떻게 느끼고 묘사할 수 있을까?’ 그런 불안함 때문에 결국 스스로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80대 후반인 탓에 잊어버린 것도 많지만(특히 연대) 미천한 나의 생을 감싸시고 묘하게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뒤돌아보는 마음으로 편하게 써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혹시 자랑이 될까 두렵기도 해서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나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 솔직하게 표현하느라 노력했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니, 그때 하나님이 공정하게 평가해 주실 것입니다. 책의 제목을 하용조 목사님께 부탁하려고 했는데, 꼭 17일 전에 아버지 품으로 가셨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바람 때문에 이 책이 빛을 보게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나의 일생을 뒤돌아보면서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랍고 오묘하신 섭리, 그리고 굽이굽이 신비한 손길로 아름답고 묘하게 이끌어 주신 넓고 크신 은혜를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언자처럼 유언을 남기신 아버지, 마리아 같은 인내로 나를 기르신 어머니, 그리고 산기도의 신앙을 보여 주신 할머니를 나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또한 내 주변에 있는 그 많은 주의 종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친구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내면을 풍족하게 해 주신 모든 분들에 의해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그분들께도 드립니다. 미천한 여종의 생의 흔적이 우리나라 여성들의 삶에 자그마한 힘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서문 중에서 어느 농가 사랑채 작은 방에 아버지는 창백한 얼굴로 혼자 누워 있었다. 깡마른 얼굴에 지그시 눈을 뜬 아버지는 아내와 딸을 다시 볼 수 있어서인지 안도의 숨을 내쉬는 듯 보였다. 힘없는 웃음을 띠며 한마디를 던지고는 다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잘 왔소.” 아버지는 한참 말이 없었다. 아내의 울음이 서서히 멎을 때쯤 띄엄띄엄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부모님의 안부를 물었다. 또다시 침묵이 흐른 뒤 아버지는 급기야 마지막 유언을 남기려는 듯 약간 긴장된 자세를 취하면서 띄엄띄엄 말을 했다. “이 세상은 잠깐이오. 내가 죽더라도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선애를 잘 키워 주오. 부탁하는데 선애는 딸이지만 꼭 기독교 선생이 되도록 길러주오.” 아버지는 겨우겨우 말을 맺으셨다. 마지막 긴 숨을 쉬고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마지막 이별을 앞에 두고 어머니는 가슴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어머니는 그 유언을 가슴에 품은 채 70여 년간 홀로 사셨다.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혼자 살아갈 만한 능력이나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딸을 ‘기독교 선생’으로 만들 수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의논해 볼 곳도 없었고 가르쳐 줄 만한 사람도 어머니 주변에는 없었다. 창백한 얼굴과 가느다란 목소리로 남긴 한마디 유언을, 어머니는 일생을 통해 이루어 나가셨다. 어머니는 남편을 향한 못 다한 사랑과 남편의 유언에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울어버린 것이 일평생 한(o)이 되어 ‘내 기어코 당신의 뜻을 몸으로 이루리라’고 수없이 되뇌며 살아오셨다. 97세까지의 어머니의 삶은 넉넉한 “예.”라는 대답이 되었다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