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책머리에 1장 엄혹했던 1970년대를 회상하며 2장 독일 통일, 그리고 스위스에서 배운 것 3장 1980년대 WCC 아시아 국장의 발자취 4장 북한 방문과 지원 5장 우리가 몰랐던 북한의 속살 6장 필립 포터와 한국 민주화에 대한 지원 7장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 8장 인권을 위하여 9장 평화와 통일을 다시 생각하며 에필로그 박경서 연보 |
박경서의 다른 상품
정근식의 다른 상품
|
그렇게 해서 나는 1980년 가을 학기를 마지막으로 관악캠퍼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종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셈입니다. 당시의 블랙리스트는 요즘 블랙리스트와 달라서 거기에 올라가면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직장을 얻을 수 없었어요. 나는 이 불운을 계기로 UN에 가서 활동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당시 UN 회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인은 아무리 뛰어나도 D 레벨 책임자급 이상으로는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P5, 즉 과장급에서 끝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UN으로 가는 것은 힘들겠다고 생각하여 포기를 했는데, 마침 제네바의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라는 개신교 국제기구에서 아시아 국장을 모집한다는 것을 강원룡?박형규?김관석 목사님들이 알고 저에게 응모하라고 권유했어요. --- p.23 지금의 한반도를 봅시다. 내 민족의 분단은 72년째이지요. 독일은 45년 만에 통일을 이루었지만, 우리는 72년째 분단이 지속되고 있는데, 정신적으로 쿠르트 샤프 같은 종교 지도자, 빌리 브란트 같은 정치 지도자, 깊은 철학 속에서 민족을 생각하는 위대한 정치가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내 민족의 슬픈 얼굴이지요. 이 일그러진 얼굴이 우리의 자화상이지요. 나는 늘 독일의 민족 화해를 위한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 p.79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 뜸하다가 1991년 10월에 내가 북한에 출장을 갔더니, 북쪽 대표가 “이 다음엔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이러는 거예요. 나는 그저 “아하, 좋은 소식이요?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김일성 주석이 나를 초청한다는 의미였어요. 정말 말 그대로 구체적인 연락이 왔고, 지금도 잊히지 않는 1992년 1월 13일에 김일성 주석을 만났지요. --- p.223 1998년 WHO와 유니세프가 주동이 되고 WCC도 같이 참가해 북한 역사상 최초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북한의 어린아이들이 몇 사람쯤 굶어 죽었는가, 그리고 영양 실태는 어떠한가를 조사해서 전 세계에 알린 바 있습니다. 1995년 홍수 때부터 3년 동안 약 3,000명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영양 실태 조사를 했고, 부모 모두 또는 둘 중 어느 한 편이 세상을 떠났는지 여부를 조사하는 설문도 있었는데, 조사 결과 세 명 중 한 명의 어린이가 부모 둘을 잃어버렸거나 한쪽 부모를 잃어버린 걸로 나왔어요. 이 결과를 가지고 유추해볼 때 1995년부터 1998년 사이에 약 50만 명의 북한 주민이 가난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이듬해인 1996년에 방문했을 때, 내가 헬리콥터를 타고 북한의 홍수 지역을 돌아보았어요. 피폐한 북한 농토를 보면서 이 나라에 인도주의 원조를 늘려야 한다고 결심했어요. WCC의 기록을 보면, 아시아국이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북한 한 나라에 1988년부터 1999년까지 12년 동안 약 4,300만 불의 무상 원조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그중에서 약 3,500만 불이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에 무상 원조로 들어간 겁니다. --- p.27 세월이 흘러서 1990년이 되었어요. 김대중 선생의 동교동 자택에는 지하 서재 방이 있는데, 긴밀한 이야기를 할 때 들어가는 곳이에요. 그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때 노벨평화상을 타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당시만 해도 노벨평화상은 나에겐 퍽 생소했지요. (중략) 김대중 선생이 노벨평화상을 타려면 우선 그의 활동을 세계에 알려야 했기 때문에 선생의 책 《옥중 서신》을 1992년에 영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지요. 내가 한국에 출장 가서 서한집 번역본을 열 권쯤 가져와서 스탈셋을 통해 노벨평화상 최종 심사위원 다섯 분들에게 보내고 국제기구 도서관에 주어 비치하게 했죠. 스웨덴 친구 얀 에릭슨에게도 줬어요. 노벨평화상 추천위원회 위원이에요. 얀 에릭슨하고 스탈셋의 손을 꽉 잡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을 추진하면서 참 바쁘게 움직였어요. --- p.346~347 나는 북한과의 화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문제는 여와 야를 초월해서 접근해야 합니다. 집권당은 정책을 실행하기 전에 야당에 가서 미리 상의하여 그 사람들의 의견을 다 듣고, 의견 차이가 너무 크면 설득해서 하나의 의견으로 만든 뒤 북과 공유하는 작업을 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1972년 독일의 기본조약이 우리가 배워야 할 연구 대상입니다. 우리에게 남북기본합의서가 있지만, 사문화되었어요. 독일의 기본조약은 1970년 동서독 수상이 상호 방문을 끝낸 다음에 만들었는데, 히틀러가 침략해서 빼앗은 오데르-나이세의 국경을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에 되돌려주었잖아요. 할슈타인 원칙도 깨버렸고요. 그로 인해 브란트가 불신임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12명의 기독교민주당 의원, 당시 야당 의원들이 빌리 브란트의 불신임안에 반대하고 나온 겁니다. 민족의 문제는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게르만 민족 장래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의 명령을 거스르고 반대한다고 한 거지요. 그 12명의 젊은 국회의원들 중에 리하르트 폰바이츠제커, 헬무트 콜이 있었어요. --- p.428~429 |
|
세계 5대 국제기구 중 하나인 WCC의
아시아 국장으로서 체험한 18년간의 발자취! 박경서 선생은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시절 4·19 혁명에 앞장섰고, 강원룡 목사와 함께 크리스찬아카데미 초창기 멤버로 민주·노동 운동을 했다. 한국을 방문한 독일 국회의원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박사를 통역한 인연으로 그의 후원을 받아 독일 유학을 다녀왔으며, 이후 서울대 강사 및 크리스찬아카데미 부회장으로 미래의 민주주의 지도자 육성 교육에 매진했다. 하지만 반공법이라는 올가미를 씌운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으로 인해 서울대 강사 자리마저 잃고 한국을 떠나야만 했는데 1장 [엄혹했던 1970년대를 회상하며]에 그 이야기가 실려 있다. 2장 [독일 통일, 그리고 스위스에서 배운 것]에서는 독일 유학 시절 경험한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대한 회고, 그것을 교훈 삼아 우리나라가 통일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선진국인 독일과 스위스, 유럽에서 우리가 배웠으면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3장 [1980년대 WCC 아시아 국장의 발자취]에는 18년 동안 아시아 최극빈국을 종횡무진 누비며 도움을 주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인식의 틀을 넓혀간 경험이 담겨 있다. 1982년 박경서 선생이 처음 아시아 국장에 부임했을 때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사는 아시아국의 예산은 800불이었다. 반면 아프리카국의 예산은 4500만 불이었다. “아시아가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당신이 부자 나라에 가서 스스로 모금을 하라.”는 말이 자극이 되어 1999년 WCC를 떠날 때에는 원조 자금을 4700만 불까지 끌어올릴 만큼 열심히 뛰었다고 한다. 그렇게 원조를 주기 위해 달려갔던 베트남,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중국, 인도네시아의 이야기가 3장에 실려 있다. 1988년 남한 여권을 들고 북한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 원조 담당자로서 경험한 다양한 북한 이야기! 박경서 선생이 WCC에서 근무하던 시절인 198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냉전이 고착화된 시절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물론 유럽도 동서로 나뉘어 첨예한 이념 대립을 보였으며, 남북한의 벽도 높았다. 그런데 어느 날 사무실로 북한의 사무관들이 찾아와 김일성의 초청장을 내밀었다. 북한을 방문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국제기구의 원조 담당자가 남한 사람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초청한 것. 그렇게 해서 1988년 박경서 선생은 남한 여권을 들고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최초의 남한 사람이 된다. 첫 방문 이후 함흥과 원산의 대학을 둘러보고 원조를 결정한 계기,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나 나눈 이야기, 그즈음 당국의 허가 없이 방북해서 고초를 겪은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의 인연, 북한 최초의 교회인 봉수교회가 들어서게 된 과정, ‘고난의 행군’ 시절 평양에서 신의주까지 창문 없는 기차를 타고 갔다가 눈이 부어 사흘 동안 뜨지 못한 에피소드, 노태우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추진하다 무산된 정상회담, 이후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다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난 김일성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 등등 지금까지 29회 북한을 방문하고 체험한 박경서 선생만이 들려줄 수 있는 다양하고 놀라운 북한 이야기가 4장 [북한 방문과 지원]과 5장 [우리가 몰랐던 북한의 속살]에 실려 있다. 한국의 민주화 지원,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 공존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 그 외에 1985년 광주 YWCA 사옥을 새로 짓기 위해 조아라 여사와 함께 모금을 조성한 이야기, 6월 항쟁과 위안부 피해 여성을 지원한 이야기, 독일에서 만났던 윤이상 선생의 안타까운 사연, 송두율 박사의 한국 방문에 얽힌 이야기가 6장 [필립 포터와 한국 민주화에 대한 지원]에서 펼쳐진다. 7장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에는 1967년 국회의원 김대중을 처음 만났을 때의 짧은 에피소드부터 1980년대 미국에서 지내던 김 전 대통령이 보낸 편지, 이후 초대 인권대사 임명 및 면밀한 협조와 노력 끝에 노벨평화상을 받기까지의 과정 등이 세세하게 담겨 있다. 8장 [인권을 위하여]와 9장 [평화와 통일을 다시 생각하며]에서는 2000년 귀국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여정까지를 꼼꼼하게 짚어나가면서, 한반도의 인권·평화·통일을 위해 앞으로의 세대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나아갈 방향과 방법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대담을 모두 마쳤을 때 대한민국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조기에 치러진 대선에서 새 정부가 들어섰고, 3개월 뒤인 8월에 박경서 선생이 대한적십자사 회장에 임명된 것. 그동안 대한적십자가 회장직은 대부분 총리를 지낸 사람이 맡아왔으나,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은 총리 출신이 아닌 박경서 선생을 임명했다. 마지막 장 [에필로그]에서는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서의 포부,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평화의 메신저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