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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집트의 여인
2. 죽은 자는 물지 않는다 3. 클레오파트라, 마법으로 노인을 사로잡다 4. 황금시대는 가고 5. 남자는 정치적인 동물로 태어난다 6. 항구에 도착하려면 가끔은 돛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7.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 8. 불륜과 사생아들 9. 역사상 가장 사악한 여인 감사의 말 주석 |
Stacy Sch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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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각인되었으나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상 가장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인물 가운데 하나였지만 실제 모습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직접 승인했으리라 짐작되는 당대에 주조된 동전의 초상화만이 실물을 가늠케 한다. 우리는 잘못된 이유로도 그녀를 기억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유능하고 영리한 통치자였다. 함선을 건조하고 반란을 진압하고 통화를 조절하고 기근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았다. 어느 이름난 로마 장군은 클레오파트라가 군사 문제에 해박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성 통치자가 드물지 않은 시대였지만 홀로 제국을 통치하고 서방 문제에 관여한 고대 세계의 유일한 여인이었다. 지중해 지역에서 그 누구보다 부유했고, 당대의 그 어떤 여인보다 높은 신망을 얻었다. --- p.14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를 쓴 로마인들도 고대 로마 역사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시야를 더욱 흐리게 한다.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 속에 계속 스며들었다. 진기한 것들로 가득한 바티칸에서 넋을 잃은 마크 트웨인처럼, 사람들은 가끔 원본보다 사본을 더 좋아한다. 고전 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옛이야기들을 이리저리 끌어다 이어 붙였다. 다른 범법자들의 악행을 클레오파트라에게 덮어씌우기도 했다. 그들에게 역사는 다시 쓰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고, 더 근사해진다면 몰라도 더 정확해질 필요는 없었다. --- pp.18-19 그것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귀환이었다. 그동안 많은 여왕들이 잊혔다가 부활했지만, 흔히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담거나 금붙이로 된 소량의 재산을 운반할 때나 쓰는 질긴 자루 속에서 세상의 무대로 걸어 나온 여인은 클레오파트라가 유일했다. 그녀에게 계략과 위장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위험에 처한 다른 여인을 관 속에 피신시켰다. 제막식이 카이사르가 보는 자리에서 행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클레오파트라가 ‘위풍당당’(한 자료에서 밝혀진 것처럼)하거나 보석과 금을 주렁주렁 매달거나(또 다른 자료에 실린 주장대로), 어쨌든 조금이라도 말끔한 차림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은 낮다. 남자들의 상상력, 500년 미술사, 그리고 영국 문학 최고의 희곡 두 편에 저항하면서 몸에 꼭 끼는 아마로 만든 민소매 튜닉을 걸친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유일한 장신구라면 왕관이나 폭이 넓은 하얀 리본이었다. 그것은 이집트 여인 중에 그녀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통치자임을 증명했다. 그녀는 분명 이마에 리본을 매어 뒤로 묶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앞에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클레오파트라가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방법을 꿰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는 수없이 많다. 대체로 대화를 나누면 그녀에게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고 알려져 있다. 그 만남을 위한 클레오파트라의 대담한 계략은 그 자체로 마법이나 마찬가지였다. 젊은 여왕이 카이사르도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자신의 화려한 왕궁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가한 충격은 개인적이고도 정치적이었던 것 같다. 특별하고도 소름이 돋는 순간, 두 개의 문명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지나가면서 갑작스럽고 중요한 접촉을 할 때 느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 말이다. --- pp.36-37 도시의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6킬로미터가 훌쩍 넘었다. 목욕탕, 극장, 체육관, 왕궁, 신전, 성지, 유대교 회당이 들어찬 진기한 땅이었다. 석회암 성벽이 주변을 에워쌌고 탑들이 여기저기 솟아올라 있었으며 카노푸스 대로 양 끝에는 창녀들이 돌아다녔다. 낮 시간 동안 알렉산드리아는 말발굽 소리, 포리지 장사꾼이나 이집트콩 행상, 거리 공연가, 점쟁이, 대부업자들의 외침으로 들썩였다. 향신료 매점에서 이국적인 향기가 피어올라 축축하고 짠 바닷바람을 타고 거리에 퍼졌다. 긴 다리의 점박이 따오기들이 교차로마다 모여들어 빵 부스러기를 찾아다녔다. 주홍빛 태양이 항구 쪽으로 툭 떨어지고 어스름에 덮이고 난 뒤에도 알렉산드리아는 빨강과 노랑의 소용돌이, 음악과 혼돈과 색채가 어우러진 부풀어 오르는 만화경으로 남아 있었다. 종합적으로 그곳은 극도의 관능성과 고도의 지성이 뒤섞여 사람의 기분을 지배하는 도시였다. 삶의 방식이 우월하고 화려함에 눈이 부신 그곳은 고대 세계의 파리라 할 만했다. 그곳은 돈을 쓰러 가거나, 시를 끼적이게 되거나, 로맨스를 찾거나(혹은 잊거나), 건강을 회복하거나, 힘겨운 10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의 광활한 땅을 정복한 뒤에 다시 결집하는 장소였다. --- p.110 클레오파트라는 원하기만 했다면 피임과 낙태에 관한 많은 조언들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중에는 놀라운 효과를 보이는 방법도 여럿 있었다. 산욾 제한에 관한 문헌만큼 클레오파트라가 넘나들었던 과학과 신화, 계몽과 무지의 심각한 충돌을 보여주는 것도 없다. 그 시대에는 이성적인 생각만큼이나 이상한 믿음도 있었다. 유산을 유도하는 300년 된 히포크라테스의 비법으로, 폴짝폴짝 뛰면서 발꿈치로 엉덩이를 일곱 번 치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1세기 때의 방법 몇 개를 완벽히 합리적이라 믿었다. 해 뜨기 전 사슴 가죽과 거미 알을 몸에 붙이면 임신을 막을 수 있다고도 했다. 이보다 더 이상한(아니면 더 신통한) 방법은 고양이 간을 왼발에 붙이는 것이었다. 성행위 중에 재채기를 하면 놀라운 효과가 있다는 설도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시대에는 악어 똥이 피임 효과로 유명했고 노새의 신장과 환관의 오줌을 섞은 것도 그 못지않았다. 대체로 낙태약에 관한 학문은 피임에 관한 것보다 더 광범위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효과가 증명된 당시 사후피임약의 성분은 소금, 쥐의 배설물, 꿀, 수지였다. 클레오파트라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에는 불이 금방 꺼진 등 냄새가 유산을 일으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시대에 대중적으로 쓰인 약초 치료제도 효과가 증명되었다. 사시나무, 노간주나무 열매, 아위도 피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식초, 백반, 올리브 오일 같은 것들은 최근까지도 쓰였다. 꿀과 오일을 적신 양모로 만든 초기 피임기구도 있었다. 이런 비법들은 주기법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월경 전후가 최적의 가임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미미했다. --- pp.134-135 카이사르가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입장하자 전원이 기립했다. 11시 무렵, 그는 새로운 황금의자에 앉았다. 곧바로 헌신적인 친구들이 대다수인 동료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때 누군가가 탄원서를 내밀었고 동시에 사람들이 그의 손에 입을 맞추려고 달려들며 손을 뻗었다. 카이사르가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려고 움직이자 탄원자가 그의 말을 끊으며 어깨에 걸린 토가를 홱 잡아당겼다. 그것은 사전에 약속된 신호였다. 그 순간 주위의 동료들이 단검을 빼들고 원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몸을 비틀어 첫 번째 칼에서 빠져나왔다. 처음에는 가벼운 찰과상에 불과했지만 뒤이은 충격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모든 음모자들이 이 습격에 가담하기로 동의했고 실천에 옮겼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얼굴, 허벅지, 가슴을 난도질하다가 자기들끼리 찌르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근육질의 목을 돌려가며 ‘거친 짐승처럼 무섭게 소리를 지르며 계속 덤비는’ 그들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고는 마침내 이집트 해안에서 폼페이우스가 그랬던 것과 완전히 똑같이 외마디 신음을 내뱉었고 입고 있던 옷 속으로 고개를 떨어뜨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 p.192 안토니우스의 시종들은 출혈이 심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영묘로 데려갔다. 클레오파트라는 2층 창문을 통해 건물 위로 벽돌을 끌어올릴 때 쓰던 밧줄과 노끈을 내려 보냈다. 시종들이 그 밧줄로 흐느적거리는 안토니우스의 몸을 묶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오래 알고 지낸 이라스와 카르미온의 도움을 받아 그를 끌어올렸다. 그런 가슴 아픈 순간을 플루타르코스보다 더 잘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셰익스피어조차 그렇게 하지 못했다. 플루타르코스는 목격자의 증언을 근거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보다 더 애처로운 광경도 없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죽음과 싸우며 끌어올려졌고, 공중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클레오파트라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긴장한 표정으로 두 손으로 밧줄을 움켜잡고 간신히 끌어올렸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큰 소리로 응원하며 그녀와 고통을 나누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끌어올려 안락의자에 눕히자마자 자신이 입은 옷을 찢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록상 그녀가 특유의 침착성을 잃은 두 번의 순간 중 한 번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격한 감정에 어쩔 줄을 몰랐고 ‘그의 고통을 슬퍼하느라 자신의 고통은 잊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거의 10년을 함께 지낸 사이였다.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어 자신의 얼굴에 마구 바르고는 가슴을 치고 쥐어뜯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를 주인이요, 장군이요, 남편이라고 불렀다. --- p.407 클레오파트라가 언론의 혹평과 과열된 글, 영화와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지난 2000년 동안 그녀가 매우 유능한 여왕이었으며 영리하고 상황 판단 능력이 뛰어난 최고의 전략가라는 사실은 가려지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의 인생은 대담한 저항 행위로 시작하여 역시 같은 행위로 끝났다. 그녀를 한 시대를 쥐락펴락한 인물로 소개한 라틴어로 된 한 단편시의 무명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그 어떤 여인이, 그 어떤 고대의 남자 후계자가 그만큼 위대했는가?’ 그녀는 온몸으로 힘껏 세계의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며 영향력의 범위를 넓혔다. 황혼은 곧 새벽이라고 ?성들을 설득했고 온갖 힘을 동원해서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천재성을 증명하기 위해 즉석에서 혁신적으로 행동했다. 옥타비아누스나 셰익스피어가 손대기 훨씬 전부터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화려하고 웅장했다. 그녀는 큰 즐거움을 주는 존재였다. 플루타르코스가 자기 방식대로 수많은 글을 쓰기 전에 그녀는 자신의 민족에게 그와 같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시종일관 무대를 연출하는 능력으로 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영악하고 기백이 넘치고 상상할 수 없는 부를 누린, 그녀는 제멋대로지만 야심에 찬 정부였다. --- p.4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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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여인이 아니라 여왕이었다!”
1963년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눈썹 위로 가지런히 늘어뜨린 앞머리에 진한 화장을 한 채 치명적인 팜므파탈을 연기했다. 덕분에 그로부터 50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클레오파트라 하면 영화 속의 그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전해지는 클레오파트라의 진짜 얼굴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당대에 주조된 동전에 새겨진 모습으로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로마의 영웅이었던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는 많은 명언과 함께 역사에 뚜렷한 얼굴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역시 가히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존재감을 가진 인물이다. 그녀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부터 게임, 담배, 심지어 태양계의 소행성의 이름에까지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2000년이 넘는 긴 세월이 지났으니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로마의 영웅들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과 유물들이 전해지는 것에 비해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지나치게 적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조차도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때문에 클레오파트라의 삶은 아직까지도 베일에 가려진 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부인인 베라 나보코프의 삶을 그린 《베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면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전기작가로 떠오른 스테이시 시프가 이번에는 클레오파트라의 삶을 복원하는 쉽지 않은 작업에 도전했다. 시프는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방대한 자료 조사와 치밀한 고증을 통해 클레오파트라의 진정한 모습을 밝혀내는 데 집중했다. 2000년의 세월과 왜곡의 시선 속에 묻힌 클레오파트라를 발굴해내면서, 스테이시 시프가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바로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더 자극적으로, 더 재미있게, 그리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술된 기록들 속에서 사실이라 볼 수 있는 것들을 선별하고, 가능성에 추측을 더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지루하고 힘든 작업의 결과 탄생한 《더 퀸 클레오파트라》는 처음으로 등장한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객관적이고 제대로 된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 속에서 클레오파트라는 비로소 왜곡의 허물을 벗고 험한 시대를 살아갔던 한 명의 여인이자 한 나라의 군주로서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 여인에서 여왕, 그리고 영웅이 된 마지막 파라오 픽션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놀라운 일들은 늘 현실에 존재하는 법이다. 스테이시 시프가 그려낸 클레오파트라는 우리가 알고 있던 신화 속의 과장된 인물이 아니다. 고뇌하고 사랑하며, 때로는 실수를 범하거나 좌절하기도 하는 과거 분명히 존재했던 진짜 인물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에 무미건조한 역사적 기술만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사실만을 토대로 재현했다고는 하지만 클레오파트라가 드라마틱하고 경이로운 삶을 살았음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설득력과 사실성, 그리고 ‘총을 들이대도 재미없는 문장은 못 쓸 작가’라는 평까지 받는 스테이시 시프의 문장력이 더해진 클레오파트라의 삶은 우리에게 더욱 풍부한 드라마를 보여준다. 또한 모두가 궁금해했던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애정행각 역시 ‘객관적인 자료의 한도 내에서’ 충실히 재현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클레오파트라의 어린 시절이나 일상생활도 그려냈다. 그 외에도 방대한 자료에서 발굴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대 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 또한 빠짐없이 담겨 있다. 그것이 만만치 않은 분량과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미국 현지에서 32주 동안이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게 만든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도 쓰는 이의 구미에 맞춰 왜곡된 이야기가 아니라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진짜 역사에 빠져든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클레오파트라를 제대로 재현해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스테이시 시프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신화와 역사를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을 제기하며 역사를 읽는 올바른 방법을 제시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살아 있을 때조차 왜곡된 이미지로 알려져야 했던 이유, 그리고 죽고 난 다음 역사적인 악녀로 남아야 했던 이유. 그것은 단순히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만이 아니라, 과장된 이미지로 넘쳐나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날카로운 충고로 다가온다. 클레오파트라가 살았던 기원전이나 지금이나 대중은 속기 쉬우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전기작가의 노력 덕분에 20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영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들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