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책머리에 · 5
1991년 · 11 1992년 · 271 |
윤형두의 다른 상품
|
쇼펜하우어는 《인생론》의 마지막 장에 “인간은 누구나 다 가장 추한 육신과 천한 욕정과 속된 야망, 온갖 어리석음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는 외모와 부자연스러움과 타락한 생활에서 오는 천박하고 횡포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그들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자연의 품에서 동물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고 술회하며 그의 인생론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나는 염세주의에 빠져 있는 그의 철학적 사색에서 벗어나 평범한 인간 즉 속인(俗人)들과 어울리며 80년을 살아왔다. 그 삶 속에서 많은 인간관계를 맺어왔다. 인간의 심리는 항시 유동적이어서 이익을 위해, 그때의 환경에 의해 협조도 하고 배신도 한다. 협조한 사람이 협조하기 쉽고 배신한 사람이 배신하기 쉬울 뿐이다. 그리고 기회주의자는 항시 기회주의자다.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이려니 하고 그 이상의 기대를 하지 않는다. 써놓은 글들을 넘기면서 때는 늦었지만 많은 것을 깨우친다. 남은 여생을 착실히 정리하고 미움도 사랑마저도 모두 지워버리고 살아온 삶을 하얀 백지로 남기고 싶다. 지난날 고서점가를 다니면서 묵서로 백지에 잡록(雜錄), 사초(私草), 여록(餘錄), 잡기(雜記), 한필(閑筆) 등 갖가지 이름으로 자신이 걸어온 이야기들을 써놓은 것을 수없이 대하였다. 오늘도 KBS에서 방영하는 〈진품명품〉 프로그램에서 일제시대에 남양군도의 미얀마(緬甸)에 주둔한 일본군의 위안부에 관한 국한문으로 쓴 일기가 나왔는데 감정가가 수천만원일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문서라고 한다. 모든 기록들이 가정사가 되고 사회사가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한국 출판계의 역사적 기록이면 적은 쪽지라도 수집하고 모았다. 그것이 무가치하고 폐지로 없어질지라도 모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산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들을 찾아 읽고 배운다. 나와 가까이 지내는 한승헌 변호사의 진실된 기록인 《불행한 조국의 임상노트》는 몇 번째 읽고 있다. 그분이 검사 생활을 그만두고 1965년 변호사 개업을 하시고 내가 1962년에 고시계 편집장 대리를 하고 1966년에 범우사를 창사한 후 가깝게 모시면서 임상노트가 내 삶의 길잡이가 되어 오고 있다. 지난 7~80년대에 한 변호사는 변호인석에서 정치재판의 변호를 맡았으며 나는 그 숱한 사건의 재판과정을 겪어오며 방청석에서 같이 아픔을 삭였다. 특히 정을병, 임헌영, 김우종, 장백일 씨 등이 구속되었던 ‘한양지 문인 간첩단 사건’, 김상현, 조연하, 조윤형 씨가 구속되었던 ‘반유신 탄압사건’의 재판에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방청석에 있었다. 또한 근자에 세상을 뜨신 민영민 회장님의 회고록 《영어 강국 KOREA를 키운 3.8따라지》는 그가 출협 회장 시절 등 출판계에서 일어난 일들과 나의 고난의 역사에 많은 관계가 있어 자주 접하고 있으며 《박맹호 자서전》도 2013년 1월 10일에 1독을 마치면서 말미에 박 회장이 아버지에게 출협 회장 선거에 낙선했다고 했더니 ‘아버님이 돈을 쓰지 않아서 낙선했다’고 올바른 말씀을 하셨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것이 모두 우리들이 살아온 현대사다. 한때는 나의 일기가 병약한 순간의 연속이었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만났던 사람들이 모두 좋았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모두를 좋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노력해왔다. 이 기록들이 시작부터 매듭까지 생활과 생각이 거의 반복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반복이 삶이 아니었겠는가. 그리고 이 글을 써서 무엇 하겠느냐는 자조(自嘲)의 글도 자주 나온다. 그러나 그 속에서 반성도 하고 삶의 설계도 만들고 후회도 만족감도 맛볼 수 있었다. 지난날에 써놓은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초를 엮어내겠다는 착상을 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잡기일망정 가능하면 기록하자.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라기보다 살기 위해 기록을 남기자. 오늘을 진실되게 사는 이야기를 쓰게 되면 그것이 미래에 교훈이 될 것이다. 한때는 좋은 시를 쓰려고 했다. 아름다운 비밀을 간진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은 시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시를 잃어버린 지가 오래된다. 삶이라는 것, 의미가 있든 무의미하든 그것을 위해 연연하고 있다. 방금 스탠드의 전구가 갑자기 불이 나가듯 언제 그칠 줄 모르는 생을 지탱하면서 끝까지 보람을 찾으면서 잡록이나마 남겨보려 한다. ? 2018년 4월 3일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