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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춤추는 큐렛 롤, 롤, 롤리팝 화분1 롤리팝 우먼 고등어와 콘돔 헬로 베이비 타인의 얼굴 이명 화분2 꼭꼭 숨어라 주름 화분3 춤추는 롤리팝 에필로그 작가의 말 작품해설 춤추는 가족, 그리고 그 이후_정영훈 |
안보윤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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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왜 양복을 싫어하는지 알아요?
어느새 옷을 챙겨 입은 해정이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다. 물기 하나 없이 말끔한 얼굴이다. 일직선으로 내리뻗은 머리카락도 구겨진 자국 하나 없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인지 땀 식은 몸에 한기가 돌아 박기영은 몸을 움츠린다. - 나는요, 양복 말고 다른 거 입은 아빤 본 적이 없어요. 아, 딱 한 번 있긴 한데 그건 싫은 기억이니까 패스. 내 기억 속엔 양복 입은 아빠뿐이에요. 아저씨 만난 날도, 양복 입은 사람은 전부 아빠로 보일 거 같아서 싫었어요. - 뭐가 그렇게 싫은데? - 아저씬 찜질방 좋아해요? 우리 아빤 항상 찜질방에 가요. - 찜질방? 그게 어때서. - 찜질방에 가서는 자꾸 지구대 사람들한테 잡혀 오거든요. 성추행 상습범으로. ---pp.37~38 조건부 임시 동거인. 해정은 자신의 가족을 그렇게 정의한다. 이전 조건이 어땠는지 몰라도 최근 조건은 기간제, 앞으로 약 2년이다. 때에 따라서 3년, 4년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순전히 해정에게 달렸다. - 큰애가 대학만 가면 끝이야. 엄마는 틈만 나면 그렇게 말했다. 대개 통화 중이었고, 그 상대는 가파르게 숨을 내쉬는 젊은 화가일 때가 많았다. 화랑에서 남자의 붓에 기금을 투자한다면 엄마는 남자의 몸에 이것저것을 투자했다. 조심성 없는 통화 덕분에 해정은 그가 한 달 전 엄마와 함께 성형외과에 가 식스 팩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 이혼한 부모라는 건 이제 별 얘깃거리도 안 된다. 새 학기마다 제출하는 가정환경 조사서에는 부모 관계란에 이혼과 재혼 항목이 따로 있을 정도다. 지금 당장 부모가 이혼한다 해도 해정의 수험 준비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오히려 그 편이 부담 없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찌 됐든 해정은 단번에 대학에 붙을 작정이다. 그래야만 한다. 여느 아이들처럼 꽃다운 20대를 만끽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대입에 실패해 이 우스꽝스러운 관계가 1년 더 연장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해정은 엄마와 아빠가 하루라도 빨리 헤어질 수 있도록 공부를 계속한다. 하고 또 한다. 엄마는 늘 여행 중이다. 남들 듣기 좋은 말로 여행이지 사실 파업에 가깝다. 흡족할 만한 퇴직금이 나올 때까지 무기한 파업. 버려진 직장에 관리인 격으로 해정과 해수가 남은 셈이다. 아빠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다. 돈을 벌어다 주니 파업은 아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백지다. 파업과 유기. 어느 쪽이든 해정에겐 다 똑같다.---pp.41~43 언제 헤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부부. 아니, 헤어지지 않고 지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부부. 호적이라는 임시 고용계약서에 묶여 있을 뿐 실제로는 헤어질 필요조차 없는 부부. 해정은 엄마의 화장대 의자에서 일어선다. 방 안을 떠돌던 화장품 냄새는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이 집에는 더 이상 엄마의 꼿꼿한 등도 아빠의 고급 양복도 남아 있지 않다. 익숙하지만 결코 친근해지지 않는 적막. 해정은 서둘러 거실로 나간다. 거실에서는 언제나처럼 해수가 만화영화를 보고 있다. 해수가 반년째 등교 거부를 하고 있다는 건 아주 사소한 문제다. 중요한 건 해수가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집에 체온을 가진 이는 해정과 해수, 둘 뿐이므로.---p.44 - 안 궁금해요? - ……뭐가. - 그냥. 전부 다. 내가 왜 아저씨를 만나는지, 내 학교생활은 어떤지, 아저씨 앞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는 어떤 모습인지, 잠자고 일어났을 때 머리 모양이나 목소리는 어떤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어느 대학에 가고 싶은지, 생일이 언제인지, 내 동생 해수는 어떤 아이인지, 디지털카메라는 어떤 걸 쓰는지, 영화는 어떤 걸 좋아하는지,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음악을 듣는지, 운동은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간장에 조린 호두를 먹으면 알레르기가 일어나는지 아닌지, 숫자 8을 쓸 때 왼쪽부터 쓰는지 오른쪽부터 쓰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 안 궁금해요? ---pp.53~54 너무 다양한 색상은 예쁘다기보다 괴이하다. 분홍색과 덜 분홍색과 더 분홍색이 적어도 열 개씩 반복되는 곳에서 해정은 어지러움을 느낀다. 마주치는 거울마다 손톱자국이 선명한 해정의 목을 비춘다. 쇄골 근처에 흩어진 할퀸 자국은 파운데이션을 두껍게 발랐는데도 가려지지 않는다. 해정은 살구색 아이섀도를 목에다 마구 덧바른다. 테스트용 화장품을 꺼내 눈에도 볼에도 입에도 마구 문지른다. 화장품 가게에서 나올 때쯤엔 해정의 온몸이 오색으로 얼룩덜룩하다. 해정은 유리창에 비치는 얼굴을 보며 피식 웃는다. 낯설고 흉측한 것이 익숙함보다 좋을 때도 있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해정은 가능한 한 낯선 얼굴로 약속 장소에 가고 싶다. 이전에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결코 만나지 않을, 익숙해지지 않을 얼굴. 자기도 모르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타인의 얼굴로. ---p.122 선주가 아기 발목을 꽉 움켜쥔다. 가느다란 발목에서 오도독 뼈 부딪는 소리가 난다. 아기가 벼락같이 울음을 터뜨린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선주에게 있어 아기는 고장 난 녹음 인형 같은 것이다. 마음에 드는 기능이라곤 하나도 없다. 더럽고 시끄럽고 귀찮은 것들. 이런 것들은 왜 자꾸 튀어나오는 걸까, 성가시게. 20년 전에도 그랬다. 언니 몸을 난도질해 놓고 튀어나온 것 역시 더럽고 시끄러웠다. 오물투성이 비닐 위에서 발악하듯 울던 시퍼런 몸, 그 몸의 검은 얼룩들은 또 얼마나 흉측했던가. 다시 시간을 돌린다 하더라도 선주는 몇 번이고 아기 가슴에 주삿바늘을 꽂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 건전지를 빼 버리면 돼. 선주가 중얼거린다. - 건전지를 빼 버리면, 전부 다 착한 아이가 되니까. ---p.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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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작가상, 자음과모음문학상 수상 작가 안보윤
해체되어 흔적만 남아 버린 가족과 ‘개인의 괴물성’을 조망하다 “삶과 인간의 뒤편과 이면을 끝까지 파헤치는”(문학평론가 김미현) 작가 안보윤의 『우선멈춤』이 출간되었다. 2005년 장편 『악어떼가 나왔다』로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으며 등단한 안보윤은 2009년에는 장편 『오즈의 닥터』로 자음과모음문학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장편 『사소한 문제들』을 낸 데 이어, 올해는 문예 계간지의 장편 연재를 새로 시작했다. 장편소설 『우선멈춤』은 바로 “장편 작가” 안보윤이 내놓은 또 하나의 야심작이다. 성추행 상습범인 가장, 불륜과 가출을 일삼는 엄마, 원조 교제로 임신과 낙태를 경험한 딸, 학교 폭력으로 등교를 거부하는 왕따 아들. 이 4인의 “막장 가족”을 비롯해, 여기에 한술 더 떠 습관적으로 영아를 살해 혹은 유기하는 상담 교사, 불법 낙태 시술사와 그녀의 망나니 아들 등 일곱 명의 등장인물들은 인연의 질긴 실타래 속에서 저마다 얽히고설켜 있다. 『우선멈춤』에서 가족은 “조건부 임시 고용인”에 불과하고, 호적은 “임시 고용계약서”에 다름 아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 인한 상처가 이들 모두를 괴물로 만든다. 이 소설이 공들여 서술하는 것은 ‘최후의 가족’이 아니라 ‘가족의 최후’다. 치밀한 플롯을 따라 가족들의 죄와 상처는 심화되고, 가족의 불행을 최적화하며 최대화한다. 이 작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족의 몰락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시종 넘치는 긴장감과 함께 잔혹할 만큼의 사실적 묘사로 거침없이 몰아붙이며 모자이크를 촘촘히 맞춰 나가는 안보윤 특유의 잔혹 서사는 『우선멈춤』을 또 하나의 문제적 작품으로 등극시키며 이 계절, 독자들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 것이다. 이들 “막장 가족”의 최후, 가족 이후에 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헤어지지 않고 지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호적이라는 임시 고용계약서에 묶”인 그 이름, 가족! 돌이켜 보면 이 모든 일들은 어느 일요일, 어쩌면 사소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번듯한 중소기업의 사장인 아빠 정현철이 찜질방에서 고등학생 딸 해정 또래의 여자아이들을 추행하다 인근 지구대로 끌려온 후, 마치 이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해정의 가족은 급속하게 나락으로 빠져들어 간다. 초등학생 아들 해수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그날, 그곳에 같은 반 친구 용태의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해수는 반 친구들에게 변태의 아들도 변태라며 놀림을 당하다가 아이들의 극심한 폭력을 견디다 못해 반년째 등교를 거부하고 집에서 하루 종일 DVD만 보며 지낸다. 엄마는 젊은 남자랑 바람을 피우다 아예 짐을 싸서 집을 나가 버렸으며, 해정은 30대 중반의 남자 박기영과 모텔을 들락거리다 임신을 하고 박기영에게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지고 나서 낙태 수술을 받는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해정의 가족뿐만이 아니다. 『우선멈춤』에서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치고 가족이란 유대감이 제대로 형성된 경우는 하나도 없다. 해수의 상담 선생인 선주가 상담을 맡고 있는 또 다른 아이는 엄마를 아줌마라 부르고, 그 아빠는 아내를 썅년이라 부르며, “저 썅년이 집안 다 말아먹네. 썅년, 차라리 굶어 뒈져 버리든가.”라고 악담을 퍼붓다가 다이어트 부작용으로 거식증에 우울증까지 걸린 아내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도망간다. 또한 이 소설에서 아기란 “자꾸 튀어나”와 “성가시게” 만드는 “더럽고 시끄럽고 귀찮은 것들”이므로 임신과 출산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제일 좋은 것은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며 차선책으로는 낙태가 있다. 그러니 불법 낙태 시술사인 순임이 할머니의 뒤를 이어 평생 이 일로 먹고사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어쩌다가 불가피하게 아이를 낳고 말았다면 선주처럼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수다. 문학평론가 김미현의 지적처럼 “영민한 작가 안보윤은 동시대적이고 대사회적이기도 한 주제인 가족의 파괴 혹은 해체를 다룬 『우선멈춤』을 통해 단순히 ‘가족의 불행’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괴물성’까지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극한으로 치닫는 괴물성을 좇아, 이렇듯 해체되어 흔적만 남아 버린 가족의 모습을 낱낱이 비추며 작가 안보윤이 그려 내고 싶었던 것은 무얼까. '작가의 말'에서 안보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잠깐만’이었다. 잠깐만 멈춰 서면, 잠깐만 눈을 돌리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보이고 들리고, 또 변할 거라고.” “나는 ‘가족’만큼 친밀하고 애틋하며 다채로운 단어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이다. 또 문학평론가 정영훈은 이렇게 평했다. “안보윤이 창조한 세계를 떠받치는 기초인 동해보복(同害報復)의 원리” 가운데, “안보윤은 자기가 만든 세계 속의 피조물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즐기는 가학적인 신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고통당하는 것밖에는 해 줄 게 없는 무능한 신이라 해야 옳”다고.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 불쾌해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이곳이 곧 현실이지만,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족의 시작과 끝을 찾아서 ―‘최후의 가족’인가 ‘가족의 최후’인가 해수가 지하철에 버려진 아기를 주워 온 사건은 소설의 말미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이 아기를 통해 『우선멈춤』의 모든 인물들은 자신의 지옥과 죄를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고, 소설의 플롯은 이 정점을 향해 교묘하게 직조되어 있다. 모든 것은 아기로부터 시작해서 아기로 끝난다. 가족의 시작인 아기가 늘 문제인 것이다. 소설의 끝에서 순임이 자살하는 것도 그녀의 핏줄을 포함한 수많은 아기들의 죽음 때문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듯한 순임의 낙태 시술 장면이나, 코끝에서 떠나지 않는 화분 속 아기의 시취(屍臭)에 대한 끔찍한 묘사는 이 소설의 압권인 동시에 재생 불가능한 가족의 암울한 미래상이기도 하다. 안보윤의 소설들이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루는데도, 그것이 극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개연성의 문제가 아니라 핍진성의 문제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족이라는 제도 자체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이라는 개인의 선택과 실존의 측면에서 현대성을 재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가족을 만든 것은 바로 그런 개인이라는 것,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성격과 선택 때문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가족과 개인이 지닌 보편성이자 현대성”(문학평론가 김미현)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