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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고전을 매개로 사귀기를 제안하며
1부. 배움의 공자 공자와 그의 시대 1. 학습 2. 중용 3. 공자의 윤리 4. 공자가 스스로 회상한 삶의 흔적 2부. 물음의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와 그의 시대 1. 캐묻는 삶 2. 무지의 지 3.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4. 내면의 보물을 간직한 자 3부. 배움과 물음, 어떻게 살 것인가 1. 닮은 두 사람 2.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3. 어떻게 살 것인가 맺으며 참고문헌 및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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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에서는 신체가 마비되었을 때 ‘불인不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마비는 피가 통하지 않거나 신경이 죽어서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니 아픔도 느끼지 못한다. 사회가 ‘불인’하게 되면 마치 몸의 기관이 마비된 것처럼 타자의 고통에 반응하지 못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같은 반의 친구를 봐도 내가 당하는 것이 아니니 외면하는 경우, 성적을 비관해서 자살하는 학생의 사례를 뉴스에서 보더라도 무감각한 경우, 나의 성적이나 진학과 관련된 것 이외의 일에는 눈과 귀를 막아버리는 그런 경우가 바로 ‘불인不仁’한 상태이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은 TV의 예능프로에서 쓸 수 있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렇게 느끼는 사회는 ‘불인’한 사회이다. 공자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함께 공감하는 마음인 인仁이 공동체에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사회에 퍼뜨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공자는 그런 마음조차도 학습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폐단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 p.46
...... 공자가 안회의 ‘호학好學’을 인정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 중 하나가 화를 다른 곳에 옮기지 않는다는 ‘불천노不遷怒’이다(......중략......)화를 남에게 옮기는 행위는 나를 화나게 한 원인이 무엇인지 반성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화를 남에게 옮기는 행위는 두 번째로 화를 옮기는 과정에서 화를 더하게 되고 화의 정도는 커지게 된다. 게다가 화가 난 원인이 아닌 곳에 화를 내게 되면 그 화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자기가 하지 않은 행위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는 상황이 된다. …… 결국 나의 화는 또 다른 사람의 ‘화怒’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런 행위가 바로 화를 옮기는 행위 곧 ‘천노遷怒’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공자가 표현한 안회의 모습은 ‘잘못을 하지 않는다.’, 곧 ‘불과不過’가 아니고 ‘잘못을 두 번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잘못을 하지 않는 경지는 인간이 아니라 신의 경지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실수한 이후의 태도이다. 그 중 최악의 경우는 실수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pp.50-51 자연의 흐름과 천하의 흐름의 또 다른 차이는 이렇다. 자연의 흐름인 밤낮의 변화나 사시사철의 운행은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지나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견디는 것뿐이다. 그런데 천하의 흐름의 간격은 일정하지 않다. 혹시 천하의 흐름은 사람의 행동과 선택에 의해서 더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것은 아닐까? 곧 우리가 천하의 새벽을, 봄을 더 앞당길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자전과 공전이 밤낮과 사시의 변화의 동력이듯이 사람의 실천이 세상의 흐름의 동력인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공자의 선택은 결코 무모하지 않다. 하지만 사태 안에 있는 경우 그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다. 공자가 했던 선택은 과거에 없던 독특한 사태와 마주하면서 공감仁과 올바름義에 기댄 선택으로서, 어떤 결과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윤리적 선택이다.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무도無道한 천하를 유도有道한 천하로 바꿀 수 없을지라도, 어느 누구도 그 길을 선택하라 요구하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공자, 이런 공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pp.80-81 그런데 우리 시대의 교육은 소크라테스적인 앎을 가르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캐묻는 소크라테스가 지금 학교를 다닌다면 아마 낙제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학교 교육에서 끊임없는 시험을 통해 평가하는 것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이며, ‘무엇을 모르는가’는 아니다. 이런 교육과정에 익숙해지다 보면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방법을 잊게 되고 어른이 되었을 때는 모르는 것에 대한 관심은 사라진다. 다만 자신이 아는 것만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많은 어른들의 생각이 유연하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으며, 자신이 경험하고 알게 된 것들만으로 어떤 것을 판단하게 되는 이유는 이런 ‘무지에 대한 무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배우려고 했다. --- pp.127-128 혹자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어차피 앎을 추구하더라도 모름이 그만큼 커진다면 굳이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만일 배움을 어떤 목표를 위한 행위로 둔다면 이 말이 일리가 있다. 그런데 배움 자체가 목적이라면 많은 것을 알아가는 과정은 더 많은 것을 몰라가는 과정과 같기에 더 많은 배울 거리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평가받기 위해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알고 싶은 순전한 호기심으로 어떤 것을 배울 때, 그 배우는 과정에서의 즐거움을 느끼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을 느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새롭게 알게 된 것과 관련된 또 다른 것에 호기심을 느끼면서 배움을 이어가게 된다. 이런 연쇄적인 과정 자체가 배움의 과정이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과정이다. 소크라테스는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가난하고 권력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이런 즐거움을 놓지 않고 살았기에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누렸다고 말할 수 있다. --- p.130 나를 부르거나用 버리는 것舍은 누구인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이다. 실천하고行 물러나는 것藏은 누구인가? 그것이 나이다. 공자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것에 집착하기를 버리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했다. 많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부분에 집착한다. 왜 나를 부르지 않는지, 왜 나를 버리는지에 집착한다. 그것은 마치 해가 동쪽에서 뜨고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이다.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보고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공자는 물러날 때 물러나고 나아갈 때 나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을 위해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삶보다는 호학好學, 곧 배움을 좋아하는 삶을 선택했다. 부자가 되기 위한 욕망에 복종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욕망에 복종하기를 선택했다. 당신은 무엇에 복종하기를 원하는가? --- pp.179-180 공자가 말년에 자신의 삶을 돌이키며 한 이 말에 등장하는 벗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벗은 이해타산으로 만나지 않는다. 벗은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이다. 벗은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본다. 공자처럼 평생 배움을 좋아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찾는 삶을 사는 자들이 공자의 벗이 아니겠는가. 바로 야생의 삶을 함께 살아가는 자들이다. 야생의 삶에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없다. 서로가 벗일 뿐이다.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지만 동시에 자기만의 길을 걷는 자들. 자신의 삶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듯이 어떤 대가도 원하지 않고 서로 도울 수 있는 자들. 홀로 독립해서 살아가지만 동시에 벗들과 함께 살아가는 자들. 이미 살고 있는 방식대로 앞으로도 누군가가 나의 삶을 결정해주고 나의 생존과 안전을 보장해주기를 바란다면 더 이상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들의 조언은 그런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걸림돌이 된다. 하지만 다이몬처럼 내 안에서 지금의 삶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다면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라. 이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보라. 이들의 삶을 모방해보라.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저 멀리서 우리에게 손짓하며 유혹한다. 가축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야생으로의 삶으로 오라고. 자신들의 벗이 되어 달라고. --- pp.213-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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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사용법은 무엇인가?
‘고전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던져야 할 질문과 질문을 탐구해가는 과정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5쪽’ 고전을 읽으면서도 우리의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전체 삶과 긴밀히 관련지어서 고전을 읽어낼 수 없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일 것이다. 저자는 4대 성인에 속하면서 논어와 대화편이라는 최고의 고전 속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말을 통해서 일상의 갈등과 문제들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우리가 겪는 갈등과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가에 천착해서 고전을 읽어나간다. 누구나 맞닥뜨리면서도 근본적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학교생활의 문제,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직장에서의 문제에서부터 인간의 본성, 선악, 도덕과 윤리, 욕망의 문제 등을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관점을 빌어 파고들어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로 접근한다. 이를 통해서 독자가 자신의 삶의 문제들을 때론 명쾌하게 때론 심각하게 직면하고 반성하도록 이끈다. 철학의 사용법은 무엇인가? 철학하는 것은 철학자의 몫인가? 저자에 의하면 만일 우리가 공자와 소크라테스를 철학자라고 부른다면, 철학하는 것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그것을 탐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럼 누가 철학해야 하는가,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질문은 생활적인 것일 수도, 근본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그 질문으로 근본적인 질문으로 삼고 그것에 답하려고 한 철학자들이다. 우리는 매일처럼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을 생활물음으로 삼아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반면에 이 질문을 근본물음으로 놓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 이면의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는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 그 결과 삶의 조화는 깨어지고 사회의 병리현상은 넘쳐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공자와 소크라테스를 따라 하는 것, 따라 배우는 것은 철학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며, 우리 삶을 조화롭고 자유롭게 해주는 길이라고 말한다.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현재 우리에게 무엇인가? ‘몸은 매일 깨끗이 씻는데 마음을 깨끗이 하려는 노력을 해본 적이 있는가? 오랫동안 씻지 않으면 몸에 때가 끼고 불쾌한 냄새가 나듯이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때가 많이 낀 안경을 쓰면 세상이 얼룩져 보이듯이 마음에 때가 끼면 그 마음을 통해 본 세상도 삐뚤어지고 얼룩져 보인다. 192쪽’ 저자는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이지 않는 내면을 가꾸고 영혼을 돌보는 삶을 산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던진 질문을 던져보고, 그들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애쓴 방법, 배움과 물음을 따라 해보자. 그것은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근본적으로 반성해 보는 일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저자는 힘주어 강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