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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1장 / 왜 시간인가 2장 / 데자뷔와 나무/숲의 가환성 3장 / 마르코풀루 : 시공의 내적 기술(記述) 4장 / 내부 관측에서 A계열, B계열로 5장 / 맥태거트적 불가능성의 전회: 데자뷔 재고 6장 / 인과론-숙명론의 상극(相克)과 양자론 7장 / 인지적 시간에서 A계열, B계열 간의 조정 후기 참고문헌 | 찾아보기 |
郡司ぺギオ幸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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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과 혼동이야말로 ‘지금-여기’를 만들어 내고 시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에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세계는 도처에서 구별과 혼동을 띠고, 현실과 접하는 무류한 ‘세계’일 수 없습니다. 현실과 ‘세계’의 조정이 ‘세계’의 가장자리에서만 행해지고 무류한 ‘세계’가 존재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현실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의 미세한 점, 국소 한 군데 한 군데에 침윤하여 ‘세계’의 성립을 방해합니다. --- p.6
시간의 문제는 이미 단순히 철학적인 관념적 문제는 아니다. 현대 뇌과학이나 인지과학은 주체가 이 세계 속에서 산다는 것은 세계와 스스로를 타협시키는 것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것은 세계와 그 표현을 끊임없이 조정(調停)하는 것이고 양자 간에 동기(同期)를 취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운동과 그 결과를 지각할 때 뇌는 끊임없이 동기를 만들어 낸다. 때로 시간은 수축하고, 때로 인과관계는 역전되기조차 한다. 이러한 주관적 시간의 현상이 실험적으로 논증되고 있다. 역으로 말해 동기를 만든다는 것은 바로 ‘현재’를 끊임없이 만드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전개하는 시간론은 이 현상들을 이해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 p.29 과거는 공존하지만 물론 같은 강도로 병존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현재에 의해 자아져 가는 시간을 살기 때문에 복수의 현재를 지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두 개의 꼬리표 중 하나가 현재라면 또 하나의 꼬리표는 현재가 아닌, 이성적으로는 인식이 아닌 무언가가 된다. 따라서 현재에 귀속하는 과거와 현재가 아닌 무언가에 귀속하는 과거, 두 과거가 공립하게 된다. 꼬리표가 붙어 고정된 계열인 이상 그것은 과거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한쪽은 현재에 귀속하고 다른 한쪽은 현재에 귀속하지 않는 과거이다. 그러면 현재가 아닌 이 꼬리표 자체는 무엇일까? --- pp.53~54 시간 양상이란 역사적 변천의 어떤 적분이다. 과거란 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발생했던 역사의 집적이고 현재 일어나는 운동의 적분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화된 A계열은 잇달아 일어났고, 그리고 일어날 현재의 운동을 접어 넣은 형식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A구성은 속의 모든 원소에 대해 집합을 발견하고, 그리고 그 내부 구조를 잊는 조작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공간의 적분은 면적으로서 값을 갖는데 그것은 도형의 경계를 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현재 이전을 과거로 할 때 현재는 이미 이동해 간다. 미래의 현재라는 집합 개념을 끊임없이 이 현재로 수축하는 ‘현재’는 비일정한 경계에 관한 적분이라는 성격을 일반화된 A계열에 부여한다. 그것은 폭이 없는 추상 개념으로서의 경계선이 실제로는 면적을 갖고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63 시간이란 변화이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운동체와 그 운동을 지정하기 위한 토대, 공간이 필요하다. 이것뿐이라면 도로를 달리는 차를 상상하면 된다. 내가 현재라는 차에 탔다고 하자. 잇달아 다가와서 지나쳐 가는 풍경을 미래가 현재를 경유하여 과거가 된다고 생각하면 시간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한 기분도 든다. 대지를 달리는 차의 경우 내가 차에 탔는가, 차의 밖에 섰는가는 명확하게 분리할 수 있다. 시간에 관해서는 어떠할까? 현재의 밖에 서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가 향수하는 변화는 토대를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차 밖에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는 자가 외부 전체를 보고 파악하듯이 하지 않으면 향수하고 있는 변화를 이해할 수 없다. --- p.2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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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시간론과 철학적 시간론의 랑데부!
‘들뢰즈를 연구하는 과학자’ 군지 페기오-유키오, ‘시간’을 말하다!! 들뢰즈 이후, 단순히 그의 철학을 해설하거나 주석을 붙이는 것을 넘어 그의 사유와 대결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유를 펼쳐 가고 있는 저자들의 사유를 모은 그린비출판사 ‘리좀총서 II’의 신간으로 『시간의 정체: 데자뷔?인과론?양자론』이 출간되었다. 동 시리즈로 이미 번역 출간된 『생명이론』(2013)을 통해 생명과학의 입장에서 들뢰즈에 대한 과감한 해석을 전개한 바 있으며, 들뢰즈의 존재론을 과학철학, 수리철학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가는 데 가히 독보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 있는 일본의 물리학자 군지 페기오-유키오(郡司ペギオ幸夫)의 저작이다. 이 책에서 그는 ‘시간’을 주제로 다시 한번 그의 독창성을 발휘한다. 시간의 문제가 ‘존재의 양의성’이라는 문제와 얽힌 가장 근본적인 측면임을 주장하면서, 베르그송-들뢰즈적 시간 개념과 맥태거트(J. M. E. McTaggart)의 시간론을 대조하며 맥태거트가 제시한 ‘시간의 역설’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울러 시간이 빨리 흐르거나 느리게 흐르는 체험을 자신의 집합-원소 혼동 이론에 기반해서 설명하고, 인과 역전과 관련된 인지과학의 실험 및 그 가능성에 대해서 또한 소개하고 있다. 과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펼쳐 내는 그의 사상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충격을 선사할 것이다. 철학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들고 부수기 이 책은 마누엘 데란다가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리좀총서 II의 첫 권이기도 하다) 서문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완전히 배타적인 두 철학 진영, 즉 유럽 대륙과 영미권 어느 쪽에서도 난색을 표하며 전혀 동의/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기 십상일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더구나 철학 내에서 들뢰즈라는 철학자의 철학을 재구성하여 해설하는 작업에 중점을 둔 데란다와는 달리, 이 책 『시간의 정체』는 과학자가 철학을 참조하면서, 특정 철학자의 사상을 해설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추상적인 수학적 모델을 만들어 내고 있는 저작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곤란함을 안겨 준다. 철학과 과학, 양 분야의 연구자/독자들 또한 난색을 표하며 전혀 동의/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기 십상이지 않은가! 하지만 역으로, 양측 진영에 동시에 호소할 수 있는 지점도 여기에서 발생할 것이다. 보통의 ‘인문적’ 철학 논증 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수학적 도구, 모델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어느 한쪽 스타일에서의 논증이 아닌, 새로운 논증 스타일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기초론이나 수학사, 수리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이 책에서 여러 흥미로운 논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배중률의 붕괴, 원소와 집합의 혼동 등의 개념이 그러하다, 1차 술어 논리와 이산 수학, ZFC 공리계 등 그 안전성이 보장된 영역에서 벗어나 체나 군론을 이용하여 ‘모순’을 다루고, 최소한 양가적인 예/아니오라는 대답을 보류한 상태의 수학적 구조에 주목하는 것이다. 즉, 생성 과정의 최종 산물로서의 언어적 명제를 다루는 논리학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생성을 함께 사유하는 수학적 도구를 내세운다. 역사적으로는 시대적 한계와 제반 조건 때문에, 배중률과 모순율을 필연적인 진리로서 받아들여 왔으나(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 이 흐름에 역행해 보는 것이다. 이는 나아가 ‘계산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도 자연스럽게 연관된다.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이 연역이나 귀납 등 전통적인 추론법을 비롯한 언어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진리만이 아니라, 언어적 표상을 초월한, 자연의 수학적 ‘이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도구로서 철학에 새로운 빛을 비출 잠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데자뷔로부터 시간의 근본적 양의성까지 이 책의 논의는 ‘데자뷔’라는 특수한 시간 감각으로부터 시작한다. 데자뷔의 시간 감각에 내포된 부유감, 혼동감이 논의의 실마리이다. 군지는 물리학자 마르코풀루와 철학자 맥태거트는 공히 삼인칭적인 이전-이후라는 순서 관계로 구성되는 B계열과 일인칭적인 현재-과거-미래로 구성되는 A계열의 상호작용을 받아들이지만, 전자의 논의는 철저하지 못했고 후자는 논리적으로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이에 비해 베르그송과 들뢰즈는 마찬가지로 시간을 사고할 때 어떤 역설에 도달했음에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전개했다. 군지는 이들의 논점을 검토한 뒤 현재는 점(원소)이자 폭(집합)의 양의성(a/{a})을 갖는다고 논하고 인식론(=존재론)적으로 이 양의성은 근본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이 모순을 베르그송과 들뢰즈처럼 긍정적으로 전개해 보자는 것이다. A계열과 B계열은 서로 끊임없이 어긋나고, 조정되면서 다시 어긋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 운동이 시간의 흐름을 낳는다. 데자뷔는 현재의 원소-집합 쌍의 대응에 혼동이 오는 순간인 것이다. 저서의 후반에서는 양자론이나 시간 감각, 인과 개념에 대한 논의가 등장한다. 이들 모두는 이 A계열과 B계열의 상호작용, 원소와 집합의 혼동이라는 대전제 위에서 논의된다. 독립적인 성분의 합이라는 기저 상태의 중첩(선형 독립성)과 복합계의 텐서곱을 함께 허용하는 양자계에서는 이른바 토큰과 타입이 서로의 안에서 그 자신을 발견하는, 기묘한 양의성을 띤다. 인과론과 숙명론은 타입과 토큰이 스스로에 내재하는 상대의 존재를 은폐하고 그저 단적으로 타입과 토큰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생겨난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중성을 완전히 은폐할 수 없기 때문에 양자는 서로 대화 및 논쟁이 가능하며, 근본적으로는 이 대립 자체가 무효인 것이다. 시간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감각, 인과가 역전된 것 같은 기묘한 감각도 기본적으로는 데자뷔와 같은 돌출적인 사태이다. 실상 우리는 어느 때는 타입과 토큰을 구분하고, 어느 때는 혼동하면서 자유롭게 구별과 혼동을 오간다. 이들을 단성분으로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이중성을 살려서 전개하는 것이 열쇠가 된다. 객관적인 시간과 주관적인 시간을 명확하게 구별하기란 불가능하다. 구별한 순간,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는 다시 상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위에서 길게 기술한 이 양상을 기술로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인 모델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제시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전개 과정을 흥미롭고 아름답게 보여 주는 하나의 작품으로서, 깊이와 통찰을 겸비한 학제 간 연구의 한 전범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