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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 7
당신의 어깨 ―시의 장소 13 쓸쓸한 몇 편의 사랑 노래 15 죽은 엄마에 의한 엄마의 교정 25 나비의 꿈 29 매복 32 밧줄 끊기 34 파비안 35 장미 화환을 쓴 암흑 37 타인들과의 관계 39 4월 41 나의 시 ―그대에게 가기 위하여 43 이 시대에 살기 45 우리의 패배주의 47 시와 힘 50 미망(迷妄)의 아이들 52 폼페이 54 눈 56 TV의 말놀이를 주제로 한 몇 개의 성찰 58 지옥에서 ―감기 기운 68 나의 병 1 ―자가 진단, 반성을 위하여 70 나의 병 2 72 나의 병 3 74 나의 병 4 76 어느 밤의 울기 78 나의 (시) -삶은 각질이다. 따라서 언어도 각질이다. 80 불면 -추함에 길들기 1 83 화장 -추함에 길들기 2 85 지하철에서 -추함에 길들기 3 87 또 가을 88 나의 시 -약한 너에게 기대어 91 나의 시 -죽음과 더불어 살기 93 나의 시 -무한의 받아쓰기 95 절망적인 시법(詩法) 98 봄 99 L씨의 주검에게 101 다시 오월 103 나의 시 -여기에서, 언제나 여기에서 105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 또는 막가는 나의 시법(詩法) 108 엄마 버리기, 또는 뒤집기 109 강시 131 햇살, 세시의 짐승 132 결핍으로서의 존재 -어두움의 기록 1 133 결핍으로서의 존재 -어두움의 기록 2: 뜨개질의 성찰 135 결핍으로서의 존재 -어두움의 기록 3 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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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어깨는 좁은 뜨락이다.
꽃이 피어 있다. 누구의 입김으로 여기에 남은 흔적 이토록 현란하게 흔들리다가 붉은 백 겹의 혓바닥으로 꽃 피어난 걸까. 꽃은 또한 발자국이다. 우리가 큰 소리로 아, ‘확인’이라 외치며 남기는 발자국, 우리는 떠나도 뒤에 남아 홀로 피어나듯. 춤추는 발자국의 길, 당신은 언제나 아프다. 언제나 두고 와 돌아보는 어제처럼 당신의 완결된 어깨의 길, 어쩌면 쓸쓸하게 하늘에 닿아 있을까. 당신의 어깨너머엔 날아가는 커다란 눈, 참 여러 개. ---「당신의 어깨 -시의 장소」중에서 나비를 보았다. 깊은 밤, 내 숨소리 허공을 향해 올라갔을 때. 우리의 기질이 나비의 날개를 가진다면 우리는 다만 있는 일만으로 족하리라. 왜냐하면 버려버릴 것을 모두 가벼운 날갯짓으로 벗어버린 뒤에 우리는 알몸으로 비로소 남아 있을 수 있으므로. 그때에 내가 내 육체를 향해 새삼스러이 말을 걸리라. “안녕! 예쁜 나여!” 나비는 언제나 내 영혼의 깊은 곳을 찾는다. 그가 말했다. “가능하면 더 깊은 곳을” 어느 날인가 나는 그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금이 간 영혼을 사랑해.” 어째서지? “잘 몰라, 하지만 어쨌든 그들에게선 좋은 냄새가 나.” 그리고 그는 날아갔다. 나는 덜덜덜 흔들렸다. 그리고 조금 뒤엔 바람이 칠흑이 그리고 핵이 남았다. 꿈꾸는 핵 나는 다시 나비를 보았다, 아니 오히려 가졌다. 내가 모든 여행길의 돌짝밭에서 돌아올 때 조심스러운 비상으로 다시 시작하는 나비. ---「나비의 꿈」중에서 우리는 모든 것들의 등 뒤로 돌아선다 시대가 우리에게 잘 맞지 않는 의복처럼 우리를 건드리고 지나간다 안녕 누더기여 안녕 ‘건강하게’ 정신이 외친다 ‘건강하게’ 원칙이여 ‘건강하게’ 깜깜하다 바람소리 우리는 숨어서 키웠다 언젠가는 함께 있고 싶었다 어떤 날 미친 듯이 축제를 벌이고 싶었다 순진한 혼(魂)들, 나는 눈물이 나왔다 귀여 문을 열어라 편재(遍在)하시는 귀여 문을 열어라 열려라 콩 참깨 예수그리스도 우리는 요정처럼 자유로웠다 상한(上限)과 하한(下限)까지 하루에 골백번 드나드는 요정 우리는 모든 것들 뒤에서 또 새로이 또 하나의 등이 되었다 흐느끼며 우리는 효율을 건져내려고 많이 삐걱거렸다 저마다 혼자만큼씩 각각, 구체적으로, 삶의 사건과, 만났다, 할 수 없이, 지치며, 우리의 깜깜한 배경 위로 파랗게 불꽃이 지나간다 손톱이 자라고 시대가 흔들린다 ---「매복」중에서 낮에 애들 앞에서 어설픔으로 진저리 치며 그러나 꾹꾹 눌러 참으며 글쓰기와 꿈꾸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리고 나는 참을 수 없어서 종일을 굶었다, 견딜 수 없었다, 이, 수없는 말들, 허망함으로 이빨을 가는, 오 떠도는, 우리가 만들어낸, 저 넝마들을. 이 턱없는 삶. 나는 밥풀딱지같이 세계라는 밥그릇의 가두리에 붙어 있다, 용서해다오, 세계여 또는 밤이여,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들어낸다, 바깥쪽으로? 밤에, 지하철 창에 비치는 어떤 한 여자, 안의 짐승이 울부짖었다. 맞아? 틀림없어? 너냐구, 그래? 그리고 묵시처럼 찾아오는 눈물…… 우리가 이름 붙이지 못하는 어떤 알맹이를 향하여 나는 떨며 떨며 서 있었다. 나는 그 여자를 향해 기어갔다, 날지 말자, 어쨌든 당분간은. 나는 통곡하며 그 여자에게 빌었다, 제발, 너라도 되어야 해, 그렇게 하자, 그것으로라도 나 스스로의 유령이 되지 말아야 한다. ---「지하철에서 -추함에 길들기 3」중에서 감기, 아무렴, 난 감잡고 있지, 이 삶에 대해, 감잡고 있지, 뭔가 삐걱거리는 것을, 잘 안 맞아 돌아가는 것을, 감기, 내 삶에 대한 내 삶 전체의 징후, 내 기질이 내 삶에 대해 가지는 관계, 안에서 어긋나는, 조심조심, 잠재우듯이, 우리는 우리의 성마른 기질을 향해서 달래며 말했다, 그래 얘, 살아남은 게 어디니, 기침을 하며, 안에서 우리의 삶을 밀어내며 가까스로 우리는 말했다, 그게 어디니. 그러나 밤에 기침은 심해졌다. 홀로 있을 때 내성(內省)의 번쩍이는 칼이 우리의 삶을 사정없이 우리의 바깥으로 내몰았다. ---「지옥에서」중에서 푹푹 썩자, 나여, 적극적으로, 썩어문드러지자, 지금은 생생한 나여, 세상에―알아?―내 가슴이 그때―그대의 모욕당한―그―존재의 껍질의―너덜너덜한―게다가―그리고―나는―눈 돌리지 않았어―나는―그―천연색 사진을―꼼꼼히―들여다보았어― 나는 울지 않았어, 왜냐하면 감당했기 때문이야. 나는 호들갑을 떨지 않았어. 내 안에서 뽀글뽀글 아주 천천히, 세목의 분노가 치솟아 올랐어. 그래도 나는 흥분하지 않았어. 나는 다 내다 버렸어. 그때 거짓을, 우리가 삶이라고 적당히 겉옷 입혀 흥흥 참아내던 너절한 양식을, 역사라는 미명의 폭력을, 내가 사회라고 부르며 어정쩡하게 기다리던 공동의 운명에의 희망을. 왜냐하면 젊어서 죽은 자여, 나는 죄다 싸안기로 한 거야. 통째로… 아예… 모두… 나는 그대를 안고 사는 거야, 확실히. 나는 공범이야. 아시지. 누가 그렇게 공개적으로 썩어가겠어. 그날 이후로 나는 (아주 열심히 썩으면서) 아무 말도 친구들과… 나누지 않기로 했어… 세계는 덫으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날개를 꺾고, 나는 잠자던 내 피멍들의 까만색 울혈들이 다시 그 덫을 향해 법석이는 소리를 들어. 당당한 파멸에의 예감. 침묵과 침묵의 골에서 날선, 삶의, 시퍼런, 생생한, 기운들이, 죄다, 덫을 향해 일어서는 소리… 꼭 한 번 살고, 꼭 한 번 죽는 자들의… 죽여라, 그럴 수 있거든. 죽여라, 백 번이라도. ---「L씨의 주검에게」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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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시인이라는 이름의 낙인
여성이라는 존재 조건을 은밀하거나 선정적이지 않게, 그러므로 보다 본격적이고 근본적으로 꿰뚫어보고자 했던 시인 김정란의 시들은, ‘삶’이라는 예외상태를, 안락하고 통속적으로만 대면하고자 했던 자들에게, 깊은 일격이 될 수 있다. 그 일격이 가장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는 것이 여기 소개하는 그의 첫 번째 시집이며 그러나 이 역설의 사투 혹은 전략으로 말미암아 보다 풍부한 시적 각성의 개화(開化)가 먼 훗날의 우리에게 예비되고 있었으니 지금 이 시간, 이 시집을 일독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여성 시인으로서 한국 시단이라는 남성중심적이고 폐쇄적인 공동체에 하나의 당대적이고 지속적일 도발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단순히 한 명의 여성 시인이 아닌, 형이상학적 시의 투사라는 면모를 드러내며 치열한 존재 방황을 통한 존재 각성에의 열망 혹은 그것의 실패라는 결과물을 기록해놓았다는 점에서, 이 시집을 통한 김정란 시인의 등장은 하나의 파문과 다르지 않았다. 감성의 안락한 발설과 감정의 낯익은 배설이라는 시적 기대 -당대 여성 시인들에게 공공연하게 강요되었던 바로 그 기대-를 배반하고 무력화한다는 점에서, 그의 첫 번째 시집은 단연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나비의 꿈 이 시집 속에서 긍정적 이미지들과 부정적 이미지들은 서로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도 결국 화해에 이르거나 봉합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각각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서로 약탈하고 있으며 그 약탈의 중심에는 삶이라는 질병이 있다. 이렇듯 시적으로 윤색한(된) 이미지들을 통한 삶의 성급한 화해가(를) 거부(당)하고 있다는 점은, 그녀가 좋은 시를 쓰는 시인임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그러므로 그녀의 시를 통해 비로소, 여성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앓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그의 시 속에는 나비의 오랜 어두움의 나날과, 그 어두움을 뚫고, 아니 오히려 훌훌 벗어버리며 날아가 버리는 날갯짓과, 그 날갯짓을 가능케 했던 날개의 날갯짓에 의한 부러짐과, 그러나 부러진 날개가 예비하는 새로운 날갯짓으로 어떻게 존재의 상승을 예감토록 하는가와, 그 예감은 그러나 왜 그토록 아프고 혼란스러운가에 대한 쉼 없는 자문과 자답이 있다. 시인의 앎에의 의지는 앎의 결과에 실망하게 될 테지만 스스로 광증(狂症)으로 낙인찍은 자아의 모순적 -어쩌면 유일하게 덜 억압적이었던- 존재 상태를 남성/합리의 이념 혹은 폭력으로 배반하지 않고 끌어안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망설이고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남성적이어서 억압적인 말의 바다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이 시인에게는 시작(詩作)이 ‘시작(始作)’이 된다. 다시 시작하는 나비는 그러므로 하나의 끝에 다다른, 존재의 새로운 출발점에 선, 예리하게 벼려진 칼날과 같은, 인간이 아닌 여성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한 시인의 빛나는 모습이다. 시인, 김정란 적잖은 세월, 시인은 세속의 힘센 물결 속에서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그것은 그를 둘러싼 수많은 적(敵) -혹은 타자- 들과의 사투였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스스로와의 사투이기도 했다. 사투(死鬪), 그것은 글자 그대로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는 일이며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일이다. 시인의 다른 시집들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듯, 이 시인에게 있어 시 쓰기는 무엇보다도 자신과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과의 사투라는 면모를 띠는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처음에는 그의 시를 난해하다고 착각하게 만들지만, 마침내는 능란하고 아름답다고 인정하게 만든다.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긴장 상태와는 별개로 그의 삶의 일정 부분은 늘 긴급 상태의 삶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시인을 계속 시인일 수 있도록 이끌었던 것 같다. 불문학자로서, 번역가, 비평가로서도 의미 있는 행보를 걸어온 저자지만, 그녀가 당위적/필연적으로 끊임없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오판하지 않고 재구성하려 했던 의지의 중심에는 ‘시인’으로서의 그것이 있었음을, 이 시집은 다시 한번, 그러나 처음과 같이 새롭게 증거한다. 시인의 길고 외로웠던 사투의 끝에서, 그 시인의 빛나는 첫 모습이 우리 곁에 도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