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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서론 세계의 관절을 탈구시키는 방법 1부. 문학자들의 끝없는 방황 아시아 식민지에서 읽는 알베르 카뮈 허무에서 꿈으로 말의 심연으로부터 정위와 이동 디아스포라와 국문학 2부. 인간에게 자유는 ‘무거운 짐’인가 ‘잡거’에 대한 공포 민족 차별과 교육 전쟁이라는 덫 ‘적반하장’에 맞서서 우리는 상처 입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3부. 월경이라는 사상을 다시 더듬다 경계선 위의 지성 관계항으로서의 ‘일본’ ‘비전’의 연쇄 심장부로부터 탈출하는 자들 비내리는 시나가와 역 생각한 것을 쓴 결과 갈 수 없는, 그냥 꼬레 지하실, 최후의 안식처 속삭여 오는 소리 의지와 행위 ‘야옹’하고 울면 생각하는 근대 일본의 큰 문제 맺음말 글의 출처 옮긴이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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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택시 드라이버는 ‘이동’(移動)과 ‘이산’(離散)의 상징인 것일까? 도쿄의 양석일과 파리의 홍세화의 운명은 이러한 생각이 들게 했다. 아무런 생활 수단도 갖지 못한 채 유일하게 지닌 것이 운전면허라면 사람들은 종종 택시 드라이버를 직업으로 선택한다. 그리고 대도시를 목적도 없이 방황하며 택시를 타 줄 승객을 찾는다. 고용주의 명령과 고객의 지시는 택시 드라이버들이 지켜야만 하는 신성한 법도이다. 적어도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가혹한 노동 조건하에서 밤낮 구별 없이 운전을 계속해야 하는 택시 드라이버의 모습은 도쿄에서도 파리에서도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양석일과 홍세화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망명자인 홍세화는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돌아갈 수 없게 된 한국에 대하여 비통한 망향의 마음을 품고 있다. 그리고 겨우 얻게 된 [프랑스] 체류 허가증에 “갈 수 없는 나라… 꼬레”(‘꼬레’는 프랑스어로 ‘코리아’를 의미한다.)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홍세화는 센강을 향해 절망적으로 외친다. 그러나 그 한편에서 홍세화는 유머가 넘치는 필치로 프랑스와 한국의 정치 상황, 문화 상황을 비교한다. 이를 통하여 한국 사회가 이질적인 타자를 받아들이는 ‘똘레랑스=관용’ 정신이 결여되어 있음을 비판한다. 그러한 비판에는 일종의 정신적 여유조차 엿보인다. --- p.44
조선어 안을 조금 들여다보면, 참으로 ‘우리’투성이다.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도 ‘우리’로 시작한다.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바둑이’라는 식으로 강아지까지 ‘우리’란 타이틀을 달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혼자만 살고 있는 집도 ‘내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며 순정을 나눈 부부야말로 ‘우리 아내’, ‘우리 남편’이라고 서로 부르는 것이다. 이 속에서도 가장 주목해야 할 전형적인 ‘우리’의 용례는 ‘우리나라’, ‘우리말’일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를 ‘한국’이라고 하고, ‘우리말’을 ‘한국어’라고 한다면, 냉정하고 낯선 느낌이 들어서 동포로서는 뭔가 배신당했다는 느낌조차 들 정도이다. 더구나 ‘우리’를 사용하면 ‘한국’인가 ‘조선’인가라는 성가신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란 국적의 구분을 강조하는 정치적 단위가 아니라 민족의 일상적 정감에 호소하는 감정의 공동체를 가리킨다(이 지점에서 나에게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가 뚜렷이 떠오른다). --- p.67 아이덴티티란 물건이 아니다. 누구도 아이덴티티를 소유하고 있을 리가 없다. 아이덴티티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일 테지만, ‘나는 ○○이다’가 아니라 ‘나는 ○○이 된다’라는 대답이야말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낸다. ‘나는 ○○이다’라고 어떤 곤란이나 주저함도 없이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사실은 몇 가지 외적 권위에서 주어진 특허장을 손에 넣고 있음에 불과하다. 아이덴티티란 실제가 아니라, 흐름이며 움직임인 것이다. ‘재일’이란 이러한 이동이 만들어 낸 움직임의 다른 이름이며, ‘안’과 ‘밖’이 반전하는 패러독스에 가득 찬 장소일 것이다. 이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패러독스에 손쉽게 해답을 부여하려고 하는 자는, 어떤 안주의 땅을 구하고 초월적 이념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p.100 차별이란 차별하는 자와 차별당하는 자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보통 차별하는 자는 자신이 차별하고 있다고 의식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차별당하는 쪽에 선 자는 스스로를 ‘차별당하는 존재’로 규정해 버린다. 차별이란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짐에도 불구하고, 차별당하는 자는 차별을 실체화하고 차별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마이너스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부여해 버린다. 즉 차별이란 일방적으로 ‘차별하는 자’를 보이지 않게 하는 동시에, 차별을 받는 쪽에게 차별당하는 존재로서의 자기 규정을 발생시키는 장치인 것이다. --- p.1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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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이방인이 바라본
‘경계’를 살아가는 이들의 ‘자유로운 부유 감각’ 『이방의 기억』은 『국어라는 사상』으로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았던 한국 국적의 여성 언어학자 이연숙이 몇십 년간 일본 사회에서 살면서 경험한 다층적인 생각의 지표들을 보여주는 저작이다. 저자는 카뮈, 양석일, 이양지 등 식민지주의로 인해 경계로 밀려난 이들의 끝없는 방황을 바라보는 ‘문학론’과 외국인을 배척하는 심리의 역사적 배경을 되짚는 ‘정치론’. 두 가지 각도를 통해 경계를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민족 차별의 ‘오늘’을 되묻는다. ‘레이와’ 시대에도 일본 사회를 지배하는, 내셔널리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이방의 기억』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강렬하게 관통했던 내셔널리즘 비판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이방의 기억』에는 일본에 사는 이방인이라는 자리로부터 발견된 디아스포라 문학과 재일조선인의 삶에 대한 공감, 일본 사회의 폐쇄성에 대한 예민한 감각 등이 나타나 있다. 이연숙은 이 책에서 내셔널리즘에 대해서는 비판의 날을 세우지만, 소수자들의 공동체가 내포한 절실함은 옹호한다. 재일조선인 작가에 대해서 공감을 표하지만, 그 작가의 사상이 폐쇄적인 ‘조국’으로 귀착될 때에는 다시금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한다. 이처럼 저자는 내셔널리즘에 의해 ‘경계’로 밀려난 존재가 지닌 복잡함과 민감함에 대한 인식을 공감과 애정을 담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위치 설정은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이 단지 비판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이 소수자의 공동체에 대한 비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하게 한다. 내셔널리즘 비판이 풍미했던 90년대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당시에 전개된 논의의 강도와 심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현재적 의미에서 행운이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150년을 기념하면서 아시아를 침략했던 쇼와 시대를 망각하려는 움직임이 아베 정권의 배타적 내셔널리즘과 함께 강화되고 있다. 2019년 4월에는 아키히토 ‘천황’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퇴위함으로써 헤이세이 시대가 끝나고, 5월 1일부터 새로운 ‘천황’이 즉위하면서 ‘레이와 시대’가 열렸다. 새 천황은 즉위 후 첫 소감으로 세계평화를 강조했지만, 2019년에 아시아를 침략했던 그림자를 지닌 ‘히로히토’가 퇴위하고 아시아 침략의 그림자를 “지운” 새 ‘천황’이 즉위한다는 것은 2011년부터 지금까지 지속되는 재해를 “지운” 채 부흥과 안전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2020년 도쿄 올림픽과 호응하면서,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일본의 배타주의와 군사주의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의 기억』은 일본 내부에 깊이 뿌리박힌 아시아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일본에서 사는 사람’과 ‘일본 국민’ 사이, 타자와의 공생을 모색하는 시도! 이 책은 일본에서 이방인으로서 오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 언어학자 이연숙의 레이더망에 걸린 생활과 사상의 지도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의 주요 연구 분야인 언어 사상에 국한하지 않고 문학, 사진 등 다양한 분야를 접하며 새로운 시도를 통해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1부에서는 경계에 선 이들의 정체성에 대해, 2부에서는 일본에서 배제되었던 타자의 존재와 그런 배제를 낳는 일본의 사상적 풍토에 대해 쓴다. 3부는 서평들을 모아 놓은 것인데, 여러 편의 짧은 서평들은 이연숙이라는 언어학자가 어떤 책들과 만났고, 그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어떻게 가다듬어 왔는가를 보여 준다. 일본에는 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고, 지금도 증가하고 있다. 나는 짧지 않은 세월을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껏 풀리지 않는 큰 의문이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일본에서 사는 사람’과 ‘일본 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큰 낙차가 그것이다. 물론 어느 나라에 가도 거기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 나라의 ‘국민’은 다르다. ‘국민’은 인간 각자가 갖는 다양한 목소리와 스토리가 상쇄된 총괄적인 익명의 존재 양식인 반면, 생활자로서의 ‘사람’은 각자의 스토리가 있고, 각자가 자기 나름으로 생동하고 호흡한다. 일본에서는 ‘국민’과 생활자로서의 ‘사람’ 사이에 큰 낙차가 있다. (「한국어판 서문」, 7~8쪽)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오랜 세월을 일본에서 생활해 왔지만 ‘일본에서 사는 사람’과 ‘일본 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큰 낙차에 대한 의문을 늘 마음속에 품고 있음을 밝힌다. 이러한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 역시 이러한 낙차에 대해 함께 고민해야 할 시기가 왔음을 일러 준다. 이 낙차에 대한 답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역사, 사회, 정치, 문화, 경제를 아우르는 다양한 분석과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방의 기억』은 일본 사회를 그저 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와 좀 더 바람직한 관계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지 모색하기 위한 저자의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