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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005
1장 혼자도 안녕합니다 자리 있나요? 혼자입니다만 · 013 ‘개취’입니다, ‘존중’해주세요 · 025 ‘나’를 위한 변명 · 037 덕질의 시대 · 048 여럿의 이름으로 · 060 2장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탕진잼을 위한 서시 · 075 편의점 인간 · 087 투명한 집 · 099 어른이 된다는 것 · 110 마음의 지식, 지식의 마음 · 121 3장 타인의 시선과 반응에 민감한 이유 조금은 다른 여행 · 135 먹방의 끝은 없을지도 · 146 반사의 반사 · 158 인성 게임 · 170 호모無노동 · 182 4장 랜선 혹은 라이프 아무래도 인간은 곤란합니다 · 195 인증하라,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것처럼 · 207 딱 거기까지만 · 218 일상의 라이브 · 229 현실 로그아웃 · 241 참고문헌 · 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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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밥을 먹는 관습은 음식을 나눔으로써 상대와 같은 무리에 속해 있다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 가장 친밀한 표현이기도 하다. 타인이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없는 한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다른 사람과 함께 밥을 먹는 관습을 통해 동질성을 확인하고 친밀감을 표시하는 방식은 과거의 그것과 사뭇 다른 의미의 결을 만들어낸다. 특히 요즘과 같이 면대면으로 관계를 맺는 것을 포함해 그 외의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과 연결되었음을 느끼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 「자리 있나요? 혼자입니다만」 중에서
조금만 관점을 바꿔 세상에는 모두가 나누어도 충분할 만한 여러 개의 파이가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사회가 정한 특정한 파이가 아니어도 개인이 다양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존중받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도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용인될 수 있지 않을까? 이기주의 대 이타주의가 아닌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인류의 근원을 짚어온 철학적 토대를 바꾼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와 함께 인간의 본성도 조금씩 변해왔음을 감안한다면 그리 불가능한 제안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럼으로써 이기와 이타의 공생관계, 혹은 상보적 관계가 가능해질 수도 있다. 이기주의에 대한 오해가 풀릴 때까지만이라도 개인을 위한 변명을 되뇐다. --- 「‘나’를 위한 변명」 중에서 근대의 합리주의적 사고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계획적으로 꾸려나가야만 했다. 이와 반대로 본능의 욕구를 따르는 것은 미개한 방식이었고, 개인의 삶을 망치는 것을 넘어 사회 전체에까지도 해악을 끼치는 태도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현대사회가 고도의 복잡성을 띠는 가운데 여러 측면에서 불확실성이 증가하면서 끊임없이 통제하고 관리하는 이전까지의 방식은 점차 실효성을 잃게 되었다. 더군다나 저성장과 신자유주의적 경쟁은 사회적 계층 간의 이동을 어렵게 만들었고, 경직된 사회 안에서 소비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탕진이라는 사회적 금기는 신의 선택이나 국가와의 계약이라는 존재론적 명분이 의미를 잃은 오늘날 탕진잼과 같은 형태로 변형된 것인지 모른다. --- 「탕진잼을 위한 서시」 중에서 시즈오와 미소라는 가상의 인물이 그려내는 어른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성장을 되묻는다. 스스로 성장을 되묻기에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다른 어른들 앞에서도 성장을 완결하지 못한 자신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자라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어른의 생물학적 조건에 사회적 조건이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며, 어른이라고 인정할 만한 사회적 조건이 반드시 가시적인 지표로 드러나야 하는 게 아닐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어른은 누구인가? 어느 정도 성장했지만 계속 성장해야 한다고 여기거나 성장의 모양이 하나가 아니라 다양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게 어쩌면 어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중 그 누구도 어른이 아니거나 이미 모두 어른이다. --- 「어른이 된다는 것」 중에서 먹방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방송과 TV 방송을 넘나들며 대중적인 콘텐츠로 자리 잡은 먹방은 비단 방송의 형태뿐 아니라, 광고와 웹툰 등 다른 형태의 콘텐츠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심지어 먹는 행위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드라마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도 먹방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필수 요소가 되었을 정도다. 하루에 두세 번은 끼니를 챙기니 밥과 삶이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먹방의 빈도를 가늠하노라면 우리의 하루가 먹기만 하다 지나갈 것만 같다. 누군가는 질린다고 하고 누군가는 또 보고 싶다고 하는 와중에도 먹방의 생애는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 「먹방의 끝은 없을지도」 중에서 미디어에서 보이는 부분을 통해 아이돌의 인성을 가늠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아이돌의 모습 중 특정 부분이 부각되거나 실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왜곡될 여지가 생긴다는 점이다. 대중도 이러한 미디어의 속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종종 이 사실을 외면한다. 이처럼 아이돌을 복합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면 할수록 대중이 소비하는 아이돌의 이미지는 현실에서 멀어진다. 아이돌을 지켜보는 복수의 눈에 의해 아이돌은 이들의 실재에서 점점 더 밀려나는 것이다. 결국 아이돌은 대중에게 전적인 실재라기보다 어쩔 수 없이 가공의 외피가 덧입혀진 판타지적 존재가 되고 만다. --- 「인성 게임」 중에서 시각적 증거로서 사진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문화적 전회(cultural turn)를 맞이한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그리고 자발적인 참여문화가 거대한 전환의 기폭제가 되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계가 등장했고, 이렇게 찍은 사진을 업로드하고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 누구에게나 제공되었으며 여기에 참여하는 일반대중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도구뿐 아니라 도구를 활용할 수 있는 장(場)이 마련된 셈이니 사진 찍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어졌다. 사건의 존재와 순간의 존재, 심지어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에도 시각적으로 인증하는 절차가 당연하게 포함되었다. --- 「인증하라,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것처럼」 중에서 브이로그가 내포하는 ‘해설과 대화’ 기능은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브이로그를 찾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나의 삶을 설명하고(해설) 나의 삶에 대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대화)은 타인의 존재를 확인함과 동시에 타인과 대화하는 나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브이로그야말로 현실과 가상이 비대칭적인 관계를 맺는 오늘날에 가장 실재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즉, 브이로그 안에서 ‘진짜 사람이 진짜의 삶’을 살아가는데, 이것이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자주 혼란을 느끼는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무엇보다 “순간의 강렬한 경험”이 중요해질 것이라는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Michel Maffesoli)의 통찰이 브이로그라는 ‘일상의 라이브’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 「일상의 라이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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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취’입니다, ‘존중’해주세요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영업의 특성상 매일 고객을 만난다. 고객들 중에는 주인공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는 이도 있고, 무례하게 구는 이도 있다. 하루 종일 고객을 방문하고 여러 업무에 시달리는 주인공은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혼밥의 시간’을 갖는다. 타인을 위해 하루하루를 사는 주인공이지만, 밥을 먹는 순간만큼은 철저히 혼자의 것으로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워진 환경에서 밥을 먹는 순간만큼은 고독 속에서 나다움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찾는 대신 우리는 혼밥을 통해 먹는다는 본능의 욕구를 따름으로써 나 자신의 감각을 일깨운다. ‘그래, 이제부터는 혼자 즐기는 거야.’ 이렇게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보는 눈이 신경 쓰일 때가 있다. ‘왜, 밥을 같이 먹을 사람도 없어?’, ‘혹시 사람들과 잘 못 어울리는 거 아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질문의 산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산은 무신경의 땅 위에 무관용의 자양분을 먹고 서 있는 경우가 많다. 혼자 밥을 먹는 것은 따돌림을 받거나 사회생활의 실패로 혼자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정말 혼자이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2017년 페이스북에 개설된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약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살 만한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이 커뮤니티는 오이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거나 오이를 빼고 음식을 주문할 수 없었던 경험을 공유한다. 이 커뮤니티 내에서 넘쳐나는 공감은 음식 취향을 드러낼 수 없었던 사례가 어쩌면 오이에만 국한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제2의, 제3의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생겨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오이’가 있다고 가정해보면 어떨까? 즉,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형성된 취향이 아니라, 즉자적으로 생겨난 취향이 있다고 한다면? “나만 잘되게 해주세요. 꼭 나만.” 한 어린이가 새해 소망으로 적어냈다고 알려진 이 한마디가 소셜미디어를 수놓았다. 이와 비슷한 풍경은 박근혜 정부에서 ‘국민이 행복한 나라’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을 때도 펼쳐졌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내가 행복한 나라’로 변모시킨 풍자가 가득했다. 누구인지 모를 ‘국민’보다는 확실한 ‘내’가 우선 행복한 게 중요하지 않겠냐는 반문이 숨어 있는 듯하다. 웹툰 「대학일기」의 한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은 ‘인생은 어차피 혼자’라며 자기만의 시간에 집중한다. 때로 친구들과 만나 노는 것도 좋지만,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노래방에 가는 편이 더 편하다고 고백한다. “돈을 쓰고 돌아다니는 건 재밌는 것 같아! 탕진잼!” ‘재물 따위를 다 써서 없앤다’라는 탕진은 전통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 단어 뒤에 ‘즐거운 기분’ 또는 ‘크게 흥미를 느끼는 상태’를 뜻하는 ‘재미’가 붙는다는 것은 언뜻 모순으로 비치기까지 한다. 일반적으로 탕진이라는 행위 뒤에 찾아오는 감정 상태는 허탈감이나 불안감과 더 가깝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탕진잼’은 그 뒤에 숨은 복합적인 맥락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스스로 넉넉한 상황에 있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탕진’이라는 소비-놀이를 유희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땅히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일정한 돈을 모아 집과 같은 더 큰 재화와 교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약간의 여유자금을 필수 품목이 아닌 재화를 소비하는 데 지출하는 ‘현실 타협적 탕진’의 의미를 띤다. 자신에게 허락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을 소비함으로써 탈금욕의 순간을 만끽하는 것. 이를 다른 ‘탕진재머’와 공유하고 ‘탕진력’을 인정받음으로써 내일의 불확실성을 이겨내고자 하는 것. 한정된 예산 내에서 사사로운 물건을 모조리 사들여 일순간일지언정 억눌려왔던 소비 욕망을 발산하는 것. 소소하게 탕진한다고 해서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주인 없던 물건들의 소유자가 된다는 것. 무엇보다 암울하게 보일 수 있는 상황을 재미로나마 위로하는 것. 이처럼 탕진잼은 상대의 눈을 의식한 타자지향적인 결정에서 개인의 목표와 취향과 기준에 맞춘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선택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탕진잼과 같이 소비를 통해 개인의 정서적 만족을 추구하고자 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힘 빼지 않고 적당히 일하는 법 유튜버나 아이돌, 때때로 직업이라 부르기 모호한 건물주를 장래 희망으로 적어내는 아이들의 생각은 ‘바둑을 취미로 두는 프로그래머’가 되었으면 하는 어른들의 생각과 달라 보인다. 또 지금 출판계에서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책들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 어떤 일을 할 것이라고 자신했을 지금의 젊은 독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는 데 있다. 젊은 층의 호응을 얻는 이 책들은 ‘백수로 살아남는 요령’을 전수하거나 되도록 ‘힘 빼지 않고 적당히 일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일하고 있지 않은 누군가와 일을 하고 있지만 일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에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과거에는 없던 낯선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어린아이들은 대중의 인기를 얻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을 갖고자 하고,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청년들은 일 자체에 대해 흥미를 잃은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시대의 노동이 당면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이 점점 더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실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 ‘일을 하고 싶지 않다’라고 했을 때, 특히 발화자가 젊은 층에 속할 때 그 마음은 종종 세대의 특성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치열한 경쟁으로 학창 시절을 보낸 청년들이 ‘경쟁이 싫어 백수를 선택했다’고 할 때, 기성세대는 그것은 ‘현실도피일 뿐’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 걸쳐 일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이 커지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 간의 관계에 대한 시각이 변화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국처럼 집단주의적 사고가 발달한 사회에서 ‘나의 노동’은 종종 ‘우리의 노동’으로 치환되어 개인이 받는 노동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지금의 사회 분위기는 젊은 구직자들에게 스스로 일의 의미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독려하지 않는다. 아니, 어떤 의미에선 그러지 못하고 있다. 한 대학 졸업식에서도 “대학 나오면 뭐하나, 백순데……”라는 자조 섞인 플래카드가 붙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국 사회도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고, 일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고용 불안정 등으로 지속적으로 일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노동 환경의 악화와 이와 같은 열악한 조건 안에서 부딪히다 못해 탈출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국 별개의 것이 아닌 맞닿아 있다. 아무래도 인간은 곤란합니다 일본 드라마 「문제 있는 레스토랑」의 아메키 지카는 극중에서 사람과 직접 대면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20세의 프리터다. 첫 등장에서부터 그녀는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는다. 말을 걸기 위해 다가가는 사람들을 향해 지카는 손을 뻗어 다가오지 말라는 표시를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녀의 휴대전화에서 차가운 기계 음성이 흘러나올 뿐이다. “사람이 싫기 때문입니다. 거리감을 가져주세요.” 기계가 인간의 일상에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아니 인간이 기계를 일상에 들이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 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다. 오늘날에 이르러 인간은 인간-인간 커뮤니케이션, 인간-기계 커뮤니케이션을 넘어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 기술로 현실화되고 있는 기계-기계 커뮤니케이션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기계를 매개로 한 가상의 상대가 애완동물, 채팅 상대, 비서 등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올 때마다 기꺼이 그 대상에 우리와 같은 인격을 부여해왔다. 인간 커뮤니케이션에 기계를 초대한 이래 우리의 삶은 생각지 못한 속도로, 또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진보라 부를 것이고, 누군가는 그것을 재앙으로 부를지 모른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은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에서 기계를 완전히 몰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기계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의 마음은 ‘기계의 마음’보다 알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때로 자신의 마음을 감추어야 하는 끊임없는 타협의 관계에서 벗어나 마음을 입력하는 대로 산출하는 기계적 마음의 시대로 기꺼이 진입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유일한 존재는 타인과 기계를 넘어 기계에 투사되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다. 자존과 관종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적극적으로 수집해야 하는 시대에 발맞춰 진화한 SNS는 시각적 인증에 대해 타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하기에 이르렀다. 인증하는 자아와 이를 인정하는 타자는 상호작용의 인터페이스 안에 묶여 댓글과 ‘좋아요’를 증여받고 또 증여한다. 타인의 인정을 애타게 기다리며 자아를 극단적으로 인증하는 사례는 종종 ‘관종’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관심을 갈구하는 누군가보다 그가 관심을 갈구하도록 만든 시스템이 정작 문제적일 수 있기에 보기에 따라서는 편향된 표현이라 할 수도 있다. 특히 사회 구성원들이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따라 자신을 연출하고 있음을 냉정히 받아들인다면 더욱 그렇다. 지금 살고 있는 순간이 어떠한지 알기 위해, 또는 내가 과연 누구인지 알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나 자신임이 틀림없다. 인증을 하는 것도 그것으로 인정을 받는 것도 얼마든지 나의 앎이나 성찰과 멀찌감치 떨어져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종종 타인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나에게만 집중하면 된다고 자신을 타이르기도 한다. 이와 결탁한 SNS도 자신의 모든 것을 시각적으로 인증해 타인에게서 인정받아야만 이름 모를 이들의 기록 더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그 결과 타인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이상 인증함으로써 인정받는 일상은 어쩔 수 없이 반복된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가상관계를 두고 흔히 ‘랜선 ○○’라 일컫는다. 온라인 사전에서 ‘랜선’을 검색하면 ‘랜선 이모’, ‘랜선 친구’, ‘랜선 조카’ 등이 연관어로 등장한다. 이들 단어 모두 실제 만나거나 혈연 등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나 네트워크를 통해 가상의 가족이나 친구 역할 등을 하는 관계임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현실에서 대면하는 관계보다 느슨하게 연결된 랜선 관계를 더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상세계에서는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위험하고 힘든 요소들을 최대한 제거한 채 안전하고 쉬운 경험이 가능하다. 또 개인이 우선시되다 보니 자신 이외의 다른 개인을 끌어와야만 성립하는 사회적 관계는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관계 맺기를 포기하거나 ‘랜선 친구’와 같이 유사관계를 맺는 것이다. 현실 로그아웃 ‘동영상으로 된 일상 기록’인 브이로그는 ‘나와 모두를 위한 다이어리’의 전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브이로그는 어떤 주제든 다룰 수 있다는 점과 주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다는 점에서 친근함을 선사한다. 그 덕분에 브이로그는 최근 유튜브 내에서 한국어로 만들어진 콘텐츠 중에서도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인다. 브이로그의 탄생에는 유튜브의 공이 절대적이다. ‘당신을 널리 알려라’는 슬로건 아래, 유튜브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다룰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했다. 라이브가 갖는 실시간성도 브이로그의 매력을 강화한다. SNS 문화의 여파로 대중은 점점 ‘지금 이 순간’을 공유하고, 서로의 지금을 함께하고 있다는 연결감을 중시한다. 그만큼 현재를 중시하는 현재주의적 관점이 브이로그를 통해 점점 강화되고 있다.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되도록 주류에 동화되려고 하는 반면, 가상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집단주의적 가치가 우선시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경우 개인 서사를 향한 열망은 한층 커진다. 더불어 나의 이야기를 내가 만들어갈 때 나는 세계의 창조자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다른 말로 가상에서는 개개인이 현실에서보다 자신의 능력을 경험할 기회가 많은 셈이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얻지 않고도 삶의 지속가능성을 타진할 수 없다면 현실은 더 많은 사람을 가상으로 내몰 것이다. 현실 로그아웃은 현실에 발 디딜, 자기만의 장소를 잃은 순간과 다를 바 없다. 그 순간은 밀레니얼 세대에만 국한된 것도 소수의 현실 부적응자에게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