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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의 말
2. 옆집 여자 3. 깃발 4. 악몽 5. 즐거운 소풍 6. 촛농 날개 7. 당신의 백미러 8. 곰팡이꽃 9. 치약 10. 올콩 11. 양파 12. 해설 백지연 |
Seong-nan Ha,河成蘭
하성란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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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파국으로 가는 세심한 눈길
--- 00/02/07 조창완(chogaci@hitel.net)
우리가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갖는 희망형의 대부분은 권선징악이다. 하지만 문명의 정점에 가깝게 선 우리가 보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파국을 기초로한다. 파국을 기초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파국을 기초로해야만이 좀더 현실형에 가깝게 되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에 혹자는 의문을 던질 것이다. 우선 '문명의 정점'이라는 말에 딴지를 걸고 싶을 것이다. 앞으로 인터넷, 이동통신 등 정보통신의 급속한 발전속에 있는 삶이 있는데, 벌써 문명의 정점이라는 말이 가당하기나 한가를 묻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이 문명의 정점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더 이상의 발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환경학적 관점이든 문화적 관점이든) 내가 그렇게 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의 심리속에 '권태'라는 개념이 포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권태란 영화 '거짓말'에서 볼수 있는 것과 같이 욕망에의 권태도 있으며, 더더욱 심한 것은 물질과 노동에의 권태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모든 것이 정체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국지적이든 전세계적이든 퇴보하는 과정이 있을 것이며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좀 우습기는 하지만 생존으로 가는 티켓을 사기 위한 긴 투쟁의 역사가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폭파되는 지구를 멀리서 지켜보며 새로운 낙원을 찾아 우주를 여행하는 비행선의 티켓을 사기 위한 경쟁. 공상과학같은 내 흉악한 미래관을 떠나 본론인 하성란의 소설로 와본다. 하성란은 이미 세심한 묘사와 그녀만의 색깔로 일가를 이루어, 젊은 여성작가군에서 두드러진 작가중에 하나다.(미운 오리 새끼 같다고나 할까.) 그녀가 그리는 인물들의 결과는 대부분 불행하다는 점에서 현실에 가깝다. 또한 작가라는 코드에 가깝다. 내가 간접선로를 통해 얻는 인상으로 판단해도 지극히 이해심깊은 남편과 안락한 가족구조를 가지고 있는 그녀의 소설속에 인물들은 항상 파국을 향해 치달을까. 이사온 옆집여자에게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빼앗기고 파멸하는 영미를 그린 '옆집여자', 이민재라는 모델 여자를 깃발로 가정하며 서서히 소진하는 자신을 지켜보는 나를 그린 '깃발', 간강의 악몽과 그 대상자를 살해하는 과정을 환몽적으로 만들어가는 여자를 그린 '악몽', 이카로스의 꿈을 꾸며 살아가다가 세상에 던져져 다리를 잃는 여자를 그린 '촛농날개' 등 그녀 소설 대부분을 파국을 향해 있다. 무엇의 그녀의 소설을 그토록 곤혹스러운 이야기를 만들게 했을까. 그것은 앞에서도 말한 권태이기도 하며, 욕망의 원칙에 충실한 문명이기도 하다. 이미 인정을 잃어버린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흥이라는 것이 얼마나 삭막하며, 위험하는 것을 알려주려는 의도에서 씌여진 것 같다는 느낌을 줄 정도다. 간간히 접하다가 모음집으로 만난 하성란의 소설집 '옆집여자'의 최대 미덕은 젊은 작가 답지 않게 작품의 수준이 고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성실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고, 진지함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믿음직한 일이다. '루빈의 술잔'에서 이전에 지나치게 치밀한 묘사라는 그녀만의 코드에 왜 소설이 씌여졌는가를 독자에게 인지시켜 준다는 것도 긍정적인 변모다. 그녀가 다루는 코드들은 광고, 쓰레기 등 도시적인 것이 많다. 오정희나 박완서 등 노 여성작가등을 제외하고 도시라는 공간을 문학에서 온전히 풀어내온 이가 드물었는데 하성란은 67년이란 시간에 서울에서 나고 자란 도시세대답게 대부분을 문명이라는 기호로 차분하게 풀어낸다. 그런 기호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서 치열히 거래되는 욕망들도 익숙하다. 다만 나에게 어색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문명의 기호들이 여전히 비관적인데 반해 그녀는 긍정과 부정을 같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거대한 역사가 주는 폭압이나 계급적인 갈등도 아닌 개개인의 본질속에 있는 현재적인 욕망과 갈등, 혹 문명 그 자체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 것인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다른 이들이 쉽사리 접근하게 어려운 길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도 하성란은 예의주시할 가치가 충분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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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위를 흐르는 빗물 때문에 길 하나를 사이에 둔 터미날은 아주 먼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의자 위에 앉아 다리를 건들거린던 여자 아이가 피아노 건반을 내리쳤다 [악몽]
--- p.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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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명희는 내게서 빌려간 뒤집개를 아예 돌려주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드라이버를 남편의 서류 가잡 속에 넣은 것도 명희 짓인지 몰라요. 남편의 서류 가방은 늘 거실 찬장 위에 있으니까요.찻주전자를 태우거나 세탁해 놓은 빨래를 널지 않는 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사소한 일일지도 몰라요.
--- p.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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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우연히 집으로 돌아오는 널 보았다, 넌 생각에 잠겨 줄곧 땅만 바라보고 걷고 있었다, 이제 보니…… 땅을 바라보고 걷는 것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걷는 것처럼 그저 좋지 않은 습관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씀드릴 수 없었다. 오년 만에 전화를 건 고등학교 친구는 애국조회 시간을 기억해냈다. 난 네가 음치인 줄 알았다, 애국가를 엉터리로 불러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애국가를 합창하면서 들킬까봐 작은 목소리로 한두 번 장난을 한 것이 소설을 쓰게 된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내가 콜라와 환타, 사이다를 섞어마신 것조차 어떤 기미로 읽힌 것 같다. 섞어마시면 더욱 맛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뿐인데, 그때는 모두 뜨악하게 쳐다봐놓구선. 아무튼 소설을 쓰면서 나와 관련된 일들이 조금씩 왜곡되기 시작했다.
어릴 적 읽었던 위인전 속에는 얼마나 많은 관대함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우연히도 첫창작집을 이맘때 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곧 서른둘이 된다는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못했다. 2000년이 되면 난 몇살? 초등학교 때 그런 제목으로 작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서른넷이라는 나이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며칠 후면 난 서른네살이 된다. 예전에는 서른을 넘긴 사람들이 모두 어른처럼 보였다. 막상 나 자신이 서른을 넘기고 보니 그들이 저질렀던 실수들이 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적어도 나는 내 또래 사람의 일들까지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을 쓰는 동안 봄이 왔고 여름, 가을이 지났고 겨울이 왔다. 그동안 계절을 잊고 지냈다. 덥다 싶으니 여름이었고 추워 겨울코트를 꺼내 입으니 두번째 창작집이 나오게 되었다. 저녁 밥상을 맛있게 차리기 위해 요리책을 뒤적였던 일이 아주 오래 전 기억 같다. 김치를 담그는 건 엄두도 못냈고 시금치나 깻잎단을 다듬어 나물을 무친 게 손꼽을 정도다. 서둘다보니 나물에서 흙이 씹힌 적도 있었다. 소설들 속에 혹시 흙이 섞여 있으면 어쩌나, 지금 심정이 그렇다. 첫창작집 때보다 조금 능청스러워졌다. 그것이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성격 때문에 어머니한테서 꾸중도 많이 들었지만 소설을 쓸 때만은 명확해지려고 애를 썼다. 소설 한편이 100개들이 귤상자라고 한다면 난 그 속에 99개도 아니고 101개도 아닌 딱 100개의 귤을 채우고 싶었다. 게다리 모양을 한 튀김이 있다. 먹어보니 정말 게맛이었다. 그런데 포장지에 적힌 재료에는 게살이 1퍼센트도 들어 있지 않았다. 포도맛, 베이컨맛, 피자맛, 훈제 통닭구이맛 등등 우리 주위에는 무슨무슨 맛으로 나와 있는 음식들이 아주 많다. 진짜가 아니면서 진짜맛을 내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가짜면서 진짜보다 더 맛있는 것이 너무도 많다. 며칠 전 고등학교 후배가 전화를 했다. 언니. 후배는 그렇게 말해놓고 교지에 실을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귤 한봉지와 생크림빵을 사들고 교복을 입은 후배 네 명이 집으로 왔다. 십칠년 전 우리 학급의 담임선생님은 졸업앨범 속의 내 사진을 보고 아하, 이 학생, 하고 웃으셨단다. 성실하고 공부 잘했던 학생으로 선생님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숨겨주지는 않는다. 그러니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내뱉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글은 더더욱. 내 인터뷰는 은행 지점장이 된 선배의 인터뷰와 나란히 실리게 될 것이다. '내가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소설이 나를 썼다”는 헤밍웨이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더디기는 하지만 나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왔다. 그 말을 하신 어머니께 이 책을 드리고 싶다. 그분을 반만이라도 닮을 수 있으면 좋겠다. 여전히 부족한 글을 책으로 묶어주신 창작과비평사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김성은씨는 내가 놓친 흙을 골라내어 글이 깨끗하게 놓이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이 책을 펼치는 여러분께도 감사를 전한다. 내 본심과는 달리 내 소설들은 여러분의 뒤통수를 치고 싶어한다. 1999년 마지막달에 하 성 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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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깊은 잠을 잘수가 없었어요. 새벽 네시에 일어나서 가스 콕을 잠갔는지 확인하기 위해 부엌으로 몇번이나 왔다 갔다 했죠.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남편이 신경질을 부렸어요. 가스 콕을 확인하고 나서 자리에 누우면 이번에는 현관문을 잠갔는지 의심이 가는 거예요. 일어나서 가보면 현관문을 잠겨 있습니다.
밤잠을 설치게 되니 자연히 낮에 졸음이 쏟아졌어요. 아이는 명희와 같이 지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가끔 잠 속으로 명희와 아이의 웃음소리가 끼어들기도 했습니다. --- p.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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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마세루. 오스트리아는 워싱턴. 일본은 쿄오또........ 내 기억력은 아직 쓸만합니다.막힘이 없이 줄줄 외웁니다. 명희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피싯 웃은것도 같습니다. 명희가 왜 나를 향해 어렇게 웃는거죠? 어쩌면 명희는 내게서 빌려간 뒤집개를 아예 돌려주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드라이버를 남편의 서류가방 속에 넣은 것도 명희 짓인지 몰라요 남편의 서류가방은 늘 거실 찬장위에 있으니까요.
찻주전자를 태우거나 세탁해 놓은 빨래를 널지 않은건 누구에게나 있을수있는 사소한 일일지도 몰라요 우리집 열쇠도 명희가 숨겼는지 모릅니다. 명희가 내세서 빌려간 것들의 목록을 하나하나 떠올려봅니다. 세계 각국의 수도를 외우는 훈현이 내게 큰 효과가 있는것 같습니다. 뒤집개, 드라이버, 병따개, 우산, 열쇠, 마늘다지기,...그리고. 명희의 남편, 그리고 내 아들 성환이는 마치 한가족처럼 보입니다. 남편과 내 아이, 다른 물건들처럼 이번에도 돌려주지 않을 작정일까요? 명희, 저 낯선 여자가 누굽니까? 507호 옆집 여잡니다. --- p.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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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가 쇼핑 카드를 들고 내게로 옵니다. 명희의 손을 잡은 아이의 한 손에는 장난감이 든 과자가 들려 있네요. 이제 만원따리 쿠폰 하나만 더 받으면 롤러 블레이드와 바꿀수 있습니다. 롤러 블레이드 이야기를 꺼내자마다 아이가 신이나 겅둥거립니다. 돈1을 지불하고 만원짜리 쿠폰까지 챙겨습니다. 가게문을 나서려는데 별안간 여주인이 내 앞을 가로막았어요. 쇼핑백 안에 든 물건 좀 보여 주실래요? 그제서야 철수세미를 가슴속에 넣어둔 채 진열대에 되돌려놓는 걸 잎었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맹세코 철수세미를 훔치려는 마음은 없었어요.
--- pp.3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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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왔습니다. 밖에서 보니 남편은 참 말쑥합니다. 아침에 다려준 와이셔츠에는 벌써 구김이 졌어요. 남편이 내 어깨를 붙들고 흔들어댑니다. 영미야 영미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말해, 영미야. 왜 이렇게 이 남자가 내 이름을 불러대는지 모르겠어요. 설마 내가 내 이름마저도 잊어버린 걸로 생각하는 건 아닐 테죠. 명희가 눈물을 흘립니다. 언니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다 내 잘못이에요. 남편이 영희를 다독거립니다. 남편은 아예 날 바라보지도 않아요. 부끄럽겠죠. 아마 내가 전혀 모르는 남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남편은 그전의 남편이 아닙니다. 희망쇼핑에서 쇼핑을 하던 사람들이 남편과 나, 명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지나칩니다.
--- p.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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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의 묘미를 한껏 느끼게 할 하성란(河成蘭)씨의 두번째 소설집 옆집 여자가 나왔다. 이미 첫소설집 루빈의 술잔과 장편 식사의 즐거움에서 도시의 일상에 대한 정밀하고 깔끔한 묘사로 문단의 많은 주목을 받은 저자는, 이번 작품집에서 도시의 단자화된 삶에 대한 더욱 깊어진 성찰과 더욱 따뜻해진 응시를 보여주고 있다. 도시적 정서와 영상 이미지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신세대문학`의 여러 긍정적인 면을 공유하면서도 하성란은 따스한 삶에 대한 연민과 소설에서의 깊은 감동을 보여주는, 한국의 훌륭한 소설전통과 맥이 닿아 있는 드문 작가이다.
저자가 이번 소설집에서 주로 그리고 있는 인물은 전업주부, 세일즈맨, 매장의 감시요원, 횟집 주방장 등 정체성을 잃어가거나 도시문화의 중심에서 소외된 현대인들이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이 소외감을 느끼거나 자아상실을 경험할 때란 곧 도시문화의 중심과 부닥칠 때이다. 표제작 '옆집 여자'에서 전업주부는 유능한 은행원인 남편과 옆집의 매력적이고 발랄한 사무직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 기억력을 상실해가고 남편과 아이를 `옆집 여자`에게 빼앗길 처지에 빠지게 된다. 액자소설의 형태를 띤 '깃발'에서 자동차 세일즈맨은 팔아야 할 외제승용차를 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짝사랑하던 광고모델한테서 환심을 사는 데도 실패해 결국 전봇대 디딤쇠에 옷가지를 걸어놓고 맨 꼭대기에는 팬티를 걸어놓고 사라진다. 광고모델과 외제승용차는 물신화의 표상으로, 전봇대 꼭대기에 깃발처럼 걸린 팬티는 그것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당신의 백미러'에서 주인공 남자는 명동 한복판에 있는 `코스모스 종합상가`의 `보조 백미러`로 일한다. 감시카메라가 비추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살펴서 도난을 막아야 하는 남자는 단지 기계의 보조에 불과하지만 여자 마술사를 만나 그녀의 보조역을 하면서 탈주를 시도한다. 그러나 가정을 이룸으로써 비인간적인 현실에서 벗어나려 한 남자의 탈주는 성공하지 못한다. `보조 백미러`였던 남자는 자동차 사고가 나면서 마술사가 실제로는 남자임을 알게 된다. '양파'의 횟집 `남자`는, 자신이 깔고 앉은 신생아가 죽었다고 오인한 여자를 만나 동해안으로 같이 도피의 길에 오른다. 남자는 쫓기고 있는 여자와 만나면서 `가족`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그러나 깔고 앉은 신생아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자가 알게 되면서 여자는 남자를 떠나려 하고 남자의 차는 철골구조물을 들이받아 두 사람 모두 죽고 마는 이 소설은 마음으로 소통이 되지 못하는 현대인의 비극을 그려내었다. 이밖에도 단자화된 도시인의 소통욕구를 따뜻하게 그려낸 99년 동인문학상 수상작 '곰팡이꽃'을 비롯해, 부조리한 사회에 부딪쳐 성장을 유예하거나 육체의 상해를 입는 '악몽' '촛농 날개', 건물주와 입주자들이 서로 상대방을 죽일 계획을 꾸미고 단합대회를 떠나면서 `김치` 하고 사진을 찍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재미있게 그린 '즐거운 소풍', 속물적인 어른의 세계를 미리 알아버린 여학생의 일탈을 26세의 남성이 방조하고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데 이용하려고 하는 이야기인 '올콩' 등 9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로서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