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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사람의 줄무늬는 몸 안에 있다 ◆ 5 프롤로그 새로운 커뮤니티를 향하여! ◆ 14 1부 ‘시詩의 힘’을 신뢰하자 천상병 시와 자발적 가난의 윤리학 ◆ 19 ‘시詩의 힘’을 신뢰하자 ◆ 45 성장 신화의 붕괴, 절망의 꽃말들 ◆ 53 현장의 시, 시의 현장 ◆ 71 시인은 국익을 말하지 않는다 ◆ 87 아픈 십 대와 소통하는 문학의 힘 ◆ 97 칠곡에는 ‘문학 할매’들이 산다 ◆ 111 2부 시대의 우울과 실천인문학 너와 나의 안녕한 마음생태학을 위하여 ◆ 133 시대의 우울과 예술 ◆ 140 미끄럼틀 사회와 평화인문학 ◆ 150 먹고사는 문제와 인문학 ◆ 168 실천인문학과 문학/글쓰기 교육 ◆ 186 3부 나우토피아를 위하여 우리는 미적 공화국의 시민들이다 ◆ 205 빅 브라더 ‘e나라도움’ ◆ 210 한국 생활 매뉴얼을 넘어, 기쁨의 정치학으로 ◆ 214 어린 미적 인간을 위하여 ◆ 222 문학장 바깥에서 이우(異友)를 만나다 ◆ 234 노년의 양식에 관하여 ◆ 248 꿈꾸는 책들의 나우토피아를 위하여 ◆ 269 나를 위한 시간 ◆ 288 덴마크어 ‘휘게’를 아십니까? ◆ 296 언어의 감옥에서, 해방의 언어를 꿈꾸다 ◆ 304 나는 4월 16일을 살고 있다 ◆ 312 에필로그 터 무늬 있는 ‘비빌리힐스’를 꿈꾸며 ◆ 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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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육체라는 게 얼마나 나약합니까? 우리가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고문과 매질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봐요. 불지 마라고 해도 불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천상병 시인은 그런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자기 바깥에 대한 관심과 사유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시인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안쪽’만 보려는 모습이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바깥’을 봐야 하는데, 문을 열고 바깥에 나가 누군가를 만나 인간적인 접촉을 해야 하는데, 그러질 않잖아요. 이런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여름 곤충” 한 마리, 즉 자신의 바깥에 있는 사물과 소통하고자 한 시인의 태도는 어쩌면 무심한 듯했겠지만 무심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죠. ―「천상병 시와 자발적 가난의 윤리학」 --- p.26 시는 그렇게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욕망을 바꾸었고, 감수성 자체를 바꾸며, 사회를 바꾸었던 것이다. 안드레 블첵은 위 글에서 욕망과 감수성을 바꾼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나를 바꾸고, 우리 사회를 바꾸는 데 있어서 욕망과 감수성을 바꾸는 공부가 왜 중요한지를 우리가 깨닫게 된다면 나와 당신은 다른 사회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안드레 블첵은 말한다. “만약 한 편의 좋은 시가 번쩍이는 붉은색 ‘페라리’보다도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찬미를 받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도둑질을 멈추고 시를 쓰기 시작할 것이다”라고. 나와 당신은 블첵이 쓴 이 문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결국, 시의 힘이란 우리 안의 어떤 척도를 바꾸는 힘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시(詩)의 힘’을 신뢰하자」 --- p.49~50 우리는 빠른 삶을 살수록 자신의 리듬을 잃고, 이웃과 의미 있는 서사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저마다 정보 과부하와 과잉 커뮤니케이션에 시달리며 ‘번아웃 신드롬burn out syndrome’을 온몸으로 ‘앓고’ 있다. 모든 인간이 노동력으로 평가되는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자원 외에도 ‘전혀 다른 것’을 우리 스스로 욕망하려는 시선의 전환과 더불어 실질적인 자립의 문화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 자립의 삶에서 형성되는 건강한 습관habit은 한 장소에서 오래도록 거주habitat할 때 형성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우리 삶에서 편의 설비가 적어야 사람살이에서 표현되는 창의력은 물론이요, 자립하는 몸과 마음의 상태가 길러진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시대의 우울과 예술」 --- p.148~149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나의 희망을 상대방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은 그 유토피아의 독재자이다”(한나 아렌트)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이성의 자기 배반 내지는 동일성의 폭력적 속성을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계몽하지 않는 계몽 혹은 즐거운 계몽의 태도와 관점이 요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것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단히 성찰하며 실천하는 행동주의에서 검증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 읽기와 글쓰기가 나와 우리들의 내면과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작은 접점을 만들 수 있다면, 아마도 그런 경지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먹고사는 문제와 인문학」 --- p.183 실제 시는 지금 당장의 현실을 바꾸는 데는 무력했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를 바꾸는 진짜 힘은 시의 힘을 의미하는 이야기와 상징의 힘에서 촉발되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결국, 시의 힘이란 우리 안의 어떤 척도를 바꾸는 힘으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문학장 바깥에서 이우(異友)를 만나다」 --- p.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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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음으로써 갖게 되는 힘
‘1부 ‘시詩의 힘’을 신뢰하자’에서는 특히 그것이 두드러지는데, 천상병 시인의 시와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diaspora 지식인 서경식이” 지난 2015년에 출간된 『시의 힘』에 기대어 시가 우리의 삶과 현실에서 갖는 의미와 힘을 확인해나간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목적의식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쓸모없음의 가치”를 통해서 진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쓸모없음”이 시의 무기력을 가리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천상병의 시를 ‘육체성’과 ‘장소’ 그리고 ‘삶의 시화詩化’라는 키워드로 읽어내면서 천상병의 시가 “효율성과 실용성이 숭배되는 사회에서 ‘쓸모없음의 쓸모’의 시학과 윤리학을 추구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천상병의 시를 발판 삼아 저자는 오늘날 시의 상황을 비판하는 데에까지 나아가는데 그 질문은 어느새 근원적인 곳에 이르고 만다. “저는 지금의 문학은 어쩌면 문학의 문학성 자체가 문제이고, 지금의 예술은 예술의 예술성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고 봅니다.”(39) 이 주장은 구체적 삶과 유리된 작금의 문학을 겨냥하면서 선험적인 “문학성”이나 “예술성”이란 허상이 아니겠느냐고 묻는 것처럼 들린다. 이런 질문을 하는 저자의 문학적, 윤리적 자세는 서경식의 『시의 힘』을 읽으면서도 두드러진다. 서경식이 말하는 시의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문형의 희망’이다. 다시 말해 국가의 힘과 자본의 논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상상력의 힘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 서경식이 한국어판 서문에서 무력한 “패배로 끝난 저항이 시가 되었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시대, 또 다른 장소의 ‘저항’을 격려한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의 힘이란 지금 당장의 효용성을 넘어서는 차원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_「‘시(詩)의 힘’을 신뢰하자」 중 ‘시의 힘’이란 결국 현존하는 가치를 의문의 처형대 위에 올려놓고 그것이 가진 의미를 다시 질문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질문은 결국 삶의 지형을 재편성하면서 직접적으로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하는 것이 된다. 저자가 안드레 블첵의 이런 말을 인용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어떤 시들은 강철로 쓰여진다.” 어쩌면 저자가 다른 인문학교육과 예술운동의 영역으로까지 나아가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은, ‘시의 힘’을 확장하려는 기획인지도 모른다. 인문학교육으로서의 ‘문학/글쓰기 교육’이 “자기와의 소통, 타인과의 소통, 사회를 포함한 더 큰 공동체와의 소통을 통하여 이른바 ‘마음의 사회화’ 과정을 스스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치열한 학습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등장한다. “탈공동체 혹은 반공동체적인 관점과 태도를 마치 ‘쿨한’ 것으로 착각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미끄럼틀 사회와 평화인문학」) “모든 인간이 노동력으로 평가되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실존적 불안과 우울인데, 이것은 “시대”가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대”는 “긍정의 심리학과 힐링 그리고 멘토 열풍” 같은 “현대판 주술”을 동시에 처방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명료해 보이지 않지만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서도 예술의 역할이 있을 수 있는데, 소극적인 의미의 창작 활동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예술의 ‘활동’이 있다. 저자는 “북유럽 덴마크 코펜하겐에 소재한 ‘자유도시’ 크리스티아니아”의 사례를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동체 형성 과정에서 극단 솔보아이엔을 비롯한 예술가들의 빼어난 활약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1974년 겨울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분장한 한 무리가 코펜하겐의 백화점을 찾아가 선반의 물건들을 ‘재분배’한 퍼포먼스는 이들에 대한 덴마크인들의 호감 어린 시선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_「시대의 우울과 예술」 중 ‘비빌 언덕’을 위하여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비빌리힐스’에 대해 말한다. “우리 사는 삶터가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비빌 언덕’이 되고,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오랜 믿음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유구한 에토스가 아닐까.”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비빌 언덕’이” 되려면 구체적인 ‘터전’이 있어야 한다. ‘시의 힘’을 강조했지만, 그 ‘시의 힘’이 추상적인 것이 되지 않으려면 시가 ‘터전’에 대한 상상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저자인 고영직이 이 책에서 핵심 키워드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구체적인 삶의 ‘터전’과 ‘시의 힘’이다. 이 두 가지가 종합된 것이 “터 무늬”일 것이다. 즉 ‘터전’에도 ‘시’가 있어야 하고 ‘시’에게도 ‘터전’(에 대한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더 많은 민주주의는 경제적 가치만 강조되는 체제에서 탈출해 다른 장소와 다른 삶을 구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에 저자인 고영직은 ‘시의 힘’을 믿으며 나아가 ‘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시가 터전을 만났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인문(人文/人紋)적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