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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마을 하늘 어금니 여름 빗속에서 시퍼런 테러리스트 기다릴 것도 없는 8월이라며 잃어버린 계절 가을 여행 창공의 중심에서 조어(鳥語)의 가을 전설이문(傳說異聞) 희미한 전언 두개의 옥수수 녹스는 풍경 여름 그후 겨울 이토록 멀어져버리고 나뭇잎 한장 뛰다 겨울의 보금자리 구멍 수국의 싹 사람은 흩어지고, 쌓인다 그림자는 자라고 봄 이 무명(無明)의 시각을 귀향 바람에 날려 저 멀리 목련 이어지다 언젠가 누군가 또 4월이여, 먼 날이여 봄에 오지 않게 된 것들 시인의 말 옮긴이의 말 |
金時鐘
이진경,본명 : 박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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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소리 내야 할 목소리 밑바닥에서 배어나오는 계절. 생각할수록 눈앞이 아찔하여 조용히 눈 감아야 하는 마음의 밑바닥 계절. 누구인지 입에 올리지 않고 남몰래 가슴에 품는 추모의 계절. (…) 여름은 계절의 시작이다. 어떤 색도 바래지고 마는 터질 듯이 하얀 헐레이션의 계절. ---「여름」 중에서 고향도 연고도 잃은 새가 쓰레기밖에 주울 게 없는 일본에서 나의 말을 모이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점점 까악까악 외칠 수밖에 없는 새가 되어가고 있다. 곧 입술이 붉게 물들 것이다. 묵묵히 있을 뿐인 새를 올려다보니 검은 그림자가 그날 그대로 무심하게 나를 보고 있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자는 언제나 빛 속에서 검어진다 ---「조어(鳥語)의 가을」 중에서 진흙처럼 녹아 있고 싶은 잠이다. 떨어져 가라앉아 밑바닥에서 얼어붙어 그대로 굳어버리고 싶은 밤이기도 하다. 정처 없는 거처의 등받이가 멋대로 삐걱거리고 교신 없는 화면이 여전히 빛을 발하며 명멸한다. (…) 자멸이다. 어떻게 되든 덤벼드는 것이다. 하이에나가 희미하게 눈을 뜬다. 철책 우리 안에 웅크린 자신이 보인다. 빠져나가려고 해도 나갈 수 없는 남자에게 이미 추방의 시간이 닥쳐오고 있다. ---「겨울의 보금자리」 중에서 소생하는 계절에 올 것이 오지 않는다. 필 것이 피지 않는다. 날아드는 것도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 그래도 화창하게 바람은 건너가 끝나가는 무언가가 봄 안개 저편에서 어른거린다. 이렇게 우리는 매일 무언가 잃어버리고 있다. 결코 미미하다 할 수 없다. 저 멀리 분명히 끝나가는 것이 보인다. ---「봄에 오지 않게 된 것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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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종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을 읽는 나의 서정과 대면하는 일이다 『잃어버린 계절』은 2010년에 출간된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으로, 계절별로 8편씩 모두 32편의 시가 실려 있다. 제41회 타까미준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시집은 원서에 붙은 ‘사시(四時) 시집’이라는 부제만 보면 사계절을 제재로 하여 자연을 노래하는 서정시로 읽히기 쉽다. 그러나 실제 안에 담긴 것은 자연을 찬미하는 부드럽고 평화로운 서정이 아니다. 시인은 “삶의 밑바닥에 앙금처럼”(「구멍」) 남은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살려내어 자연과 인간을 다른 무엇으로 대면하고자 비극적 삶과 타인의 고통을 성찰하는 서정, 곧 ‘서정에 반하는 서정’(옮긴이의 말)에 가닿는다. 여기서 우리는 평생 서정과 대결해온 시인이 이 시집의 제목을 ‘김시종 서정 시집’이라고 하려다 민망해서 그만두었다는 말을 또렷이 이해해야 한다. 시인은 녹슬어가는 일상의 시간을 바림질하며 빛바랜 영상으로 남아 있는 ‘멈춘 시간’들을 현재 속으로 불러내어 “스스로 시간의 출구”(「녹스는 풍경」)가 되어간다. 돌아갈 곳을 잃었으나 “어디서 살든 죽지 않는 한 사람은 살게 마련이다”(「잃어버린 계절」)라는 시인의 외침은 자못 처연하게 들려온다. 갈 곳 없는 삶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피고 질 것이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나라일지라도/도달할 수는 있을 터”(「귀향」), 그리하여 시인은 고요한 마음의 지평, “끝없는 꿈의 대지”(「여름 그후」)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구순(九旬)의 나이에 “지금 나는/부도덕할 만큼 살찐 놈”(「어금니」)이라는 깨달음 속에서 시인은 “이제야 알게 된 나의 어리석은 60년”(「여름 그후」)을 곱씹어본다. 그리고 거기에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사소한 존재들에게 촉촉한 시선을 던지면서, 아득하게 멀리 있고 이제는 오지 않게 된 것들과 우리가 매일 잃어버리지만 “결코 미미하다 할 수 없”(「봄에 오지 않게 된 것들」)는 것들에 대해 쓴다. 파편처럼 깊이 박힌 쓰라린 기억들을 되새기며, 조국을 빼앗았던 식민 종주국의 언어로 시를 써온 노시인의 회한과 “누구도 밀쳐낼 수 없는/깊은 우수”(「마을」)가 서린 시들이 오래도록 가슴을 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