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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여는 글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 위한 5개의 키워드 제1권 제2권 제3권 제4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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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해석일 뿐이라는 니체의 말은 이제는 오히려 진부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니체의 다원주의는 모든 해석을 인정하자는 무분별한 상대주의와 그것의 필연적 귀결인 허무주의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게 다원성 안에서 타자와의 평화적 공존 상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원성은 전쟁을 동반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반동적인 억압의 상태(여기에 기독교 도덕, 원한 감정, 삶에의 의지, 진리에의 의지가 있습니다)이거나 창조적인 전쟁의 상태일 뿐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전쟁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전쟁입니다. 그것은 상대를 말살시키고자 하는 전쟁과는 다른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은 모두 자신을 극복하는 힘의 흘러넘침에 몸을 내맡겨야 합니다.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타락입니다. 니체의 관점주의는 상대주의적 공존이 아닌, 전쟁의 상태로 우리를 끌고 갑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바로 이러한 전쟁의 기록입니다.
--- p.5 니체가 진단한 당시 유럽의 병증은 이 창조와 파괴를 부정하는 것이 원인이 됩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에서부터, 그리고 종교적 플라톤주의인 기독교에서부터 유럽적 사유의 역사 속에 변함없이 지속되는 유일신, 진리, 이데아, 이념, 주체 등은 모두 변화를 거부하고 안정된 상태로 머물러 있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투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여기’의 삶을 부정하는 이념으로 작용합니다. 이 병든 유럽 문화에 대한 진단으로 제시되는 개념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파괴, 몰락, 변화, 생성 등의 가치입니다. 니체가 당대의 시대, 그리고 유럽 역사 전체를 데카당의 시대, 이를테면 몰락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파괴에 따른 생성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53 “신은 죽었다”라는 광인의 외침은 니체의 수많은 문장 중 가장 유명한 문장일 겁니다. 이 짧은 문장으로 니체는 서구의 형이상학과 종교 전체를 대담하게 전복한 철학자가 된 것입니다. 신이 죽었다면, 더 이상 절대적이고 초월론적 지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입니다. 그는 신의 죽음을 선언함으로써 진리, 불변, 완전성, 초월성 등 철학과 종 교의 전통적 이상들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신의 죽음으로 인해 절대적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흔한 이해가 아닙니다. --- p.56 기존의 세계, 가치, 의무를 거부하는 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대안을 요구받습니다. 그러한 대안이 없다면, 기존의 세계에 대한 저항과 반박은 오히려 위험한 것, 의심스러운 것, 반대를 위한 무의미한 반대, 즉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직 파괴만 일삼는 비생산적 행위로 취급됩니다. 하지만 사자의 정신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 표면적으로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행위야말로 가장 생산적인 행위의 토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대안적 세계의 전망이 있기 때문에 기존의 세계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합리적 대안이 있기 때문에 현재를 거부하는 것은 안전한 토대 속에 머물고자 하는 약한 자들의 생리일 뿐입니다. 합리적 대안이란 기존의 세계의 가치와 구조 속에서만 합리 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p.81 니체가 토리노에서 말의 목을 끌어안으며 쓰러진 이후 10년간 독일은 니체를 자신의 군국주의와 민족적 패권주의를 지지하는 철학자로 오독했고, 니체의 명성은 오히려 그의 사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지지한 사람들에 의해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니체가 누구보다 독일적 민족주의와 군국주의화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어려운 논증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민족주의와 군국주의는 니체가 경멸해 마지않는 무리 도덕, 노예 도덕의 소산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p.126 선악의 윤리적 판단의 제거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비윤리적 행위의 무한정한 허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윤리라고 불리어온 것에 대한 반성과 스스로에 대한 무한 책임을 요구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비윤리의 윤리라고 부를 만한 것입니다. 친구이자 적이라는 말을 통해 차라투스트라는 타자에게 자신과 동일해지기를 요청하지 않고, 자신과 같은 높이를, 위대함을 요구합니다. 공동체의 진정한 이상은 동일화된 타자와 거주하는 전체주의적 사회가 아니라, 타자와 진정 공존하는 사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친구가 적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우정에 관한 가르침이야말로 진정 우정이라고 불릴 만한 것에 대한 가장 정확한 설명일 것입니다. --- p.152 차라투스트라가 베푸는 덕이란, 그 덕을 받은 이가 완성하는 것입니다. 즉 받은 이가 다시 ‘덕을 베푸는 자’가 되기 전에는 그것은 아직 완전한 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증여는 교환 관계를 통해 완성되는 증여가 아니라, 교환 관계에서의 해방을 통해 증여가 완성되는 덕입니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복음’이며, 말 그대로 ‘베푸는’ 것의 의미이고, 이 베풂이 결코 동정과 연민이 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 p.199 교환 관계를 은폐하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하나의 사회적 제도로 삼았다는 데 가톨릭의 취약함이 있습니다. 개신교의 믿음은 훨씬 더 은밀하게 그 교환 관계를 설정합니다. 신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구원에 값을 매기는 데 반대한 루터는 결코 교환이라는 근원적 구원의 경제학/형식에 반대한 게 아닙니다. 그가 반대한 것은 그러한 교환으로 인간이 내놓아야 할 대가가 일정한 금액이라는 한정된 대가인 점이었습니다. 믿음은 교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개신교는 신과의 교환에서 인간이 제시해야 할 판돈을 끝없이 올려놓습니다. 그 판돈이 인간의 전 생애여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의 판돈이 아니고서는 신과의 거래란 감히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를 통해 루터는 인간을 신 앞에 완전히 바치고 맙니다. --- p.234 모든 부정의 끝에서 니체는 극적으로 전환하여, 세계를 긍정합니다. 이 세계의 긍정은 개별화의 긍정이며, 현존재의 긍정이고, 고통의 긍정입니다. 긍정이란 수동적인 수용이나 운명에의 순응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용기이자 도전입니다. 감수한다는 것은 도피와 다릅니다. 쇼펜하우어가 고통에서 도피하고자 했다면, 니체는 고통을 감수하고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니체의 ‘운명에의 사랑’에서 드러난 극적 전환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 p.310~311 지금 현재 하고자 하는 것이 영원히 반복되기를 원하는 것, 이것은 영원회귀의 인식이 아니라 영원회귀의 의지입니다. 운명에의 사랑은 현재에 대한 긍정이자, 그것이 뻗어나가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긍정이라는 점에서 이중의 긍정이며, 우연성을 긍정함과 동시에 필연성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또한 이중의 긍정입니다. 이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운명의 돌, 운명의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와 마찬가지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돌을 기꺼이 던지고자 합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몸을 부순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 p.343~344 우리는 이제 우리의 몸이 병들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연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극심한 고통을, 구역질을 느낍니다. 그리고 실은, 니체의 철학이 우리를 제대로 인도하는 부분은 바로 여기까지입니다. 니체의 철학은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도록 만들 뿐입니다. 어쩌면 니체는 가장 무책임한 철학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철학이란 것이 세계를 행복하고 즐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했던가요. --- p.377~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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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니체가 말하는 ‘거룩한 긍정’과 ‘가혹한 사랑’의 철학 19세기를 살다간 이들 가운데 니체(F. W. Nietzsche, 1844~1900)처럼 21세기에도 화제가 되고 활발히 읽히는 저자가 얼마나 있을까. 더구나 그가 사상의 역사에 그저 발자취를 남긴 정도가 아니라 철학의 운명을 바꾸었다는 말을 듣는 존재라면? 현대를 대표하는 철학자 질 들뢰즈가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 덕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썼을 만큼 니체의 영향력과 명성은 우리 시대에도 막강하다. 당연히 니체와 그의 사상에 관한 책도 넘치도록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전문 연구자가 아닌 일반 독자가 니체의 철학에 접근하는 데 길잡이로 삼을 만한 책들은 생각보다 드물다. 니체의 주저로 꼽히지만 그 난해함과 독특한 형식, 시적인 문체 탓에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미학자이자 철학자인 김동국의 첫 단독 저서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는 바로 그 문제적인 저작을 철저하고 충실하게 읽어내는 데 바쳐진 책이다. 저자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모든 장을 순서대로 꼼꼼히 읽어나가면서 이 책을 통해 니체가 말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다. 그 과정에서 니체의 다른 저서들이 풍부히 인용되며, 니체 사상의 핵심 주제들과 요소들 - 흔히 ‘초인’이라고 잘못 번역되던 위버멘쉬Ubermensch, 힘에의 의지, 신의 죽음,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운명애(amor fati), 영원회귀 등이 자세하게 해석되고 조명 받는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니체의 대표작에 대한 정밀한 독서이면서 그를 바탕으로 니체 사상의 정수에 다가가려는 의욕적인 시도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출발점은 철학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을 위해 작성된 강연 원고다. 그래서 책 전체가 대화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점은 수월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상가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초대받은 독자의 낯섦과 어색함을 누그러뜨리는 데 기여할 테지만,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는 니체 사상을 대중에게 간편하게 해설하려는 종류의 책과 거리가 멀다. 저자의 관심은 니체의 사상을 알기 쉽게 요약하고 정리해서 마치 통조림처럼 독자가 섭취하기 좋게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가 그의 시대에 맞씨름했던 문제들의 정체와 소재지와 연원을 밝힘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맥락 안에서 그 문제들과 대결하도록 만드는 데 가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신을 죽이지 않았다 그것을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니체가 오래도록 감수해온 오해를 바로잡는 일이다. 니체는 누구보다 많은 오해에 휩싸인 철학자였고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니체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신의 죽음’이라는 명제는 그 대표적인 증례다. 이 명제는 ‘신은 없다’는 무신론의 당돌한 선언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니체를 무엄하게 신을 살해한 자로 규정하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니체가 이 명제를 통해 제기하려 한 것은 단순한 무신론자의 자기 확인이 아니라 니체의 선언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이루어진 신의 죽음, 곧 예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한, 또 그 죽음 이후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믿음을 바치고 존재를 의탁할 절대자가 이미 죽었다면, 그것도 (예수의 죽음이 보여주듯이) 인간의 손에 살해되었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모든 게 헛되고 헛되다는 허무주의이기 십상이다. 반면 니체는 신이 죽었다면 신의 아들인 인간은 스스로 인간이자 신으로서 살아가야 하지 않는가고 반문하면서 이 허무주의에 맞선다. 인간 스스로 신의 자리를 대신한 삶,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삶’을 표상하는 이름이 바로 위버멘쉬다. 곧 절대적 진리, 불변의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서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통해 스스로와 세상을 창조하는 신-인간이 위버멘쉬다. 그 위버멘쉬로서의 삶이(또는 그것만이) 허무주의, 삶에 대한 부정, 인간의 자기 부정에 맞서는 길이라는 것이 니체 사상의 한복판에 있는 주장이자 권고임을 저자는 설득력 있게 밝혀준다. ‘표면’에 깃드는 여성의 진리 니체에 대한 숱한 오해를 낳은 또 하나의 원천은 여성에 대한 니체의 관점이다. 저자도 인정하듯이 니체의 책에서는 여성에 대한 혐오나 경멸을 드러내는 듯한 구절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도 “남성은 여성을 가장 위험한 장난감으로 원하는 것이다”, “남성은 전쟁을 위해 그리고 여성은 전사의 회복을 위해 양육되어야 한다”, “남성들의 행복은 이것이다: 나는 원한다. 여성들의 행복은 이것이다: 그는 원한다”(174~175쪽) 같은 문장들이 나온다. 이를 두고 니체를 여성 혐오자, 반여성주의자로 낙인찍으려는 시도들이 있어왔지만 저자는 여기에 단연코 반대한다. 저자가 니체를 저러한 혐의에서 구출하는 작업은 통념의 전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컨대 니체는 “표면적인 것은 여성의 기질이다, 얕은 물에서 격렬히 움직이는 살갗이다. 그러나 남성의 기질은 깊고, 그 흐름은 땅 밑에서 소리 내며 흐른다”(177쪽)고 말한다. 우리는 대개 ‘표면적인 것’을 얄팍함 또는 피상성과, ‘깊이’를 고상한 가치와 연결 짓지만, 저자는 여기서 니체가 이러한 통념을 뒤집고 있다고 해석한다. 곧 깊이는 표면을 통해 드러나지 않고서는 허상일 뿐이며, 표면적인 것이야말로 니체가 긍정한 세계였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오, 그리스인들이여! 그들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표피, 주름, 피부에 용감하게 머물며 가상을 숭배하고 형태, 음, 말 등 가상의 올림포스 전체를 믿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178쪽)고 쓸 수 있었던 것이다. 표면적인 것을 상징하는 여성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진리에 가까이 있게 된다. 니체에게 여성은 곧 그러한 진리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여성적 진리란, 진리가 아닌 진리, 곧 비진리로서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표면이란 또한 차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생동하며 생성과 파괴를 반복하는 세계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그 표면은 마치 끊임없이 움직이는 대기의 가상인 구름과도 같은 것입니다. 세계는 마치 구름처럼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여성은 그 변화하는 세계에 복종할 줄 압니다. 니체가 여성과 관련짓는 ‘복종’은 이러한 세계 자체에 대한 것으로, 사회적 위계나 통치와는 무관한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성들은 세계에 복종함으로써 표면에 머무르면서 변화와 차이를 이해합니다. 남성이 끊임없는 동일성으로 사물의 변화를 제거하고자 할 때 여성은 그러한 변화에 복종하며 표면에 머무는 것입니다. (178~179쪽) 저자는 여기서 니체의 한계를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니체는 당대 여성들이 요구한 ‘여성 해방’을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억압적 질서, 노예적 노동에 동참할 권리에 대한 주장이라고 여겨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저자는 이를 니체가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독립이 갖는 사회적·실존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니체의 사유 속에서 여성이란 분명 긍정성의 기호이지 부정성의 기호가 아니라는 점에 변함이 없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주인으로서 삶을 사랑하는 법 당대의 민주주의적 흐름, 평등주의, ‘대중’에 대한 니체의 부정적 태도 또한 니체 철학을 오해와 논란 속에 던져 넣은 요인이다. 저자는 니체의 이러한 면모가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와 그 구조 안에서의 차별에 대한 옹호로 오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평등주의에 대한 니체의 반대는 그것이 인간을 다른 인간과 동일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평등주의는 인간이 스스로를 고양시키고 자신만의 높이를 얻는 일, 더욱더 위대해지고 운명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고자 하는 힘을 가로막을 뿐이라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위버멘쉬, 또는 자유정신에 대한 방해물로 여긴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격렬한 비판도 평등주의에 대한 관점에서 멀리 있지 않다. 니체에게 기독교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죄의식을 심어주고(원죄) 내세를 동경하도록 가르치는 가운데 지금 이곳의 삶을 부정하고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신념이자 제도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사유, 그가 가르치고 권하는 것은 평등주의나 기독교의 가르침과 정반대 편에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변화와 생성, 창조를 긍정하고 세계와 사물의 자연스러운 충동에 능동적으로 몸을 맡기는 일(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다)이며, 영원히 같으면서도 다르게 반복되는 ‘지금 이 순간’(‘영원회귀’)을 적극적으로 살아내는 것, 이를 통해 스스로의 운명 자체를 사랑하는 것(‘운명애’)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그 어떤 시련과 가혹함도 기꺼이 긍정하면서 삶을 사랑할 것을 권장한다는 점에서 니체의 사상은 ‘거룩한 긍정’의 철학이고 ‘가혹한 사랑’의 철학이다. 철학자들이 관조적으로 이야기하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내 앞의 삶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의 대답을 철학에서 구하려는 독자라면 이것만으로도 니체의 사상을 만나야 할 이유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는 그 행복한 만남의 중매자가 되는 데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