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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umber
Error - Code 흐드러지다 거울 속의 풍경 I am a nuller 세 개의 밀랍판 Patch - Work 아킬레스와 거북이 풍경 속의 거울 시간 여행 Code Number The Number 작품해설/조형래 너의 얼굴로 돌아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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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람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행동하면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우연히 사랑에 빠져 놓고 뒤늦게 운명의 증거를 찾아내느라 바빠지는 연인들처럼. 그럴 리가. 그날 그가 백화점에 간 것은 이번만큼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긋지긋한 망각의 부채에서 탈출하자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이를테면 기억의 카드깡이랄까. 기억 불량자의 이 기억으로 저 기억 돌려 막기. --- pp.14-15
무엇보다 나는, 그들이 나를, 숫자로 부르는 게 좋다. 한때는 나에게도 이름이라는 게 있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름이었다. 중학교 국어 선생님은 말했다. 자주 쓰이는 단어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단어는 사라지게 된다고. 그걸 사어(死語)라고 한다고. --- p.43 나에게 작품이란 마지막 희망이다. 내가 나에게 맞는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아비어미도 모르는 그따위 주민등록 이름 말고, 아무도 모르는 코드네임 말고, 대대로 회자될 진짜 내 이름. 잡히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이름 없이 죽는 거다. 나는 잡히지도, 이름 없이 죽지도 않을 거다. 처음에는 너도, 숫자에 불과했다. --- p.45 저공비행을 하지 않는 독수리는 독수리라고 할 수 없다. 가장 낮게 날 수 있는 자가 하늘을 지배하는 법이다. 더구나 오늘의 살인에는 타깃이 있다. 그녀는 보잘것없지만 꼭 필요한 사람, 중심보다 중요한 주변, 보이지 않는 핵심이자 ‘넘버’의 거멀못이다. 그녀는 시초로서의 영이자, 존재하지 않는 일이고, 건반과 건반 사이에 있는 모든 음의 시작이자, 악보로 존재하는 어떤 음들의 종말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죽음은 하나의 숫자로 환원될 수는 없다. 일단 죽고 나면 그녀는 유일하고도 영원한 존재가 될 테니까. --- p.53 과거라는 유리창이 통째로 깨어지자 모든 기억의 조각들이 흉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사소한 기억을 무서워하는 버릇이 새겼다. --- p.74 뭔가가 떠오르지 않는 건 기억상실도 아니다. 그걸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어서, 기억해 내려는 시도조차 못해야 진정한 망각이라 할 만하지. 그 애가 살해당한 무렵의 기억도 나에게는 어둠이었다. 어디까지가 어둠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어둠. 그 애가 아닌 다른 사람을 죽였다 해도 놀라울 이유는 없을 것 같았지. --- p.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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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기억을 완전히 갖게 된다면,
내가 그 사람과 다르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 기억을 이식당한 채 시체 청소부가 된 남자와 타인의 기억을 조종하는 살인 호스트가 된 남자 진짜 범인을 놓고 두 사람이 펼치는 숨 막히는 추격과 충격적인 반전 ■ 노희준 식 ‘검은 소설’ 『넘버』 증권 브로커 김대현은 모델 출신의 연인 한이연의 집에서 러닝머신에 목매달린 채 난자당해 있는 그녀의 시신을 발견한다. 당혹스러운 점은 감시 카메라를 비롯한 모든 사건의 정황과 증거가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것. 더욱이 그는 이 모든 사건이 자신의 분신으로 추정되는 ‘그놈’, 박이명의 소행임을 알게 된다. 김대현은 사건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이연과 관련된 것들을 소거해 나가는 등 부심하지만 발버둥 치는 모든 행동이 그를 더욱 더 깊은 미궁으로 빠뜨린다. 그러던 어느 날 김대현의 신분을 자처한 그놈이 이연의 살인범으로 자수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는 일이 벌어진다. 신분마저 완벽하게 가로채인 그는 타인으로 행세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이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김대현은 타인이 되어야만 하는데……. 『넘버』가 기존의 범죄 추리소설과 다른 점은 여기에 대현을 궁지로 내몬 박이명이 들려주는 고백 이야기가 병행한다는 것이다. 살인에 관한 한 예술가적 자의식을 지닌 그의 이야기는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주는 듯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아슬아슬하게 핵심을 비껴 나간다. 거의 다 왔다는 생각이 들 무렵, 어김없이 예외 없이 추측은 빗나간다. 심지어 그놈의 고백은 많은 부분에서 대현의 삶과 교차된다. 대현보다 대현을 더 많이 아는 것 같기도 한 그는 갈수록 전지전능한 존재처럼 보인다. ■ 다중 인격이 만들어 내는 교란 완벽하게 자신의 신분을 빼앗은 압도적 타자 앞에서 김대현은 숫자와 기억의 조력 없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의 고유한 실체가 무엇인지 탐문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을 가장하는 박이명이 되어 보는 것. 박이명이 된 김대현은 박이명의 살인을 막기 위해 박이명보다 먼저 움직이면서 그를 통찰하고 예측한다. 하지만 박이명을 조사하면 할수록 김대현은 자신이 정말로 박이명이 되어 가는 것처럼 느낀다. 명확하던 경계가 흐려지고 분명하던 삶은 허점투성이로 변한다. 박이명에 대한 추리를 통해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면 그동안 제대로 인식한 적 없었던 자신의 욕망밖에 없다. 다중 인격이 만들어 내는 교란은 노희준이 작품에서 일관되게 추구해 온 있는 장치다. 『킬러리스트』의 주희는 줄리일 뿐만 아니라 설희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오아메 유키히메이자 희수이기도 한 식이다. 이 모든 것이 전지전능해 보이는 그놈이 조장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가 김대현과 같은 것을 욕망하는 분신인 것인지, 두 사람의 대결은 끝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범죄의 나폴레옹 범죄 세계의 나폴레옹. 셜록홈즈가 적수 모리어티의 범죄 연출 능력에 탄복하며 썼던 이 표현을 문학평론가 조형래는 노희준을 수식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범죄 이야기를 정교하게 짜 내는 노희준의 능력은 단연 독보적이다. 단편 「살아 있음에 감사하라」와 장편『킬러리스트』에서 이미 예견된 그의 능력은 『넘버』에서 절정에 달했다. 『킬러리스트』를 통해 살인자와 분석가의 욕망이 교착되는 지점에 주목한 적 있다면 『넘버』에서 노희준은 그러한 교착이 우리 삶 가까운 곳에서 어떤 형태로 진화해 나가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조정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이렇듯 노희준이 그린 넘버의 세계에서 김대현과 박이명은 서로의 욕망을 답습하며 부단히 위치를 바꾸는데, 그와 함께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상호 모방과 타인 지향이 순환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결과가 도출된다. 한편 추리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대답은 누가 죽였는지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사건의 진행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더 이상 그 물음이 유효하지 않은 지점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저마다의 답을 찾게 될 것이다. ■ 작품 해설 중에서 그러므로 ‘나/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유일하게 가능한 답변은 다음과 같은 명제다. 너는 나 그리고 나는 너. 외피라는 공백에 기입되어야 할 것은 이것인 전부다. 이것이야말로 타자의 진정한 얼굴이며 패치워크 조각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통합하는 유일무이한 가상이다. 그것은 또한 대현과 이명이라는 동일한 외피를 공유하는 쌍생아가 서로에게 그토록 구애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너’를 자신의 얼굴로 삼기 위해 그토록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주체의 보편적 숙명은 『넘버』에서 보여 주는 대현과 이명의 상호 모방을 통해 가장 치명적인 모습으로 우리 곁에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 조형래(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