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일 무한한 즐거움, 영원한 이김
2일 참으로 고운 것은 3일 생각은 그리움에서 나온다 4일 믿으면 된다 5일 하늘을 사귐[親天] 6일 터져 나가는 우주 7일 사람의 긋 8일 고난 속에서 자유에 이른다 9일 영원한 생명의 씨가 자라면 제소리가 나온다 10일 '한'과 초월적 정신 11일 참말 속에는 참뜻이 튀어 오른다 12일 새 인간의 출현 13일 언제나 유유하다 14일 현대가 당하는 비참의 원인, 세계사상의 결핍 15일 모든 문제는 '하나'다 16일 새로운 세계이상을 세워야 17일 사람은 하나님의 말숨(말씀의 숨)이 불타는 성화로(聖火爐)이다 18일 하나의 세계를 위한 총동원령 19일 사람의 정신을 살릴 참 말 20일 하나를 믿어야 21일 말씀 살음 22일 상생적 주체의 철학 23일 목숨을 말숨(말씀)으로 바꾸어야 24일 고난 속에 삶의 보화가 있다 25일 우리는 말씀의 집을 지으러 왔다 26일 가는 길이 좁고 험할수록 27일 모름지기: 모름을 꼭 지켜야 28일 역사는 돌면서 나가는 것 29일 사람이 최후까지 가지고 가는 보물 30일 전쟁이냐 새 문명이냐 31일 몸을 닦듯이 말을 닦아야 한다 |
박재순의 다른 상품
|
산을 옮기자 해서 산더러 여기서 일어나 저 바다 속으로 가거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내가 나더러 옮겨 가라고 명령을 해야 옳은 일이다. 어디로 옮겨 가란 말인가? 하나님께로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됨이다. 내가 산 같은 나를 바다같이 무한한 하나님 속에 던져 하나가 돼버리면 산을 마음대로 하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다. 믿으면 (내가 하나님과 하나 되면) 된다(물건이 나와 하나 된다). 다 됐다. (《함석헌 전집 5: 서풍의 노래》 317쪽)
하나님이 있다거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을 초월하고 아우르며, 모든 것의 속의 속에, 깊이의 깊이에 계신다고 믿어지는 이에게 가까이 가면, 그이와 하나로 되면 모든 물건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또 모든 물건들과 하나로 될 수 있다. 그러면 매임 없이 기쁘고 힘이 난다. 물건과 일에서 자유로우면 나를 맘대로 움직일 수 있고 물건과 하나로 되면 물건과 일을 제대로 이끌 수 있다. _‘1월 4일-믿으면 된다’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는 생각이 꽉 차서 절로 나오는 감동이 찬송이 되어야 하고 그 말이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참된 생각이 여물어져 하나님과 일치되는 생각을 하게끔 되어야 찬송과 기도가 필요한 것이지 그 밖에는 거짓된 것이라 필요가 없다. 기도와 찬송이 우리가 인사치레하는 것같이 하고 있으니 그것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무의미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석 유영모 어록》 28쪽) 하나님이 내 속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어서 하나님을 분명히 느끼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송이 참된 기도요 찬송이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없고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도 경험하지도 못하는데 참된 기도와 찬송이 나올 리 없다. 기도와 찬송이 그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속삭임이요 다른 사람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라면 기도, 찬송이라고 할 수 없다. _‘2월 18일-참된 기도와 찬송’에서 --- 본문 중에서 |
|
세계에 내놓을 우리의 철학가 유영모ㆍ함석헌
다석(多夕) 유영모. 동서양 철학과 기독교 사상, 천문ㆍ지리에 능통한 사상가이자 철학가였다.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10년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근무하였다. 16세에 기독교에 입문하였으나 1912년 톨스토이를 연구하면서 무교회주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1921년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였고, 이후 농사를 지으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기독교를 한국화하고, 우리말과 우리글로 독창적 사유를 한 철학가로 평가받고 있다. 1940년대부터 하루 한 끼만 먹는 생활을 하였으며, ‘세 끼를 합쳐 저녁에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이라 하였다. 1955년부터 만년까지 《다석일지》를 기록하였고, 날수로 33,200일을 살고 1981년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함석헌. 1901년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3ㆍ1 운동에 참가,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준다는 일본인 교장의 제의를 거부하고 퇴학을 당한다. 이후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평생의 스승 유영모를 만난다. 오산학교 졸업 후, 1924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1927년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했으며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1938년까지 교사로 재직한다. 〈성서조선〉에 그의 주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후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다시 출간됨)를 연재하였고 1956년부터 장준하 등의 권유로 〈사상계〉를 통해 글을 발표한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 투옥되었으며 1961년 5ㆍ16 군사정변 직후 집권군부세력에 맞서며 반독재운동에 앞장선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으며, 1979년과 1985년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추천된다. 1989년에 별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