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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겨울 | 일 년의 시작 소한 (1월 5일 무렵) | 새해 첫 다회의 아침 대한 (1월 20일 무렵) | 강하지 않아도 좋다 봄 | 어딘가에 매화가 피어 있다 입춘 (2월 4일 무렵) | 한 줄기 향기 우수 (2월 19일 무렵) | 봄은 아직 멀고 경칩 (3월 6일 무렵) | 유채꽃 필 무렵 춘분 (3월 21일 무렵) |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 청명 I (4월 5일 무렵) | 무언을 주고받다 청명 II (4월 5일 무렵) | 벚꽃, 벚꽃, 벚꽃 곡우 (4월 20일 무렵) | 꽃이 한창인데 여름 | 계절 속에 있으면 다 괜찮아 입하 (5월 5일 무렵) | 바람의 파도 소리 소만 I (5월 21일 무렵) | 장마 가까이 소만 II (5월 21일 무렵) | 연못가 망종 I (6월 5일 무렵) | 푸른 매실을 따다 망종 II (6월 5일 무렵) | 다실 속 우연의 일치 하지 (6월 21일 무렵) | 태양은 이리도 높은데 소서 I (7월 7일 무렵) |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소서 II (7월 7일 무렵) | 소나기 대서 (7월 23일 무렵) | 열기 가득한 나날 가을 |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들 입추 (8월 7일 무렵) | 매미 소리 한창이어도 처서 (8월 23일 무렵) | 마음의 시차 백로 (9월 8일 무렵) | 맑은 하늘에 아름다운 달 추분 I (9월 23일 무렵) | 꽃무릇 추분 II (9월 23일 무렵) | 가을장마 한로 (10월 8일 무렵) | 대나무 낚싯대 하나면 충분한 상강 (10월 23일 무렵) | 불의 계절로 또다시 겨울 | 계절은 다시 시작되고 입동 (11월 7일 무렵) | 동백꽃 한 송이 소설 (11월 22일 무렵) | 겨울의 소리 대설 (12월 7일 무렵) | 벌레 먹은 단풍잎 동지 (12월 22일 무렵) | 끝은 시작 나오며 |
Noriko Morishita,もりした のりこ,森下 典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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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같은 건 너무 고루해.”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다니기 시작한 그곳에, 나는 벌써 사십 년 넘게 다니고 있다. 다케다 선생님 댁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는 단독주택이다. 돌이켜보면 그 십 분 거리를,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품은 채 걷고 있었다. 생각만큼 잘되어가지 않는 일. 인간관계 고민. 장래에 대한 불안. 부모님과 집안 문제. 타인의 말로 인해 받은 상처. 작은 일에 우울해하고 일일이 상처받는 나 자신을 버거워하며, 그래도 살아가야만 하기에 한숨을 쉬면서 선생님 댁 문에 들어선다. 그러면, 졸졸졸…… 멀리서 물소리가 들려온다. 현관의 미닫이문을 끼이익, 연다. 그 순간, 숯 냄새가 훅 끼쳐온다. 어딘지 모르게 모닥불을 닮은, 살짝 싸하면서도 청결한 냄새다. 그때부터 내 안에서 조금씩 무언가가 바뀌어간다. --- p.7~8 그럴 때 나는 다도실을 비추는 빛에 넋을 빼앗긴다. 아침의 차갑고 투명하기 그지없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새 온화하고 맑은 겨울 오후의 햇살이 새하얀 장지문을 통해 들어와 다도실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한다. 나들이옷 차림을 한 여자들의 얼굴도 한결 밝아 보인다. 나는 언제나 이 청명한 겨울의 흰빛에 ‘새봄’이라는 말의 화사함이 머물고 있음을 느낀다. 여기서부터 다도실의 새로운 일 년이 시작되는 것이다……. --- p.30~31 “사회에 나가면 벽에 부딪칠 일이 많잖아. 그럴 때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훌륭해 보이기 마련인걸. 졸업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들 나다운 것을 부정하고 내가 아닌 것이 되려고 해……. 하지만 버들은 꽃이 될 수 없고, 꽃도 버들이 될 수 없어. 꽃은 어디까지나 붉게 피어나면 되는 거고, 버들은 어디까지나 푸르게 우거지면 되는 거야.” 나 역시도 몇 번이나 그런 적이 있다. 나 같은 건 착실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 장점도 없는, 시시한 인간인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다들 강하고 아름답고 빛나 보였다. 스스로를 바꾸고 싶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나를 변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런 나에게 지쳐서 녹초가 될 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끝끝내 알 수 없었다. 그런 과정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다가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런 내 성격은 변하지 않을 거야. 아무리 고민해도 바뀌지 않는 거라면, 이대로 가만히 지켜보자. 바뀌지 않는 걸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아도 돼.’ “꽃은 붉게 피면 되고, 버들은 푸르게 우거지면 돼.” 간의 그 말을 듣고,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 그날 이후로 그 문구를 좋아하게 됐다. 지금도 다른 사람이 빛나 보일 때, 내가 나답지 않은 모습이 되려고 할 때, 그 말을 떠올린다. --- p.74~75 지칠 때는 계절 안에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어딘가로 떠나지 않더라도 이 나라에서는 계절이 돌고 돈다. 십 대 소녀였을 때, 나에게 계절이란 배경으로 흐르는 단순한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계절의 순환 같은 건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가능하다면 일 년 내내 일정하게 쾌적한 온도 속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계절을 앞질러 나아갈 수도, 같은 계절에 계속 머물 수도 없다. 언제나 계절과 함께 변화하며, 한순간의 빛이나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에 마음을 가다듬고, 쏟아지는 빗소리에 몸을 맡기며 자신을 치유하기도 한다. 꽃이 피는 시기에 맞춰 인생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일도 있고, 마음속으로 결심했을 때 바람이 ‘그래!’ 하고 대답해준 적도 있다. 우리는 계절의 순환 밖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 안에 있다. 그러니 지칠 때는 흐름 속에 모든 것을 맡기면 되는 것이다……. --- p.132~133 우리가 배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길을 나아가는 법이다.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시간을 들여서 몸으로 익힌 것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처음 한 데마에는 마치 긴 언덕길을 오르다가 갑자기 전망 좋은 고지대로 나온 것처럼 상쾌한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이 너무나도 푸르러서 놀랐다. 늦더위는 여전하지만 하늘은 이미 완연한 가을이 되어 솜사탕을 뜯어놓은 듯한 새털구름이 떠 있었다. --- p.162 완벽한 데마에를 목표로 하지만, 그건 내가 노력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날 그 순간을 욕심 없이 살아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손에 들어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날이 일찍 저물었네요.” “동지까지 아직 좀 남았으니까, 갈수록 일몰이 빨라질 거야.” 그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대화를 듣느라 마음이 흔들리는 건 아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데마에를 하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커튼이 막을 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동지가 오면 금방 새해 첫 다회야.” “한 살 더 나이를 먹는 거네. 정말로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 법이구나.” 집에 가는 길은 이미 완전히 깜깜해졌다. 바깥은 무척 추웠지만, 그래서 더 기분이 좋다. 건조한 공기에 눈물이 맺혀서 상점가의 불빛이 영롱하게 빛나 보인다. --- p.213~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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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바쁜 날도,
불안하고 답답한 날도, 찻물을 올리고 계절을 느낄 수만 있다면 날마다 맑은 날. 매주 수요일, 모리시타 노리코는 어김없이 집을 나선다. 귀가 에일 듯한 칼바람이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곳곳에 새싹이 돋고 눈부시게 꽃이 피어나는 봄날에도, 모든 것이 습기를 머금은 듯 눅눅하고 더운 여름날에도, 단풍 들고 열매 맺히는 가을에도, 그리고 다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겨울이 찾아와도……. 삭삭삭…… 차를 타는 따뜻한 소리가 울리는 사이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는 일, 인간관계 고민, 미래에 대한 불안, 부모님과 집안 문제 등 마음속 소란함이 차분히 가라앉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 시작된다. 계절을 민감하게 느끼고 그 계절의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람의 내면은 풍성하다.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하다. 책에는 ‘겨울, 봄, 여름, 가을, 또다시 겨울’이라는 다섯 개의 장 안에 24절기가 배치되어 있는데, 계절마다 바뀌는 다구(다도에 쓰이는 여러 도구), 다화(다실을 장식하는 꽃과 풀), 족자, 화과자는 계절의 변화를 여실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저자 모리시타 노리코가 직접 그린 다구와 다화, 화과자의 화사함도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요소 중 하나이다. [겨울] 일 년의 시작 저자 노리코에게는 새해가 두 번 찾아온다. 남들처럼 1월 1일에 한 번, 그리고 1월 두 번째 토요일에 또 한 번. 두 번째 새해는 첫 다회가 열리는 날이다. 혼자서 글을 쓰는 불안정한 프리랜서로 살아가며 ‘이런 식으로 앞으로도 계속해나갈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기도 하지만, 차갑고 청명한 겨울의 공기에서 생동감을, 청명한 겨울의 흰빛에서 ‘새봄’의 화사함을 느끼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봄] 어딘가에 매화가 피어 있다 매화나무가 팝콘처럼 하얀 꽃을 하나둘 틔우는 봄, 다실에서는 겨울 땅에서 움트기 시작한 새싹을 본떠 만든 화과자를 먹는다. 가지복수초, 산수유, 유채꽃…… 세상이 온통 노란빛 봄으로 물들고 이윽고 벚꽃 철이다. 마감이 코앞인 저자는 벚꽃 구경은 아쉽지만 내년을 기약하려 한다. 중요한 일이 걸려 있으면 다른 건 아무것도 못 하는 성격 탓이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꽃구경에 나선다. 저자가 자신에게 하는 이 말은 정신없이 바쁘게만 사는 독자들의 마음에도 날아와 꽂힌다. ‘꽃도 보지 못하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 [여름] 계절 속에 있으면 다 괜찮아 찻물을 끓일 때 쓰는 화로가 풍로로 바뀌고, 장지문이 습기 때문에 평소보다 무거워진다. 원고 마감과 불면증, 슬럼프 때문에 노리코는 계속 몸이 찌뿌듯하고 무겁다. 다도 수업을 빠질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막상 수업에 가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계절이나 날씨, 상황에 맞추어 연출이 된 다도실 풍경을 바라보며 저자는 생각한다. ‘주저앉는 날도 있어……. 그래도, 아무리 괴로워도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을 가고 싶은 거야.’ [가을]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들 다도 교실의 여름방학이 끝나고 첫 수업 날, 오랜만이지만 머뭇거리는 일 없이 순서대로 차를 만들어낸다. 오랫동안 몸으로 익힌 것은 쉬이 잊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배어난다. ‘어부의 생애는 대나무 하나’라는 족자의 글귀를 보고 저자는 지위, 명예, 재산이 없어도 낚싯대 하나만 있으면 남에게 아첨할 일 없이 풍요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일하는 자의 경지’를 배운다. 잘 익은 감처럼 하늘이 물드는 계절이다. [또다시 겨울] 계절은 다시 시작되고 다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절이 돌아오고, 지난 1년이 평온했어도, 폭풍이었어도, 인생이 잘 풀려도, 잘되지 않아도, 일단 무사히 마지막 날을 맞이한 데 감사한다. 동지 다음 날부터는 일조시간이 조금씩 길어지면서 새로운 1년이 시작된다. ‘끝’은 ‘시작’이기도 하다. “다도를 시작한 지 벌써 40년, 계속 배울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흔들리고 좌절해도 조금씩이나마 계속 성장할 수 있다면 다도 교실의 다케다 선생님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한다. “잘하면 굳이 연습하지 않아도 돼. 못하니까 연습해야 하는 거야!” 수요일 다도 교실에는 70대, 60대도 있지만 이곳에서는 몇 살이 돼도 그저 한 사람의 학생일 뿐이다. 몇십 년을 계속해도 완벽한 다도의 길은 멀기만 하다. 차를 타는 작법은 계절마다 달라지고, 한 단계를 마치면 계속해서 높은 단계가 등장한다. 끝나지 않는 연습에 지칠 법도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끝나지 않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정면에서 꾸짖고 주의를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실수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남들에게 뒤쳐질까 봐 불안해하는 나날 속에서 실수해도, 완벽해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책 속 이야기는 커다란 위로를 전해준다. 불완전하고 실수해도 괜찮다. 우리는 어차피 불완전하고 실수하는 존재이니까. 눈에 보일 정도로 확확 성장하지 않아도 점점 성숙해질 수 있다면, 계절이 거듭될수록 그에 걸맞은 깊이를 지닐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니까. 천천히 우러나는, 천천히 스미는…… 내 마음 한가운데 평온하게 머무는 시간. 마음이 복닥거리는 날이 있다. 세상의 온갖 소란함에 정신을 빼앗길 때도 있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건 아닐까 불안한 날도 있다. 타인의 말에 상처받기도 하고, 자신의 작은 그릇에 스스로 실망하기도 한다. 저자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다. 착실한 것 빼고는 아무런 장점도 없는 밋밋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자기만 빼고 주위의 모든 사람이 아름답고 빛나 보여서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를 바꾸려고 다그칠수록 지쳐서 녹초가 될 뿐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이런 저자에게 어느 날 다실에서 마주친 족자 속 네 글자는 큰 깨달음과 위안을 준다. ‘유록화홍(柳綠花紅)’.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액면 그대로의 문구만 보고 시시하다고 생각했지만 친구 덕분에 그 속뜻을 알게 된 후부터는 이 문구가 각별하게 다가온다. “사회에 나가면 벽에 부딪칠 일이 많잖아. 그럴 때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훌륭해 보이기 마련인걸. 졸업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들 나다운 것을 부정하고 내가 아닌 것이 되려고 해……. 하지만 버들은 꽃이 될 수 없고, 꽃도 버들이 될 수 없어. 꽃은 어디까지나 붉게 피어나면 되는 거고, 버들은 어디까지나 푸르게 우거지면 되는 거야.” 다른 사람이 빛나 보일 때, 내가 나답지 않은 모습이 되려고 할 때 떠올리면 좋을 문구다. 비단 이 문구뿐만 아니라 책 곳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문장과 마음을 다독이는 다정한 분위기는 마음의 소란스러움을 가라앉히고 지금 이 순간 내가 나로 머물게 하기에 충분하다. 세상과 나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자기 자신으로 머물고 싶다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