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 국사를 보는 눈
1장 선사시대와 우리 민족의 형성 2장 고조선과 열국시대 3장. 열국시대에서 사국·삼국시대로 4장. 남북조시대 5장. 고려시대 6장. 조선 전기 7장. 조선 후기 8장. 대한제국사 · 부록1 한국왕조계보도 · 부록2 한국사연표 · 부록3 한국사의 쟁점들에 대한 각국 학계의 시각 |
李德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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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는 누구의 것인가?
요하문명은 중국의 하북성·내몽골·요녕성 일대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동이족 문화를 뜻하는데 세계 4대문명이라는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1,000년 정도 빠르다. 요하문명에서 중요한 것은 홍산문화인데, 중국 장박천은 홍중국 고대 오제五帝의 첫 인물이자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黃帝의 후손들인 황제족의 문화라고 보았고 주도세력은 황제의 손자인 전욱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황제의 아들 소호가 동이족이라는 점에서 황제는 동이족일 개연성이 높다. 소호는 태호太昊의 도를 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중국의 부사년은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서 “태호 복희가 동방의 부족이라는 것은 고대로부터 공인되어온 일이다”라고 말했고, 1920년대~40년대 중국학계를 풍미했던 고사변파의 양관도 「중국상고사도론」에서 태호를 동이족이라고 말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도 “신라 사람들이 자칭 소호 금천金天씨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이라 한다”고 하였고, 「김유신비문」에도 “헌원황제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라고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모두 황제의 아들 소호가 동이족이라는 뜻이다. 황제의 아들인 소호가 동이족이 명백하기 때문에 사마천이 황제를 하화족의 시조로 삼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었다. 우하량 유적의 구릉에서는 제사 유적과 신전 및 신상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동이족의 신성 숭배 성향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제단·신전·무덤이 완비된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강력한 고대국가가 등장했음을 말해준다. 홍산문화의 이전 문화인 흥륭와문화에서 보이는 빗살무늬토기, 적석총, 비파형동검 등은 ‘시베리아 남단→몽골초원→만주→한반도→일본열도’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북방계통 문화와 연결되는 동이족 문화이다. 홍산문화에서는 곰, 새, 돼지 등 다양한 동물 모양의 옥기가 출토되어 곰, 새, 돼지 토템족들의 공존을 암시한다. 곰과 새는 고조선과 동이족 국가 은나라의 주요 토템이다. 요하문명의 흥륭와문화에서 발견된 옥귀걸이와 같은 것이 강원도 고성 문암리에서도 발견되었다. 또한 홍산문화 사용한 석관묘는 고조선과 동일한 묘제다. 홍산문화는 소하연문화를 거쳐 초기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로 연결되는데 이 시기에 고조선이 출현한다. 중국 소병기는 고대 국가발달과정을 고국古國→방국方國→제국帝國으로 분류했는데, 홍산문화 시기에 ‘고국’ 단계가 시작되었고, 하가점 하층문화 시기에 ‘방국’으로 발전했다고 보았다. 이 시기 요하 일대에 존재했던 방국으로 분류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고조선밖에 없다. 일본에 있었던 임나일본부 『일본서기』는 신라·고구려·백제·가야가 모두 야마토왜의 식민지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가을 9월 고구려인, 백제인, 임나인, 신라인이 같이 내조했다. 다케우치노스쿠네에게 명하여 여러 한인들을 거느리고 연못을 만들게 했다. 그래서 그 못을 ‘한인韓人의 연못’이라고 한다.” 고구려·백제·임나·신라 사신이 동시에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쳤다는 『일본서기』 응신 7년은 서기 276년인데, 주갑제를 적용해 120년을 끌어올리면 396년이 된다. 「광개토대왕비문」은 이해 광개토대왕이 백제 정벌에 나서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제 임금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개선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일본서기』는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왜곡이 심하다고 해도 역사서 전체를 거짓이라고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그래서 북한학계에서는 분국설分國說이 나왔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에 대한 기사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본국들이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분국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북한의 김석형이 1963년 「삼한 삼국의 일본 열도 내의 분국설에 대해서(『력사과학』)」에서 최초로 주장한 분국설은 일본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 열도 내에는 지금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계 유적·유물과 지명이 전국 각지에 퍼져 있다. 특히 규슈와 나라 부근에는 가야와 백제의 유적, 유물이 많다. 아니, 많은 정도가 아니라 가야와 백제의 분국이 그곳에 있었다고 말하면 적당할 정도다. 임나일본부설의 모순은 많다. 일본인 학자들은 서기 369년 가야 7국을 점령하고 임나를 설치했다고 주장하지만 『일본서기』에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이 처음 나오는 것은 서기 464년의 기록이다. 신라에서 일왕 웅략 즉위 후 8년 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정벌당할 것이 두려워서 고구려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호 요청을 수락한 고구려가 보낸 군사가 100명이라는 것이 『일본서기』의 내용이다. 『삼국사기』는 한 해 전 신라가 “군사를 크게 사열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군사를 ‘크게 사열〔大閱〕’했을 경우 최소한 몇 만 명은 되었으니 ‘크게’라는 형용사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니 100명의 군사로 보호할 수 있는 나라는 『삼국사기』의 신라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일본이라는 국호는 701년에 처음 사용했고 그 전까지 국명은 왜였다. 그럼 일본 열도 내 임나의 위치는 어디일까? 『일본서기』에서 임나의 위치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기사는 숭신 65년(서기전 33)조이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000여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신라의 서남쪽에 있다.” 숭신 65년(서기전 33년)은 가야가 건국된 서기 42년보다 90년 빠르니 임가는 가야가 아니다. 또한 가야의 북쪽은 바다가 아니다. 북한학계는 김석형의 뒤를 이어 조희승이 이 분야 연구를 크게 진전시켰다. 조희승은 오카야마현 기비 지역을 임나라고 본다. 오카야마 현과 히로시마현 동부를 과거에는 기비라고 불렀는데, 해발 397m의 귀성산에 쌓은 귀성은 5세기 무렵 가야인들이 쌓은 산성이다. 오카야마 이과대학에서 복원한 옛 지도를 보면 과거에는 오카야마 깊숙한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니 숭신 65년조 기사에 부합한다. 남한 내의 민족사학자들 중 다수는 대마도라고 보고 있고 일부는 규슈라고 보고 있는데, 앞으로 북한 학계의 연구 성과가 소개되면 오카야마설이 널리 퍼질 가능성이 있다. 임나는 한반도 남부에 있지 않았다. 서기 4세기 말에서 6세기 말까지 한반도 남부에 임나가 존재했다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신라본기」에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을 리 없다. 두만강 북쪽 280km의 고려·조선 국경선 우리는 국사교과서에서 고려의 북방 강역은 청천강 부근, 조선의 북방 강역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했다고 배워왔다. 과연 그럴까? 『고려사』 예종 3년(1108) 2월조는 “윤관이 여진을 평정하고 여섯 성을 쌓은 것과 관련하여 글을 올려 축하하고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도 “이 지역에 9개의 성을 설치하고 공험진에 있는 선춘령에 비를 세워 이곳을 경계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공험진 선춘령에 ‘고려의 땅〔高麗之境〕’이라는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공험진에 대해 강단사학은 함흥평야 또는 길주 이남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일본인 이케우치 히로시 등의 반도사관을 지금껏 추종하는 것에 불과하다. 공험진의 위치에 대해 『고려사』 「지리지」는 “선춘령 동남쪽, 백두산 동북쪽, 혹은 소하강변에 있다고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백두산 동북쪽에 있다는 기술은 공험진이 지금의 함경남도에 있을 수 없음을 말해준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수빈강에 대해서 “두만강 북쪽에 있는데, 그 근원은 백두산 아래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흘러서 소하강이 되어 공험진·선춘령을 지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으로 688리 지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식민사관에 빠져 두만강 북쪽 280km 지점에 있던 고려 강역 공험진을 남쪽으로 400km도 더 넘게 끌어내려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태종실록』 5년 (1405) 5월 16일조는 태종은 김첨을 통해서 “공험진 이북은 요동으로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그대로 본국(조선)에 붙여달라”는 태종의 요청을 명 태조가 받아들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고려 말 우왕이 명 태조 주원장에게 확인받았던 철령~공험진까지였던 고려의 국경선이 그대로 조선의 국경선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왕 14년(1388) 명나라에서는 왕득명을 고려에 보내 철령위 설치를 통보했다. 철령위 위치에 대해 현재 남한 강단사학계는 함경남도 안변의 철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 또한 이케우치 히로시가 왜곡한 것을 아직껏 추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 「지리지」 도 철령위를 함경도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철령은… 서쪽에 요하가 있고, 남쪽에 범하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들어간다…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는데 옛 철령성 자리이고,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명사』는 철령위 서쪽에 요하가 있다고 말한다. 명나라 때 요하는 지금의 요녕성 요하다. 그리고 이때의 봉집현은 지금의 요녕성 심양 남쪽 진상둔진이다. 왜 이완용의 비서가 선각자인가? 이인직은 국사교과서에서 신소설 『혈의 누』를 쓴 선각자로 가르쳐왔다. 『혈의 누』의 내용은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사에게 겁탈당할 뻔한 조선 처녀를 일본군이 구해준다는 내용이다.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이후인 1906년부터 『만세보』에 연재되었으니 대한제국을 빨리 점령해 달라는 정치소설이었다. 1910년 일본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3대 통감으로 부임하자 데라우치가 합방청원을 제출하던 일진회와 손잡고 대한제국을 병합할까 다급해진 이완용은 비서 이인직을 시켜 나라를 팔아먹는 비밀협상을 하게 했다. 이인직은 도쿄 유학 시절의 스승이었던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츠를 만나 비밀협상을 수행했다. 뿐만 아니라 이인직은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총살당했을 때 대한신문사 사장 자격으로 추도식에 가서 추도사를 낭독했던 인물이었다. 그간 국사교과서는 이런 인물을 선각자로 가르쳐온 것이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역사가 만들어진 이유는 해방 이후 식민사학자들이 남한 역사학계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식민사학의 특징은 한국사를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식민사학은 한국 고대국가들의 성립연대를 끌어내려 시간을 줄이고, 한반도 북부의 한사군과 남부의 임나일본부를 통해 공간을 줄인다. 이 책에서는 서기 4500년경 시작된 홍산문화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시원을 추적하고, 반도를 넘어 대륙과 열도를 자유롭게 넘나들던 우리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