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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바람과 물이 만나 땅을 이룬다
한옥 전통은 새로운 미래를 만든다 기술과 정신이 만나다 창의적인 사색의 공간 주거문화의 새로운 한류, 한옥 한국의 문화 외교관 풍수 바람과 물의 이야기, 풍수 풍수의 도시 서울 그리고 한강 새로운 도시 계획의 모델 사랑방 토론의 전통 토론의 장이 된 사랑방 미래형 토론 모델 골목길 사람들 사이엔 섬이 있다 시대정신이 살아 있는 골목길 북촌의 골목길을 걷다 느리게 걷는 골목, 서촌 희망을 찾는 마을, 벽화마을 이야기가 있는 강풀만화거리 갯벌 자연의 선물 갯벌 바다의 금광 갯벌은 생명이다 02. 장인의 손끝에서 태어난 한국의 보물 자기 신의 그릇, 이도다완 백색의 보석을 찾아서 일본을 일으킨 조선의 자기 한지 견오백 지천년 한지와 한국의 기록 문화 한지 문화, 생활로 들어와야 직지 세계기록유산, 직지 정신문화의 중심, 인쇄 한국의 유전자 속 직지 03. 정신은 문화를 낳는다 차 문화 자연과 어우러지는 차 문화 선비들의 차 문화 효 문화 유럽 사회에서 효 문화 미래 사회 모델이 될 ‘효’ 홍익 한국 정신의 뿌리 미국을 깨울 한국의 정신 선비정신 한국을 소개할 브랜드 한국을 대표할 ‘선비정신’ 혼란한 시대를 이끌 모델 두레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이웃이 가족이 되는 나라, 한국 아름다운 이웃, 사라지는 이웃 성미산에 희망을 심다 04. 보다 가깝고 보다 창의적인 한글 가장 경제적인 문자 한글의 위기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실학 정조와 정약용, 그리고 실학 주자학의 실학 전통 철학의 집대성자, 다산 세계정신의 중심 한의학 한의학에 매료된 세계 의학계 사라져 가는 전통 의학 동의보감의 시대 05. 한국인의 마음을 채우는 보물 도깨비 한국인의 얼굴, 도깨비 도깨비에는 이야기가 있다 미소 희망의 미소 보물이 된 미소 벼랑에 새긴 백제의 미소 돌덩어리에 깃든 천년 미소 |
Emanuel Pastreich,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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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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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재미있는 말이 하나 있다. ‘업은 아이 3년 찾는다’라는 속담이다. 이 말은 아이를 등에 업고, 그 아이가 어디 있는지 몰라 3년을 찾아 헤맨다는 의미다. 속담을 처음 듣고 표현이 너무 기발해서 웃다가, 어느 순간 이 말의 의미가 오늘날 한국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람들이 보물 같은 소중한 유산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너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경복궁을 방문한 중국인 관광객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베이징 자금성(紫禁城)의 웅장한 건물들에 비하면 한국의 궁궐은 아주 작고 소박하네.” 얼핏 듣기에도 무시하는 듯한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존심도 상하고 한편으로 부끄러움도 느낀다고 말하는 한국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그 부끄러움은 규모 면에서 중국의 것과 비교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고성(古城) 한양이 가진 수도의 면모나 궁궐의 규모에서 단 한 번도 그렇게 느껴 본 적이 없다. 한국의 중심으로서 서울은 백성에 대한 마음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 민주적인 질서 등이 모두 결합한 도시다. 원래 의미의 민주주의, 즉 백성이 중심이 되는 도시로서 서울은 그 자체가 엄청난 유산이다. 한국에서 체제나 권위보다 백성을 우선하는 전통은 조선 시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이 세워질 당시 중국은 명나라(明朝)가 들어서 있었다. 명(明)의 황제는 무한한 권력을 휘둘렀다. 반면 조선 국왕의 권력에는 명백한 제한이 있었다. 또한, 왕과 백성의 관계에서 중국과 같은 벽도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궁궐 건축에서 먼저 드러난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건축물은 ‘위엄’을 보여 주는 정도에서 그쳤다. 궁궐을 바라보는 사람이 위압적으로 느끼지 않도록 크기나 배치를 조절했다. 왕을 신처럼 받드는 상징들도 없었다. 그런데 베이징의 자금성을 보면 이름부터 접근을 못 하게 한다. 엄청난 규모 앞에 사람들은 기가 죽는다. 대전은 황제 한 사람에게 집중하도록 한다. 반면 한국의 궁궐들은 규모 면에서 사대문 안에 살던 학자 관료의 집에 비해 큰 차이가 없다. 학자 관료들의 집도 평민들의 집에 비해 압도적이지 않았다. 중국의 영락제(永樂帝, 1360~1424)는 백성들에게 가혹하고 엄격한 통제를 했다. 심지어 황제와 백성들 사이에 감히 다가설 수 없을 만큼의 거리를 뒀다. 영락제가 운영한 비밀경찰제와 비대한 관료 조직은 황제 통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엄청난 부담이었다. 신(神) 같은 존재인 황제는 거대한 관료 집단을 만들었다. 영락제의 통치는 유교 전통을 왜곡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 것이다. 반면 한국의 세종대왕(1397~1450)은 백성을 대하며 오늘날의 개념으로 ‘협치’를 실천하였다. 그가 실현한 왕의 이미지는 나라의 겸허한 종복이었다. 세종은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높은 자리에 등용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세종이 평민의 복지를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고도의 견제·균형 체제를 마련했다. 상대적으로 투명하게 통치한 조선은 왕조를 500년 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서울의 궁궐이 작다며 비웃었던 중국 관광객들은 조선 건축의 규모만 보고 이와 같은 인간적인, 그리고 민주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 중 영락제와 세종 사이에 엄청난 차이를 아는 이도 드물다. 영락제와 세종이 두 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확립한 인물이면서도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는 시각도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무지만을 탓할 수는 없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인 한국 철학·정치·예술·문학을 외국인들에게 알리는 활동에서 아주 미흡했다. 예를 들면 내가 아는 중국의 친구들 가운데 세종에 대해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바이두 백과(百度百科)』에서 세종에 대한 서술도 마찬가지다. 예전보다 훨씬 구체적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세종이 이룬 개혁은 상당 부분 빠져 있고, 그의 공헌에 대해서도 간략하게만 소개하고 있다. 『바이두 백과』에서 18세기의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에 대한 항목은 더 심각하다. 지성인으로서의 다산에 대해 지극히 짧게 소개되어 있다. 왕양명(王陽明)·?주희(朱熹)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다산을 소개하는 한국인들의 노력이 그만큼 부족했음을 보여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