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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5
1부 문학이 놓인 자리 판문점 선언과 문학의 자리 15 이상문학상 논란의 향방과 작가들의 안티조선 운동 19 이상문학상 논란과 문학의 자리 23 구원이 되지 못하는 종교 혹은 진리 31 거인의 어깨 위로 올라서려는 난쟁이들 35 자기 안에서 배움의 길을 찾다 39 종이는 구름이다 45 시여, 다시 침을 뱉어라! 51 농사꾼의 아들 57 2부 ‘민족’ 경계의 안과 밖 A급 전범 사사카와 료이치와 연세대의 아시아연구기금 그리고 류석춘 63 영화 속 김원봉, 이극로가 반가운 까닭 67 이광수의 민족의식과 자유한국당의 청와대 비판 71 한국 우파의 뿌리는 일본에 있나 75 동백꽃 보며 장두를 떠올리다 79 4·3과 내부 식민지로서의 제주사 87 기어이 제주도를 미국의 총알받이로 만드나 91 부시와 침팬지의 닮은 점 96 3부 철망에 갇힌 경제민주화 86세대에 대한 단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줄을 잇는 죽음 103 대통령 지지도의 하락과 구두선에 머무르는 사회적 가치 실현 106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갑질과 새로운 문명의 조건 110 죽음의 후광을 넘어서기 위한 단상 114 20대 신용불량자 20만 시대, 다시 읽는 「대학 시절」 125 변혁은 왜 어려운가 131 경제민주화와 파렴치한 대기업 총수들 138 누구도 저 꽃을 철망에 가두지 못하리라 144 비싸게 팔리기를 바라는 기성품의 삶 150 노동자의 분신과 대화 불통의 대통령 157 4부 인문학의 창에 비친 한국 정치의 현주소 해체해야 할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 관계 163 조국 논란을 바라보는 한 기회주의자의 한탄 166 인간의 도리와 귀환한 ‘동물국회’ 170 여성 대통령 박근혜는 없다 174 4대강 사업에 ‘살리기’란 말 쓰지 말라 183 루쉰(魯迅)과 요즘 한국 정치 188 자유무역협정(FTA) 시대에 김동리의 「산화」를 읽는 이유 204 노무현 대통령은 시를 쓸 수 있을까 208 5부 인문학 안의 사회, 사회 안의 인문학 페미니즘과 시선의 권력 215 혐오로 얼룩진 신조어와 뇌과학의 진단 219 전광훈 목사가 복원하려는 이승만의 개신교 국가 체제 223 좀비의 활보, 가짜 뉴스의 범람과 우리 사회의 비극성 227 석가모니의 비구 승가 해산과 탁발 없는 조계종 231 지금 한국 사회의 교육에 대하여 물어야 할 것 235 투명한 영혼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 위에서 길이 열린다 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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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계약서를 넘어선 문학을 지향해야 하는 까닭은 본질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과 사명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금희, 최은영, 이기호 씨의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 소식은 언론을 통하여 곧장 알려졌다. 작가라는 이유로 자신의 부당한 처우를 조용히 감내해야 할 까닭이 있을 리 없으니, 이들 작가들의 거부 선언이 공론화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문학이란 특수와 보편이 통일되는 지점에서 성립하는 것. 그렇다면 이상문학상의 불공정한 계약 사항은 이상문학상이라는 틀 속에서만 논의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팽배한 불공정 계약 관행과의 중첩으로 나아가는 것이 보다 문학의 자리에 합당한 것이 아닐까.
--- pp.25-26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 펜대를 굴리며 사는 사람과 몸뚱이를 굴리며 사는 사람. 오늘 같은 날 에어컨 바람 맞으면서도 덥다고 하는 사람들은 펜대를 굴리며 사는 사람이고, 나는 몸뚱이를 굴리며 사는 사람이야.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으니 새삼스럽게 누굴 탓할 일도 아니지. 넌 아비 잘못 만나 그 고생이지만. 공부하라는 이유가 거기 있어. 나처럼 살지 마라는 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만약 네가 펜대 굴리며 살게 된다면 말이야, 나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나 잊지 않으면 돼. 나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 절반보다도 훨씬 더 되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단 말이야. 그 걸 알아야 스스로 행복한 줄 알지. 함부로 남을 무시하지도 않을 테고. 자, 난 이제 맥주 먹을 거니까, 넌 지금 가서 네가 좋아하는 통닭이나 한 마리 사 와라. 빨리 먹고 일찍 자야 내일 아침에 늦지 않지.” --- p.59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에 한국의 새역모로 평가되는 뉴라이트가 출현하였다. 새역모와 뉴라이트는 그만큼 역사 해석의 관점이 유사한데, 류석춘도 뉴라이트의 일원이다. 뉴라이트는 새역모가 그러했듯이, 근현대사 해석을 둘러싸고 전복을 시도한다. 여러 학자의 글을 모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 2006), 『반일 종족주의』(미래사, 2019) 그리고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2013)는 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새역모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뉴라이트가 출현한 것은 우연일까. 그에 앞서 진출하여 학계에 살포되었을 사사카와재단의 연구 기금과는 과연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 아시아연구기금을 누가 받아갔는지 내역은 알 수 없으나, 나는 이러한 합리적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 pp.64-65 바다 한가운데 고립된 채 척박한 자연환경과 맞서면서 무거운 진상, 부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제주인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문화를 형성해나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장두였다. 간난한 생활에 경래관(京來官)의 가렴주구가 겹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제주 민중들은 민란을 일으켰다. 중앙정부에 처지를 호소할 방식이 민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민란이 성공하여 제주읍성을 함락하면 경래관은 섬 밖으로 추방당했고, 이들의 소장(疏章)은 비로소 중앙정부에 전달되었다. --- pp.88-89 어느 한 시인의 우발적 죽음을 필연으로 수용하는 현상은 그 사회가 처한 조건과 관계 맺는다. 즉, 사회에 은연중에 유포되어 있는 죽음의 분위기가 기형도(와 『입 속의 검은 잎』)의 죽음과 공명하였기 때 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공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기형도의 죽음은 우리 문학계에서 마치 신탁과도 같은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이는 아무리 발버둥 쳐보아도 신탁을 실현하는 과정을 살 수밖에 없었던 오이디푸스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폐쇄회로 안에서 서로의 도저한 절망을 애처롭게 확인하는 문학의 선조(先祖)로서 기형도가 자리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 p.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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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대한 일관된 태도가 빚어낸 선 굵은 목소리
문학비평가 홍기돈의 산문집 『문학의 창에 비친 한국 사회』는 문학이라는 ‘메스’를 통해 한국 사회를 해부한 책이다. 글마다 쓰인 시차는 제법 길어서 때로는 지난 시간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현실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다. 멀게는, 이제는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까지 가닿아 있다. 하지만 저자가 짚어내는 시대의 맥락은 지금도 당연히 유효하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집군 시기에 보여준 노동자에 대한 냉담한 시선은 정치권력이 몇 번 바뀌었어도 여전하다. 안타깝게도 노무현 대통령은 노동자 분신의 의미를 전혀 해독해내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극단적인 표현 방식만 나무라고 있을 뿐이다. 유난히 대화를 강조하는 노 대통령의 발언을 보라. “분신을 투쟁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 그렇다면 대체 어찌하란 말인가.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쟁에 바쁜 정치권이 잠시 짬을 내어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줄 때까지 마냥 기다리라는 것인가. _「노동자의 분신과 대화 불통의 대통령」 중 정말 ‘안타깝게도’ 이런 정치권력의 시선은 아직도 노동자를 바라보는 상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바라보는 저자의 눈초리는 다시 ‘지금 여기’에 겹쳐봐도 큰 차이가 없다. 예를 들어 「86세대에 대한 단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줄을 잇는 죽음」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기 정치권력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86세대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삼십여 년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노동 현장은 변하지” 않았다며 매섭게 질타하고 있다. 제목에 드러나 있듯이 저자는 현실에서 벌어진 사태를 문학작품을 인용해 더욱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에서도 그의 말대로 그가 정말 시를 쓸 수 있었을까,라고 물으면서 천상병 시인의 「들국화」 전문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들국화 한 송이의 뒤척임을 통해 우주의 울림을 느낄 만한 감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그런 마음가짐도 없이는 제대로 된 시를 쓸 수 없을 터이기에 하는 소리다. 노무현 정부의 환경정책을 보면 이런 판단을 지울 수 없다.” 문학장 안에 대한 고언과 바람도 날카롭기 그지없는데, 최근에 벌어진 ‘이상문학상 사태’에 대해서도 저자는 이상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작가들의 편에 서면서도 그 싸움이 더 확장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상문학상 논란의 향방과 작가들의 안티조선 운동」에서 저자는 작가들이 『조선일보』와의 싸움에도 함께해야 한다고 했지만 도리어 후배 평론가로부터 비아냥을 사기만 했다. 이때 다시 저자는 「이상문학상 논란과 문학의 자리」라는 반론으로 답하는데, “하루 한 명 추락사”하는 현실에 『조선일보』를 비롯한 기성 언론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황을 환기시키며 작가들이 가진 “상징권력”은 이런 현실에도 개입해야 함을 역설한다. 저자는 이것을 ‘문학의 자리’라고 부른다. 지금의 문학장 안에서는 좀체 들을 수 없는 낡은 언어(?)처럼 보이지만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 현재까지 견지해온 저자의 문학관을 고려하면 이것은 낡은 태도가 아니라 일관된 태도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이런 태도가 시종일관 계몽적이거나 단선적인 정치 행위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책머리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간은 한 줄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다. 도리어 저자의 눈은 여러 겹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계몽의 불을 밝히기보다는 비판적 지성이 자주 나타난다. 86세대에 대한 비판도 그렇지만 ‘변혁은 왜 어려운가’라고 물으면서 “내 바깥에 펼쳐진 세상을 바꾸어나가면서, 동시에, 나 자신도 바꾸어나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는 자답을 하는 것이 그 생생한 실례라 할 수 있다. 제주인의 정체성으로 바라본 한국의 현실 저자 스스로 “열렬한 ‘마르크스 보이’”였지만 민족문제에 대한 관점도 일군의 ‘마르크스 보이’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만큼 저자가 철저한 리얼리스트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일본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민족적 관점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식민지 관계에 대한 진정한 ‘좌파적’ 관점에 가깝다. 제국주의가 자국의 노동자를 억압하면서 만들어졌으니 제국주의 또한 자본주의 문제가 본질이긴 하다. 문제는 그 제국주의의 식민주의가 청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잔존 제국주의자와 공명하는 한국 내의 ‘뉴라이트’에 대한 비판은 「A급 전범 사사카와 료이치와 연세대의 아시아연구기금 그리고 류석춘」이라는 글에서 매섭게 행해진다. 아시아연구기금을 출연한 단체는 일본재단(Nippon Foundation, 사사카와재단)이고, 일본재단의 설립자는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다. 사사카와 료이치는 ‘가미가제 특공대’를 창안하고 국수의용항공대를 창설한 인물이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A급 전범으로 3년간 수감되었던 그는 이후 재력을 축적하여 1962년 사사카와재단을 설립하였다. (…) 여러 학자의 글을 모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 2006), 『반일 종족주의』(미래사, 2019) 그리고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2013)는 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새역모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뉴라이트가 출현한 것은 우연일까. 그에 앞서 진출하여 학계에 살포되었을 사사카와재단의 연구 기금과는 과연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 아시아연구기금을 누가 받아갔는지 내역은 알 수 없으나, 나는 이러한 합리적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_「A급 전범 사사카와 료이치와 연세대의 아시아연구기금 그리고 류석춘」 중 이런 저자의 관점은 그야말로 “합리적 의심”에 충실한 결과인데 저자는 “정치 지형을 떠나, 민족 경계를 넘어 보편적인 인권 가치는 아무리 시간이 흐르더라도 존중받고 지켜져야” 함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이번 산문집에서 빛나고 있는 또 다른 눈은 저자가 제주인이라는 사정과 관련돼 있다. 제주의 역사를 다룬 오경훈의 『제주항』과 허윤석의 『해녀』를 다룬 두 편의 글에서는 문학작품을 통해 제주의 아픈 역사를 짚고 있다. 먼저 「동백꽃 보며 장두를 떠올리다」에서는 오경훈의 『제주항』을 읽으면서 현실에 가려진 또는 현실 너머에 있는 “다른 길을 꿈꿔”본다. 그것은 지금은 사라진 “공동체주의의 어떤 요소들을 복원시켜 자본주의의 균열 지점을 파헤쳐 들어가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사고의 실험이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는 사고와 상상력을 실험하지만 사실 문학비평가 홍기돈은 한국 사회의 문제에 참여를 망설이지 않은 투사이기도 하다. 허윤석의 『해녀』를 읽고 쓴 「4·3과 내부 식민지로서의 제주사」에서는 제주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면서 4·3항쟁 70주년과 겹쳐보고 있다. 배제되고 고립된 조건에서 형성된 제주의 공동체문화는 해방을 맞고도 타자에게 여전히 낯설게만 남아 있었다. 예컨대 4·3이 발발하기 이전 미군정과 경찰은 그 이질감을 넘어서지 못한 채 각각 도민의 60~80%, 90%가 좌파라고 예단해버렸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실제 저자의 고향과 그 선조들이 겪었던 아픔의 역사를 다시 되풀이할 수 없다는 듯이 문학을 하면서 비판을 하고 비판을 하면서 투쟁해 낳은 지적인 결과물이 바로 이 책, 『문학의 창에 비친 한국 사회』이다. 시의성이 부족해 보이는 옛글을 굳이 배제하지 않은 것은 그것 또한 역사이며 동시에 지금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에 어떤 서사를 부여해주기까지 한다. 현실 비판적 시각이 소거된 에세이가 넘쳐나는 출판 시장에서 홍기돈의 이 산문집은 많이 예외적이면서 문제적이다. 책머리에 한쪽에 해가 비치면 반대편에는 그늘이 진다. 양과 음이다. 자연의 운행에서 양과 음은 한순간도 정체되는 일 없이 항상 변화한다. 나의 심장 또한 날숨과 들숨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쉴 새 없이 펄떡인다. 펄떡이는 심장의 확장/수축 운동과 더불어 내 삶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디 나만 그러할까.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문자를 모르는 당신의 반려동물도, 생존 근거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북극의 곰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사회에 관한 탐구는 존재의 운동성에 입각하여 진행되어야 한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들을 끌어안고 눈앞에 펼쳐진 현실과 맞서야 하는 인문학의 사명은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은 한 줄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존재가 아니기에, 특정한 속성이나 명제로 집약되는 순간부터 그로부터의 탈주가 펼쳐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운동으로서의 인문학은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배제되고 억압받는 인간성에 주목하게 된다. 이 책에 묶은 산문들은 세계의 전회에 동참하고자 하는 인문학의 자리에서 쓰였다. 인문학 가운데서도 문학 범주를 통한 접근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이는 한국 현대문학을 전공하였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나의 이력과 관련이 있겠다. 그래서 『문학의 창에 비친 한국 사회』라고 제목을 붙였다. 인문학의 운동성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기실 이 책에서 변혁보다 더욱 부각되는 것은 정체된 채 썩어 있는 한국 사회의 민낯일 터이다. 가령 일본 극우파의 자금 지원을 받는 한국 우파에 대한 추궁은 2000년대 중반에나 2020년에나 동일하게 가능하다. 정부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양산하고 그들의 연이은 죽음을 방치하는 현실은 2000년대부터 현재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정치적 좀비들 또한 여전히 백주대로를 활보하고 있다. 이 책의 한편에는 이러한 한국 사회의 현실이 놓여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에는 그와 맞서는 인문학의 자리를 굵직하게 표시해두었다. 일찍이 그람시는 당대의 정체된 이탈리아를 두고 다음과 같이 토로한 바 있다. “낡은 것은 멸해가는데 새로운 것이 오지 않을 때 위기가 발생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써 낙관하라”는 주문을 잊지 않았다. 그람시에 기대어 말하건대, 위기의식에 한 발 걸치되 위기의식을 조장하는 현실과 길항해 나아갈 의지는 인문학 가운데서 벼리어나갔다. 현실 가운데서 인문학의 가치를 확인하고자 했던 나의 시도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이제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넘겨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