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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엄마의 이름을 불러본 적 있나요?
1 우리는 연화하숙에 산다 2 연화하숙의 봄, 우리는 3 모녀의 마음에 봄바람이 불 때 4 보통이 넘는 두 여자에게 대처하는 법 5 원래 엄마는 신파라니까 6 요상한 물건의 주인 7 어른의 맛은 오지랖이다 8 그까짓 것 뭐 어쩌라고? 9 엄마의 엄마 10 연화하숙 식구들 에필로그 우리 집에는 오늘도 엄마가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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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자신과 마주한 후 이제 더는 지체할 필요가 없었던 그녀는 딸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이게 뭐냐는 물음에 그녀가 당당하게 말했다. “나 이제 엄마 안 해! 하숙집 아줌마 안 해. 여자 강순희. 아니, 그냥 사람 강순희로 살 거야.” 얼이 빠졌다가 깨어난 연화가 목청껏 자신을 불러댔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쩐지 분에 차 씩씩거리는 딸을 보니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순희 씨의 얼굴에 슬금슬금 미소가 걸렸다. ‘인생 육십부터라는데 난 이제 겨우 반백 살이다, 이거야! 엄마, 하숙집 아줌마 말고 강순희라 불러다오!’ 순희 씨는 그렇게 자신의 연화하숙 302호의 하숙생이 되었다. --- p. 24 “그러게 무슨 연애를 이렇게 요란법석하게 해?” 이불을 엄마 목까지 끌어 당겨주며 연화는 여전히 못마땅한 목소리를 냈다. “연애는 무슨. 산악회 모임이라고 말했잖아.” “웃겨! 내가 무슨 다섯 살이야? 그 말을 믿게. 뭐 열녀문이라도 세우시게?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하고 있어.” “이게 진짜. 말본새 하고는. 쯧, 자식새끼 잘못 키웠어 진짜.” 순희 씨가 당황하며 들썩거리는 바람에 엄지발가락이 이불 밖으로 삐죽 튀어나오자 연화가 얼른 이불을 당겨 덮었다. “남자도 아닌데 그 시간에 미쳤다고 전화 한 통에 뛰어 나가? 비가 이렇게 퍼붓는데? 내 말이 틀려?” “야,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네가 연애하니까 뭐, 온 세상이 핑크빛이냐?” “거기서 멀쩡한 내 연애는 왜 걸고넘어져? 내 파릇파릇한 사랑을 그런 거무튀튀한 황혼의 불장난과 엮지 마시지?” --- p. 138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여성의 목소리는 다방면에서 갈수록 높아지고, 회사에서도 육아휴직을 내는 남자 동료들을 심심치 않게 봐 왔다. 그런데 어째서 엄마라는 단어만 저 쌍팔년도 진부하고 촌스러운 억지를 벗어나지 못하나 싶었다. 연화는 그런 신파가 싫었다. 적어도 자신과 엄마만큼은 저렇게 지지리 궁상 같은 신파는 아니라며 자신했다. 남들과는 다르다 자만했다. 나는 못 먹더라도 새끼는 먹이고, 나는 죽더라도 새끼는 살리는 건 곧 죽어도 연화 스타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매번 등짝으로 날아드는 엄마의 손이, 주책 좀 부리지 말라며 바락 대드는 두 사람이 더 현실감 있었다. 그렇게 다르다 자부했는데, 수술 후 힘겹게 겨우 내뱉은 말이 고작 밥 먹었냐는 엄마의 목소리에 연화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 p. 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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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랬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엄마를 만들었다고.
그대, 그런 엄마의 이름을 불러 본적이 있나요? “나이 오십이 넘어도 내 인생 내가 모르는 건, 스물이나 너처럼 서른이나 비슷하더라고.” 누군가의 엄마와 딸이기 전에, 그저 사람 강순희와 백연화로 살아가고 싶은 두 사람이 전해주는 드라마. “나처럼 살지 말라고. 나처럼 이름도 없이 엄마, 아줌마로 살지 말라고. 너는 그냥 여자 아니, 사람 백연화로 살라고, 그래서 네 이름 갖다 쓴 거야. 적어도 우리 하숙 이름 부를 때는 네 이름 석 자 불러주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작은 일에도 걱정을 만들었고 그 걱정은 자연스레 조바심을 낳았다. 그 염려되는 마음이 귀찮고 간섭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걸 잔소리라 여기며 하찮게 치부했다. 엄마와 입장이 바뀌니 그제야 기억 속 그 언젠가의 엄마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이토록 공감이 될 줄이야. 매일 같이 자신을 괴롭히던 잔소리 또한 순희 씨의 마음이었다는 걸 참으로 일찍도 깨달은 자신이 한심해 작게 코웃음을 쳤다. 강순희와 백연화로 살기로 했지만 순희 씨는 여전히 연화의 엄마였고, 연화는 여전히 순희 씨의 딸이었다. 여기 꼭 닮은 엄마와 딸이 살고 있다 세상의 혈육이라고는 단 둘뿐인 엄마 순희 씨 그리고 딸 연화. 연화하숙 4층 주인 세대에는 여느 집 다정한 엄마와 딸 사이와는 조금 다른 그녀들이 있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모녀이지만, 실상 삼십 년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아버지이자 남편이었고 보호자였으며 친구였다. 마음만큼은 서로를 끔찍이 여기지만 표현에는 끔찍하리만큼 서툰 모습까지 꼭 닮은 두 모녀의 사이가 삐거덕거리기 시작한 건 아마도 그때부터였다. 엄마, 순희 씨 Say... 스스로 깡순희가 되어 버텨온 세월 51년이었다. 홀몸으로 안 해본 일 없이 세상에 하나뿐인 딸년 연화를 잘 키워 대한민국 최고 대기업에 입사시킨 사람이 바로 나 강순희다. 이제야 겨우 숨통 트이며 사는 나에게 뭐? 암이란다. 차가운 수술실에 눕자, 처녀 시절 태아 초음파 사진과 대학 합격증을 양손에 쥐고 펑펑 울다가 박박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던 합격증이 그렇게 다시 손에 쥐고 싶어졌다. 보여줄 사람도 없는 가슴 도려낸 게 뭔 대수인가 싶었건만 생각보다 아리고 수치스럽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딸년이란 것이 걸핏하면 “내 인생이야 엄마가 무슨 상관이야”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딸아이 앞에 대학 합격증과 보증금 천만 원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나도 이제 엄마, 하숙집 아줌마 안 해! 인생은 60부터라는데 나는 이제 겨우 반 백살이다 이거야! 홀로서기 하는 신입생 강순희라 불러다오! 딸, 연화 Say... 삶이 지칠 때면 늘 들려오는 엄마의 18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나도 안다. 스무 살 꽃보다 아름다운 나이에 날 임신하고 여자 홀몸으로 이 나이까지 키워준 것을. 그렇기에 나 또한 그 흔한 사춘기 반항 한 번 없이 앞만 보며 달려왔다. 백연화보다는 강순희의 착한 딸로 살아왔다. 누구의 딸이 아닌 나로 살아보고 싶어서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 치고 나왔다. 그런데 느닷없이 엄마가 자신의 뒷바라지를 하란다. 기가 막히다. 다 늙어서 무슨 대학? 게다가 뭐, 독립? 팔자에도 없는 하숙 아줌마를 하며 엄마 뒷바라지를 하라고? 어쩐지 청춘을 찾기 위한 엄마의 절박함이 나를 이곳 연화하숙에 주저앉히고 말 것만 같아서 나는 지금 너무나도 불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