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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난파된 정신
1부 사상가들종교를 지키기 위한 전투내재한 종말 아테네와 시카고 2부 흐름들루터에서 월마트로 마오쩌둥에서 성 바울로 3부 사건들2015년 1월, 파리 |후기| 기사와 칼리프 감사의 글 옮긴이의 글: 역사의 반동과 난파된 정신 |
Mark L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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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반동의 시대?
2015년 1월 파리, 칼리프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일단의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이 언론사 샤를리 에브도를 공격했다. 서방 세계는 이를 두고 시대착오적․야만적 테러라며 규탄했지만 과연 이 세태가 근본 이슬람주의만의 문제일까? 시대착오적 반동의 물결은 민주주의를 이끌어 간다는 서방 세계에도 이미 확산되고 있다. EU 내부에서는 인종주의와 반이민 정책을 내세우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해가 갈수록 약진하고, 미국 역시 트럼프 집권 하에 환경정책 폐기, 반이민 정책 주장 등 시대를 역행하고 있다. 대체 21세기의 정치 지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분별없는 열정》에서 20세기 사상가들의 전제옹호 심리를 파헤친 마크 릴라가 이번에는 그 속편 격인《난파된 정신》에서 서구 지식인의 정치신학적 사고방식이 어떻게 반동사상으로 이어지는지 분석한다. 저자의 통찰이 우리에게 유용한 까닭은 한국 역시 정치화된 종교, 종교화된 정치권력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건한 반동사상가를 통해 살펴보는 반동의 근원 저자는 20세기 철학자 3명의 사상을 통해 반동의 원형을 추적한다. 유대종교 철학자 로젠츠바이크, 정치 철학자 에릭 뵈겔린, 마지막으로 네오콘의 스승인 레오 스트라우스가 그들이다. 로젠츠바이크는 유대교 사상이 19세기 헤겔의 역사철학에 영향을 받아 분화된 뒤 유대인의 존립 근거를 없앨 것이라고 생각되자 이에 대항해 유대적 삶을 살 것을 주장하는 저작물들을 집필했다. 정치 철학자 에릭 뵈겔린은 나치즘의 대두에 대해 계몽주의의 책임을 물으면서 그 연원을 찾아 고대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는 계몽사상가부터 헤겔, 마르크스 등의 주요 사상가들에게 그노시스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는 신을 죽인 자들이라고 비판한다. 정치 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는 서구 문명의 문제들이 과거의 더 건강하고 더 원초적인 사유 양식을 포기한 데 있다고 보고 그 시점을 확증하는데 노력했다. 마크 릴라는 이 사상가들이 역사는 특정한 원리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결정론적 사고를 공유하며, 여기에 직관적인 상상력을 더해 ‘노스탤지어’를 만들어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보았다. 노스탤지어와 묵시록이 만날 때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은 스승의 사상을 오독하고 ‘미국에게는 구원이라는 역사적 사명이 있다.’라는 자신들의 묵시록을 만들었다. 그들이 바로 미국 정계를 움직이는 네오콘이다. 그들은 미국이 1960년대 이후로 허무주의를 향해 미끄러져 왔으며, 우파 대중영합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가 국가가 옳고 그름의 기본 감각을 회복하는 데 공헌한다는 점을 생각하라고 채근한다. 50년 전 시카고의 세미나실에서 출발해 미국의 정치판을 변모시킨 워싱턴의 우파 정치-언론 복합체의 배경인 이들은 ‘아리안족의 영광’이나 ‘칼리프의 제국의 부활’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명분으로 전쟁 불사를 외친다. 성조기와 태극기, 그리고 일부 개신교 2003년 1월 한국기독교 총연합회는 서울 시청 앞에서 수만 명의 신도를 모아 구국기도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대형 태극기, 성조기, 유엔기가 자리를 나란히 했다. 2002년 효순∙미선이 추모 촛불집회로 반미감정이 거세지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한국 개신교에게 미국은 특별한 국가다. 미국은 이 땅에 개신교를 전파했고, 한국의 공산화를 막음으로써 개신교를 존립 위기에서 구원했다. 또한 한국이 미국의 도움으로 2차 대전 후 독립된 국가 중 가장 성공한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면서 개신교 또한 그 성과를 향유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일부 개신교는 ‘절대선에 가까운 구원자 미국’이라는 노스탤지어를 갖게 되었다. 그들에게 미국이 한국에서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사태인 것이다. 문제는 노스탤지어가 단순한 감성적 반응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노스탤지어를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설 때 사회적 공감대는 물론 그들의 신앙과도 벗어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현대 사회에 반동이 잘 먹히는 이유, 노스탤지어 오늘날 반동선동가들은 노스탤지어가 매력적인 수단임을 잘 알고 있다. 현대인들은 사회적, 과학기술적 변화에 의해 종속된 채 끊임없이 변화를 강요당한다. 그리고 변화의 속도는 급속도로 빨라지고 있다.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개인에게는 자유와 부를 약속하지만 여기서 이탈하는 하는 개인에 대해서는 개인에게는 책임을 돌릴 뿐이다.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경제양극화에 대해 좌우를 막론한 기존 정당들이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역사적 배신감 밖에 남지 않은 사람에게 ‘옛날에는’으로 시작하는 이 신화는 과거로 돌아가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그릇된 희망을 품게 한다. 희망은 꺾여도 향수는 사라지지 않는다. 반동에는 시대착오, 무지, 폭력, 비타협 등 각종 부정적인 딱지들이 붙으며 그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마크 릴라는 열혈 정치적 반동주의자들도 열혈 혁명가들 못지않게 납득할 만한 열정에 이끌리는 사람들이며,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고 지금 현재를 조명하기 위해 정교한 이론을 발전시킨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또한 반동주의자들은 혁명가만큼 기존 체제에 대해 혁명적이기도 하다. 비록 역주행하는 혁명이지만 브렉시트 사태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동주의자들이 현재를 더 명료하게 바라보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그 현재를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혁명이 바라보는 것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혁명에는 늘 혼란과 위기감이 뒤따른다. 하지만 반동은 이미 일어난 경험을 바탕으로 추억과 함께 노스탤지어로 피어오른다. 혁명은 성취해본 적이 없는 미지의 세계이지만, 반동은 이미 누렸던 영광이자 성공의 확신으로 자리 잡는다. 과연 한국 사회는 노스탤지어의 바람에 요동치게 될까? 아니면 노스탤지어를 딛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