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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서론 Ⅰ. 외부 상황 Ⅱ. 낭만주의 정신의 구조 Ⅲ. 정치적 낭만주의 결론 옮긴이 후기 |
Carl Schmi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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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는 어느 때는 힘과 에너지였다가, 또 어느 때는 병폐와 분열증 그리고 “세기의 질환maladie du siecle”이었다.
--- p.20 낭만주의는 주관화된 기연주의다. 왜냐하면 낭만주의에게 본질적인 것은 세계에 대한 기연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제 낭만적 주체가 신을 제치고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주체는] 세계와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오직 자기를 위한] 순전한 동기로 삼는다. [이렇듯] 최종적인 권위Instanz가 신에게서 천재적인 “자아”로 이양되면 [사태는] 완전히 다른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진정으로 기연적인 것이 순수한 형태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다. --- p.28 낭만적인 것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무한한 소설의 출발점Anfang eines unendlichen Romans”이 된다. 노발리스에게서 연원하는 이 표현─이것은 [낭만주의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은 세계에 대해 낭만주의가 맺는 특수한 관계를 더할 나위 없이 잘 묘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즉 소설이나 동화가 아니더라도, 한 편의 서정시나 음악 작품, 한 편의 대화나 일기, 편지, 한 편의 예술 비평 혹은 연설, 그도 아니면 심지어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분위기만으로도 주체의 기연적 태도를 입증하기에는 충분하다는 사실 말이다. --- p.30 어원에 따르면, “낭만적”이란 단어는 “소설 같은romanhaft”이라는 뜻을 갖는다. 즉, 이 말은 본디 소설Roman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사 장르의 상위 개념Oberbegriff을 세분해주는 것으로서 ‘낭만적’이란 단어는 그 말 자체로 이미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 함축적 의미를 거느릴 수 있다. 본서가 의도하는 [낭만주의에 대한] 정의는 이 어원학적인 의미에 다시금 부응하고자 하며, 이러한 의도는 빅토어 클렘퍼러Victor Klemperor가 수행한 흥미로운 문헌학적-문학사적 연구에 의해 특별한 보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낭만주의란 단어는 거의 백 년 가량 지속된 지독한 혼란으로 인해, 이제는 경우에 따라 어떤 내용이든 내키는 대로 채워 넣으면 그만인 텅 빈 그릇처럼 되어 버렸다. --- p.51 낭만적인 것은 기하학적인 선이 아니라 아라베스크 무늬다. --- p.124 모든 개념은 자아이며, 거꾸로 모든 자아는 개념이다. 모든 체계는 개인이고, 모든 개인은 체계이다. 국가는 연인이다. 국가는 인간이 되며, 인간은 국가가 된다. 혹은 뮐러의 『대립론』에서 인용하자면, 만약 긍정과 부정이 객관과 주관처럼 서로 대립한다면, 그것은 객관과 주관에 다름 아닐 것이다. --- p.129 공허하고 피로한 반복 속에서 그들은 거듭 새롭게 확신한다. 자신들은 거짓이 아닌 “참된” 개념을 다루고 있다고. “참된 것”, “현실적인 것”, “진정한” 자유, “진짜” 혁명, “진실한” 성직자, “진실한” 신앙, “진리를 담은” 책, “진짜” 인기, “올바른” 상도, “진정한” 공화국─이것의 본질은 “진정한” 군주제를 이룩하는 데서 성립한다─“진정한” 법학, “참된” 결혼, “참된” 낭만주의, “참된” 학자, “현실적인” 교양인, “진정한” 비평, “참된” 예술가 등 제대로 열거하자면 수많은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낡은 개념에 “진정한echt”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고 해서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계 창조자라는 자아도취가 사라진 뒤에는 환멸 속에서 사태가 곧장 뒤집힌다. 즉, 아이러니를 통해 세계를 농락하던 주체는 이제 자신이 [오히려] 수많은 참된 실재들이 연출한 아이러니의 대상임을 깨닫는다. --- p.148 주관적인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는 격정은 공동체를 건립할 수 없으며, 사교 활동에 대한 탐닉은 지속적인 결속Verbindung을 위한 토대가 되어 주지 못한다. 아이러니와 음모는 사회적 결정점結晶點이 아니며, 외따로이 살지 않고 활기찬 대화의 흐름 속으로 뛰어 든다고 해서 사회 질서가 잡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회도 무엇이 정상이며, 또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질서를 이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념상 정상적인 것은 낭만적일 수 없다. --- p.2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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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낭만에 취한 시대,
청년 칼 슈미트의 통렬한 비판을 다시 읽는다 오늘날의 한국을 생각해 보자. 교회는 불법 정치 집회로, 정치 집단은 종교의 모습으로, 정치는 개인 방송의 불쏘시개로, 종교는 갖은 음모론의 출처로 소비되고 마는 현실을. 너도나도 “진짜”를 자처하는 모습은 애석하게도 “진짜”가 드문 시대임을 방증한다. “진짜”의 빈자리를 슬몃 차지한 숭앙과 혐오는, 동전의 양면으로 들붙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사잇길로 굴러다닌다. 여기, 작금의 사태를 미리 내다본 사람이 있다. 『정치적 낭만주의』의 저자, 칼 슈미트는 “교회가 극장으로 대체되고, 종교적인 것이 연극이나 오페라의 소재 따위로 취급되며, 성당이 마치 박물관처럼 여겨지던 당시 세태”를 아프게 꼬집는다. 무려 100년 전의 진단이다. 어째서 이 오래된 진단에서 21세기 한국의 오늘이 보이는 걸까. 만약 슈미트가 오늘날 한국인들의 소통 양태를 본다면, 과연 무어라 말을 할까. 아마도 그는 이렇게 탄식하지 않았을까? ‘한국인들은 쉽고 편한 몇 마디 말로 가볍게 서로의 인격을 짓밟아 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정치를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매일 매순간 우리는 목격한다. 미문이 비판을 밀어내고, 미사여구가 촌철살인을 지워내며, 감정적 편 가르기가 합리적 판단의 숨통을 조이는 장면들을. 슈미트가 100년 전 유럽을 묘사한 문장은 오늘의 한국, 나아가 세계 전체에 실로 적확하게 들어와 꽂힌다. “이 세계는 실체 없는 세계, 확고한 지도 체계가 부재한 세계, 결론도 정의도 결정도 최종 판결도 모른 채 우연이라는 마법의 손길에 이끌려 끝없이 방황하는 세계다.” 『정치적 낭만주의』는 이제 막 법학자로서 활동을 개시한 슈미트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본격 정치·역사 비평서다. 그가 이 책을 구상하고 집필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과 부조리를 온몸으로 겪어 낸 직후였다. 다다이즘을 대표하는 시인 후고 발Hugo Ball은 『정치적 낭만주의』를 두고 “칼 슈미트 사상의 『순수이성비판』에 해당하는 책”이라고 말했다(발에 따르면, 1922년의 『정치신학』은 『실천이성비판』이다). 첫 책에서부터 슈미트는 이미 정치사상가로서의 예리한 안목과 문화비평가로서의 날카로운 필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독일 정신사 및 정치신학의 달력상, 이 책은 칼 바르트의 역작 『로마서』 초판과 동년배라 할 수 있다. 비록 바르트의 책만큼 열띤 반응을 얻지는 못 했지만, 『정치적 낭만주의』가 내보인 정치 비판의 가공할 위력은 『로마서』─초판과 재판을 아우르는─가 보여준 종교 비판의 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칼 슈미트의 『정치적 낭만주의』는 가짜 뉴스와 주작이 판치는 시대, 질 낮은 아류들이 횡행하는 이 시대가 반드시 참조해야 할 필독서다. 현 시대에 미만한 생존주의와 각자도생 문화, 무엇보다 도무지 끝을 모르는 ‘칭찬 제일주의’에 염증을 느끼는 모든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