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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과 가족, 가족을 둘러싼 분투
이희경
북튜브 20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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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특강 시리즈

이 상품의 특별 구성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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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머리에

1부 _ 가족이란 무엇인가?

Intro. 가족에 대한 몇 가지 고정관념
‘가’(家) 혹은 ‘파밀리아’(familia)
근대 핵가족의 탄생

2부 _ 루쉰, 아이를 구하라

효에 대하여
아이를 구하라
나도 사랑할 수 있을까?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

[화보] 그림으로 보는 가족의 역사

3부 _ 핵가족의 성립과 붕괴

스위트 홈 ? 판타지
스위트 홈 ? 잔혹동화
탈산업사회, 회사-가족-학교 3각 동맹의 해체
IMF와 가족의 위기

4부 _ 청년과 새로운 네트워크

가족의 위기 어쩌면 연애의 위기
「아Q정전」과 정신승리법 효력상실의 순간
핵가족 넘기, n개의 가족

저자 소개1

문탁

일명 문탁.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거쳐 지금 <문탁네트워크>까지 20년 넘게 인문학공동체에서 공부하고 있다. <수유+너머> 시절에는 한국근대젠더 연구를, <문탁네트워크>에 와서는 인류학과 선물의 공동체, 또 동양고전과 윤리적 주체 문제 등을 탐구했다. 최근에는 공동체와 영성, 공동체와 양생, 늙음과 죽음 등에 관심이 많다. 한마디로 잡식성 공부. 이를 통해 공부와 현장이 결합되길 꿈꾼다. 지금 구성하고 있는 현장은 <길드다>라는 청년인문학스타트업과 <인문약방>이라는 새로운 콘셉트의 양생공동체이다. 『루쉰과 가족, 가족을 둘러싼 분투』를 썼으며, 함께 쓴 책으로 『문탁네트워크
일명 문탁.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거쳐 지금 <문탁네트워크>까지 20년 넘게 인문학공동체에서 공부하고 있다. <수유+너머> 시절에는 한국근대젠더 연구를, <문탁네트워크>에 와서는 인류학과 선물의 공동체, 또 동양고전과 윤리적 주체 문제 등을 탐구했다. 최근에는 공동체와 영성, 공동체와 양생, 늙음과 죽음 등에 관심이 많다. 한마디로 잡식성 공부. 이를 통해 공부와 현장이 결합되길 꿈꾼다. 지금 구성하고 있는 현장은 <길드다>라는 청년인문학스타트업과 <인문약방>이라는 새로운 콘셉트의 양생공동체이다. 『루쉰과 가족, 가족을 둘러싼 분투』를 썼으며, 함께 쓴 책으로 『문탁네트워크가 사랑한 책들』, 『루쉰, 길 없는 대지』, 『신여성?매체로 본 근대 여성 풍속사』, 『인물 톡톡』이, 풀어 엮은 책으로 『낭송 장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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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9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40g | 110*182*10mm
ISBN13
9791190351256

책 속으로

중산층을 조금만 벗어나 생각해 보면 사정이 달라진 것 같다. 혹시 가족주의는 이미 도처에서 삐거덕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륜과 이혼을 그린 숱한 드라마나 영화의 흥행 성공이, 대부분의 청년이 겪는 취업과 연애의 난관이, 한편에서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다른 한편에서의 백래시가 그걸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특히 지난 몇 년간 청년들과 일을 하면서 나는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청년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우리 세대가 청년시절에 경험했던 사회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점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하기 힘든 조건에 처해 있는 청년들에게 핵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게 딱히 유효할까, 라는 자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 물론 가족주의는 욕망의 배치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꼭 이성애 핵가족에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에 대한 새로운 질문, 새로운 접근,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은이의 말」중에서

조혼과 축첩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결혼이 가문의 결합이기 때문이고 가문이란 철저히 남성중심의 혈통사회이기 때문인 거죠.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은 소위 “공자왈 맹자왈”이라고 하는 사서삼경을 통해 획득한 유교이데올로기고요. 그런데 그런 공자의 제국, 위대한 공자의 제국들이 19세기 말쯤에 서양 문명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 거죠.
--- p.28

어머니가 집안의 물건을 내주면 어머니 대신 전당포에 가서 돈을 빌리고, 또 그 돈으로 유명하다는 의사를 초청해서 아버지를 보살피게 해요. 그런데 그 의사가 아주 희한한 약재를 주문하면 루쉰이 그걸 다 구해 와야 해요. 3년 서리 맞은 사탕수수 같은 건 평범한 축에 속하고요, 처음 교미한 귀뚜라미 한 쌍이라거나 ‘패고피환’이라고 낡은 북 가죽으로 만든 약 같은 걸 구해야 했죠. 어린 루쉰은 진짜 엄청난 고생을 해요. 그런데도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죠. 이런 경험 때문에 루쉰이 전통의학을 미신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나중에 일본 유학 가서 의대에 가는 걸 보면 말이지요.
--- p.37

루쉰은 단순히 그걸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아요. 반전이 있어요. 이게 루쉰의 놀라운 점인데요, 소설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만약 중국이 사천 년 동안 사람을 먹어 온 사회였다면 자기도 부지불식간에 사람을 먹지 않았을까, 라는 자탄을 하는 거죠. 자기만 전통 사회에서 쏙 빠져나오지 않아요. 자기도 그 일부라는 것을 루쉰은 뼈아프게 자각하죠. 그게 루쉰과 동시대의 다른 지식인을 구별시켜 주는 지점이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 이런 거예요. “사람을 먹어 본 적 없는 아이가 혹 아직 있을까?”라면서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라고 글이 마무리되죠. 루쉰에게는 어쩌면 전통 가족에서, 효라는 억압적 담론에서 아이를 구하는 일이 평생의 과제였는지도 모르겠어요.
--- p.41

루쉰은 독특해요. 전통을, 그 어마어마한 습속을 철저히 부정했지만 그 부정 속에는 자신도 있어요. 그래서 루쉰에게는 현실과 열망 사이의 팽팽한 긴장, 희망과 희망의 부질없음과 그 희망의 부질없음조차 근거 없다는, 그런 실존의 분투가 있어요. 주안과 쉬광핑 두 여자와의 이중적 결혼생활조차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전 비슷한 시대에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던 수많은 동아시아 청년들 중에 루쉰과 같은 사람은 없었다고 봐요. 최소한 우리나라 근대 남성들 중엔 없어요. 여자들은 좀 달라요. 여자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존재가 찢어지는 경험을 하죠. 비극적으로 생을 마치고요.
--- p.59

그런데 가정-학교-회사, 이렇게 근대국가 혹은 산업사회를 지탱하는 세 축이 선순환을 하던 시기가 끝났어요. 탈산업화 시대란 임노동을 통한 가족임금을 받을 수 없는 시대라는 뜻이에요. 된장찌개 보글보글도 더 이상 불가능하고 “아빠, 힘내세요”라고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아빠는 회사에서 잘려요. 이런 상황에서는 가족주의가 낙후된 것이라는 것을, 아무리 그리워도 이미 흘러간 옛 노래라는 것을 인식하는 게 중요해요. 아직도 핵가족에 미련이 있다면 마치 주식투자에 막차를 탄 것처럼 백전백패하게 됩니다. 세상은 이미 바뀌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질문을 바꿔야 해요.

--- p.77

출판사 리뷰

『루쉰과 가족, 가족을 둘러싼 분투』 지은이 인터뷰

1. 책에서 주로 근대적 핵가족의 성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근대적 핵가족이 이전의 가족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전근대사회의 가족[家]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과는 많이 다르죠. 그것은 혈연을 기반으로 하되 직계뿐 아니라 더 넓은 방계를 다 포함하는 가문(家門)과 같은 것입니다. 소설 『토지』의 최참판댁,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고사홍 대감댁 같은. 그런데 『토지』에서 보면 할머니도 아버지도 여읜 주인공 서희를 대신해서 집안의 주인행세를 하며 재산을 가로채는 조준구라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주인공 서희의 내재종숙(內再從叔)이에요. 7촌 아저씨인 거죠. 전통가족은 아무리 촌수가 멀어도 핏줄(족보)로 이어지는 한 하나의 가족경계에 포함시킬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보여지듯 ‘식솔’이라 표현되는 노비들도 가문의 주요 구성원이에요. 따라서 이런 전근대가족은 정서적 관계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에 가까워요. 생산공동체이자 사회적 안전망! 흔히 ‘환과고독’(鰥寡孤獨)이라 불리는,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들까지 돌보는 관계망이죠.

이에 비해 근대가족은 보통 서로 간의 성적 독점을 약속한 부부(바람 피는 거, 금지!!)와 이 부부의 미혼 자녀 한두 명으로 구성된 일부일처제 핵가족을 의미합니다. 이 핵가족은 남편은 돈(만)을 벌고, 아내는 살림(만)을 하는 성별 역할분담 속에서, 그리고 부부 공동의 자식에 대한 투자(너희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속에서 작동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족자산과 가족정체성이 대물림되는 되는 걸 우리는 흔히 ‘스위트 홈’이라고 부르죠. 하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 근대가족은 성립되자마자 위기에 부딪혔어요. 첫번째 요인은 페미니즘의 등장이죠. 여성들이 사적 영역에만 머물려 하지 않았거든요. 공적 영역에 진출했고 그 속에서도 결코 남자/남편의 보조적 역할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최근 상영된 넷플릭스의 「결혼이야기」도 그걸 다루고 있죠. 남편이 성공할수록 자신이 보잘 것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여주인공은 이혼을 감행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급증하고 있는 ‘졸혼’이나 ‘황혼이혼’도 그런 현상 중 하나겠죠.

두번째 요인은 산업구조의 재편입니다. 탈산업사회, 비(非)고용사회에서 남편의 ‘가족임금’은 결코 보장되지 않죠. 핵가족의 물적 토대가 흔들리는 겁니다. 더불어 정서적 위기, 돌봄노동의 위기가 도래하죠. 불륜의 일상화, 이혼율 급증, 아동 혹은 노인의 유기 혹은 학대….근대가족은 재편 중입니다.

2. 가족에 대한 루쉰의 생각을 여러 측면에서 다루고 계신데요. 루쉰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였을까요?

루쉰은 거대한 중국제국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던 19세기 말에 태어난 인물이에요. 그런데 루쉰은 그 제국의 몰락을 가문의 몰락으로 먼저 경험해요. 특히 사오싱 명문가의 장손이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가족관계의 모순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우선 할아버지가 입시 부정에 연루되어 투옥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몸져누워요. 그래서 루쉰은 아주 일찍부터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어요. 어머니가 집안의 값나가는 물품을 내어주면 루쉰은 그걸 가지고 전당포에 가서 돈으로 바꿔 의사를 불러요. 근데 이 의사는 또 루쉰에게 희한한 약재들을, 예를 들면 처음 교미한 귀뚜라미 한 쌍이라거나 3년 서리 맞은 사탕수수 같은 것을 구해오라고 해요. 그래도 효를 근본으로 삼는 전근대의 에토스 속에서 루쉰은 열심히 도리를 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속절없이 돌아가시죠. 그런데 집안 어른들은 루쉰을 도와주기는커녕 재산을 빼가려고 하거나 루쉰이 도둑질을 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립니다. 한마디로 루쉰은 가족에 질립니다. 그렇게 루쉰은 집안을 버리고 고향을 등지고 세상 속으로 도주를 감행합니다.

그래서 루쉰은 중국을 지탱해 왔던 인의도덕, 특히 효가 사람을 살리는 에토스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규범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해요. 이게 루쉰의 첫번째 소설이자 중국 최초의 근대소설, 『광인일기』의 주제입니다. 그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아이를 구하라~”인데, 어떻게 보면 루쉰 평생의 과제가 바로 그거 아니었을까요? 충과 효의 이름으로 자식을 죽이고 절열(節烈)의 이름으로 여성을 죽이는 전통적인 인의도덕과의 투쟁. 그런 습속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청년의 출현!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쉰 자신은 어머니가 정해 준 여성, 글도 모르고 전족(纏足)도 한 여성과 전통혼례를 치룹니다. 어머니와의 의리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파혼을 선언할 때 상대 여성이 받게 될 타격을 고려하여 감행한 것이지요. 그 순간 청년 루쉰은 죽은 게 아닐까요? 한참 후에 루쉰에게도 사랑이 찾아옵니다. 무려 열일곱이나 어린 제자였어요. 루쉰은 고민하고 결국은 “나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루쉰에게 가족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전통가족의 모순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했지만 그렇다고 낭만적 핵가족에 대한 판타지에 결코 빠지지 않았던 그에게 (그러기에 루쉰은 어릴 때부터 ‘생활인’이었습니다) ‘가족’은 끊임없는 질문의 대상, 사유의 대상, 분투의 대상이 아니었을까요?

3. ‘가족을 넘어 네트워크로’ 나아갈 것을 주문하고 계신데요.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더라도 ‘다른’ 관계를 만들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다른 네트워크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이미 근대 핵가족은 빠르게 몰락하고 있습니다. 그걸 아쉬워하거나 그걸 붙들려고 하는 건 낙후된 태도죠. 그리고 이미 일부일처제 핵가족을 넘어서서 의식의 차원에서나 형태적 측면에서 다양한 가족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동성커플, 사실혼, 반려동물과의 삶, 딩크족, 우애가족, 가족 내 이혼, 3세대동거, 모계동거, 폴리아모리(비독점 다자관계)…. 말 그대로 n개의 가족이 생겨나고 있죠. 이런 걸 저는 네트워크라고 부른 것이지요.

그리고 네트워크는 대안이거나 정답이 아니라 활동이고 실험입니다. 경제적 이유로 집을 함께 쓰는 셰어하우스, 밥이라도 함께 먹자는 소셜 다이닝, 마을공동체의 공동밥상, 노인부양이나 아동양육을 함께 하는 돌봄네트워크,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삶에 긴요한 문제들이고 그 어떤 것도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실험입니다.

특히 지금은 외벌이로도 맞벌이로도 제대로 살기 어렵습니다. 적게 벌어도 잘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의존의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향후 삶의 질은 (내가)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주변 사람과 얼마나 상호의존하는 관계를 만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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