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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존재론_운명의 ‘지도-그리기’(고미숙)
사주명리학 개요_운명의 열쇠를 찾아서(안도균) 비겁과다_빛나고 싶은 경주마(이경아) 식상과다_류머티즘, 나의 운명! 나의 스승!(오창희) 재성과다_바보야,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니까!(강보순) 관성과다_얌전한 척, 착한 척, 척하는 인생 고군분투기(김희진) 고생은 내 운명_돌봄과 사주팔자(이희경) 부록_사주명리학 용어 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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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다음엔 반드시 그것을 삶의 지혜로 바꾸는 훈련이 이뤄져야 한다. 아무리 커다란 역경을 겪어도 그것을 배움의 과정으로 변환하지 못하면 모든 것은 그저 산산이 흩어질 뿐이다. 아니면 평생 원망과 분노를 안고 살아가거나. 고난과 역경을 ‘삶의 기술’로 변주하기 위한 최고의 과정이 바로 이 ‘누드 글쓰기’다. 먼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겪었는지 치밀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몸의 습속과 욕망, 팔자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하나씩 곰곰이 짚어 본다. 이 과정에서 발휘되는 고도의 집중력과 명징한 관찰력,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용신(用神)이자 수행이 된다. 물론 이것은 글쓰기의 측면에서도 아주 색다른 장르에 해당한다. 어떤 인생이든 다 하나의 ‘서사시’ 혹은 ‘드라마’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형식이다.
---「글쓰기의 존재론, 운명의 지도 그리기」중에서 흔히 자기 사주에 좋은 운이 얼마나 있는지 혹은 좋은 운은 언제 들어오는지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 기대를 사주임상가의 말에 의존한다. 이것은 자기 운명을 대하는 좋은 태도가 아니다. 모든 과정이 생략된 채, 결과적으로 돈이 언제 들어오는지, 애인은 언제 생기고 건강은 어떤지를 묻는 것은 자기 운명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다. 이런 식으로는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운명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결과로 이어지는 촘촘한 원인망을 살피고 주어진 결과를 몸으로 수용하는 일이다. 즉, 모든 인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결국 자기 스스로 풀어 낸 사주명리가 가장 자기 자신을 위한 사주해석일 터이다. 따라서 사주명리를 스스로 익히는 것은 자신의 삶과 운명을 해석하는 아주 괜찮은 방법론이 될 것이다. ---「사주명리학 개요: 운명의 열쇠를 찾아서」중에서 비행으로 바쁘고 힘든데 대학원이라니 주변에선 그게 가능하냐며 많이 놀랐다. 내가 누군가? 비겁기운을 타고난 말 세 마리의 체력은 남들은 엄두도 못 내는 일들을 별 어려움 없이 해내게 했다. 전공이 관광경영이니만큼 대학원엔 주로 호텔이나 카지노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승무원은 나 혼자였다. 평소 만나기 힘든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과 업계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내가 승무원이라 더 주목받는 것도 좋았다. 이런 것들이 나를 더 빛나게 해준다고 생각했기에 힘든 줄도 몰랐다. ---「비겁과다: 빛나고 싶은 경주마」중에서 일반적으로 무토가 갖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도 이에 한 몫을 했다. 누군가의 돌봄을 기대할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려면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이 필요하다. 그래서일까, 무토는 위험을 피하기보다는 그 마디들을 넘으면서 만나는 힘겨움과 뿌듯함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거기다가 든든한 비견들까지 함께하니 좌절을 잘 모른다. 늘 자신이 있어 보인다. 언젠가 막내조카가 고3의 힘겨움을 토로하면서 “고모는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와?”라고 물은 적이 있다. 뭐라고 답을 했는지 구체적인 멘트는 기억나지 않지만, 세상에는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걸 믿는 데서 오는 자신감이 아닐까. ---「식상과다: 류머티즘, 나의 운명! 나의 스승!」중에서 주지하듯 난 어장관리 스캔들 이후 성공학으로 튀었다. 어장관리에서 성공학이라니?! 대체 이 뜬금없는 전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흥미로운 건, 사건만 놓고 보면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이 별개의 사건들이 명리학적인 시선에서는 하나로 꿰어진다는 점이다. 바로 재성으로 말이다. 재성이 남자에겐 이성·돈·일·능력에 대한 욕망이자 운동성이라는 것을 상기해 보면, 어장관리 스캔들 이후 성공학으로 도피한 행보는 재성과다로 촉발된 문제를 다시 재성으로 풀려고 한, 그야말로 재성의 기운을 쓰는 일이었다. 참으로 타고난 기운대로 살았던 셈이다. 암튼 이때부터 난, 9년간의 긴긴 성공학 로드에 발을 내딛게 된다. ---「재성과다: 바보야,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니까!」중에서 관성이 발달한 사람은 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다.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고 소극적이면서도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렇다고 남들 앞에서 잉꼬부부 연극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남편은 유독 나와 둘이 있을 때보다 다른 사람 앞에서 나를 무시했고, 내겐 그게 더 허세의 연극처럼 느껴졌다. 친구나 동네의 선배 엄마들은 남자들은 다 그렇다면서 잘 받아 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들에 공감이 되긴커녕 화가 났다. 남자들은 그럴 때 보면 어린애 같다는 둥, 큰 아들 하나 더 키운다고 생각하라는 둥, 그런 말들이 역겹고 징그러웠다. 강한 남자에게 끌려 선택했건만, 어린애나 아들처럼 달래 가며 잘 살아 보라니!! 편관여성에겐 불가능하다. 물론, 이 말은 너른 마음으로 포용하라는 의미라는 건 알지만, 그 비유적 표현에 공감되지 않았고, 포용하고 굽히는 것은 내 좁은 소견머리로는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관성과다: 얌전한 척, 착한 척, 척하는 인생 고군분투기」중에서 |
“글쓰기가 너를 살리리니, 이제 번뇌의 ‘사주’ 커밍아웃이 시작된다!”
-사주명리와 글쓰기의 조합, 신개념 치유법의 탄생 ‘누드 글쓰기’! “아이고, 내 팔자야!!” 외마디 외침으로 시작되는 팔자타령. 내 인생은 도대체 왜 남들 다하는 것, 남들 다 가진 것, 남들에게 당연한 것과 별도로 굴러가는지, 이 꼬인 인생에 과연 해답은 없는 건지. 어느 어느 산에서 수련을 하고 왔다는 도사님을 찾아도, 서가에 가득한 심리학책을 열독해도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프다. 아프고 또 괴롭다. 아픔과 괴로움, 둘은 아주 종종 겹쳐진다. 암은 감기만큼 흔한 돌림병이 되었고, 자폐증과 우울증, 각종 정신질환은 숫제 스펙이 될 지경이다. 몸이 아프니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괴로우니 몸이 더욱 아프다. …… 사랑이 깨지고 가족이 무너지고 친구와 이웃이 사라져도, 그래서 고독과 불안에 떨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왜?’라는 질문을 던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법과 제도, 정신분석가 혹은 심리치료사에게 맡겨 버린다. 그럴수록 삶과 존재의 간극은 커져만 간다.”(고미숙, 「글쓰기의 존재론」, 11쪽) 미신 내지는 거리에 즐비한 사주카페로 소비되는 ‘사주팔자’를 가지고 무려 ‘자기구원’을 모토로 사주 글쓰기를 시도한 『몸과 삶이 만나는 글, 누드 글쓰기』(이하 『누드 글쓰기』)가 나오게 된 이유다. 『사주명리 한자교실, 갑자서당』에 이어 두번째로 선보이는 출판사 ‘북드라망’의 신개념 사주명리 글쓰기책, 『누드 글쓰기』는 사주명리학과 인문의역학을 기반으로 자기구원으로서의 앎과 수련을 위해 함께 공부하는 공동체 ‘감이당’에서 진행된 일종의 ‘자기이해&비전탐구 프로젝트’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을 필두로 한의학과 명리학을 함께 공부하는 학인들 사이에서 ‘누드 글쓰기’라고 하는 하나의 장르가 될 정도로, 이 ‘치유로서의 글쓰기’는 자기 삶의 풀리지 않는 상처와 응어리를 풀어내는 실천적 수단이 되었다. ‘이야기’가 되는 순간, 상처는 사라진다-자기구원으로서의 글쓰기 산다는 것은 하나의 틀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기가 살아온 날을 해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면 우리는 길을 잃고 만다. 자기가 어디에 어떻게 왜 서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면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우스개로, 노래가사로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라는 말을 자주 흥얼거린다. 그런데 “우울증, 각종 정신질환이 숫제 스펙이 된” 그 언젠가부터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꽤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잃어버린 나를 찾는다며 인도로 떠나 보기도 하고, 상처받은 기억을 꽁꽁 안고서 매일같이 눈물을 찍어내기도 한다.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큰소리가 끊이질 않던 집안, 빚이 턱까지 차오르는 참혹한 집안경제…… 그 모든 게 소위 트라우마가 되어 자신을 괴롭힌다. 수년, 혹은 수십 년 전의 상처를 떠올려도 그 시공간의 자장이 그대로 따라와 지금의 자신을 뒤흔든다. 누구에게 말하자니 나의 자의식이 허락하질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 그대로 담아 두고만 있기에는 살아가기가 너무 힘이 든다.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그것은 생채기 가득한 자신의 과거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 ‘앎’은 그 거리에서 발생한다. 나를 떠나 나를 보는 것-그럼으로 볼 수 있게 되고, 알 수 있게 되고, 배울 수 있게 된다. 상처를 품고 있지 말고 내놓으라는 것은 “그게 뭐 상처씩이나 되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라”는 말과는 다르다. 상처에서 배움이 일어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인 것. 그리고 그 배움이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기술로 이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아무려나 우리는 살아 있기 위해서, 그리고 기왕이면 ‘잘’ 살아 있기 위해 존재하므로,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번뇌를 세상에 커밍아웃한다는 것은 곧 실존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운을 열어드립니다-개운은 셀프, 사주팔자도 셀프 사주팔자를 따질 때 크게 작용하는 것 중 하나가 10년 주기로 변하는 대운(大運)과 세운(歲運)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행운이 있기를 바라지만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운(運)’이 있다. 관건은, 그 운을 어떻게 여느냐(開運), 그 운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느냐 하는 자신의 의지와 행위에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 어떻게 판단하느냐 하는 것, 어떻게 삶의 방향을 가지고 갈 것이냐 하는 것! 우리가 세상에 나면서 첫 숨을 쉬는 순간 이미 운명의 바코드는 우리의 이마에 고스란히 박혔다(사주팔자).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으므로 어떻게 살 것인지 우리는 결정하고, 살아가면 된다. 무작위 집단에게 자기가 과연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며 안달하며 자의식과 씨름하며 내내 팔자 탓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나에게 주어진 팔자를 긍정한 연후에 그 여덟 개의 카드(八字)를 가지고 어떻게 내 ‘명’을 돌릴지[運命] 탐구하고 궁리하며 살아갈 것인가. 자기 몸(과 마음)은 모름지기 셀프로 구하는 게 정답이라며 『누드 글쓰기』로 사람들에게 사주명리학을 권하는 이 사람들, 이들과의 만남은 분명 당신의 삶을 바꿀 것이다. 당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존재의미이고 누드 글쓰기의 미션이다. 우리 자신을 보자, 그리고 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