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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를 대신하여 비행기가 ‘대체로’ 사라진 하늘 아래
1 아시아의 드문 기억 ─ 사이공 2 신화와 역사 어디쯤의 고도 ─ 교토 3 중국이 세계였을 때 ─ 상하이 4 돌이켜보면 이미 이 도시에 있지 않고 ─ 상하이 5 세 작가의 도쿄, 세 개의 근대 ─ 도쿄 6 일본의 마음, 텅 빈 중심 ─ 도쿄 7 아직 더 기억해야 하는 이름 ─ 타이베이 8 그래도 하노이는 옳았다 ─ 하노이 9 일본 ‘너머’에 있는 ─ 오키나와 10 다시 이광수를 만나는 법 ─ 서울 책 뒤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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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하면서도 흥겨웠던 첫 번째 일본 여행 이후, 나는 뻔질나게 해외여행을 다녔다. 여권도 몇 번이나 바꾸었다. 그래도 뒤늦은 ‘베를린의 횡재’가 찾아올 때까지는 한 번도 아시아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특별히 작정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쳇바퀴 돌듯 늘 아시아의 대지를 떠돌고 있었다.
한번은 두만강 강변을 따라 옛 소련제 자동차를 세내어 타고 가는데 내 옆구리 쪽 문짝이 덜컹 떨어져나갔다. 기겁한 내가 뭐라 말도 잇지 못하는데, 운전기사는 항다반사처럼 태연히 내려 문짝을 도로 달았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게 외려 고마웠다. 거기 옌지에서는 쑤이펀허에서 중러 국경을 넘어 우리가 한때 ‘원동’이라 불렀던 시베리아 땅으로 뭔가를 팔러 간다는 조선족 사내들과 아침부터 배갈도 나눠 마셨다. 울란바토르행 국제 열차를 타고 가던 어느 새벽 문득 눈을 떴을 때에는 얼어붙은 황막荒漠 위를 이리 떼처럼 사납게 날뛰던 눈 폭풍도 목격했다. 티베트의 고원에서는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뒤바뀌는 날씨에 넋을 잃었다. --- p.11 나는 다시 아시아의 우기를 걷는다. 매일같이 한 시간씩 폭우가 쏟아지던 도시들. 바나나 잎에 듣던 빗줄기, 그리고 그 상쾌한 빗소리. 나는 루앙프라방의 어느 카페에서 새삼 식민주의자 행세를 하며 단돈 1달러에 맛 좋은 원두커피를 마셨고, 수 세기를 폐허로 버텨온 앙코르의 어느 사원에서는 밀림의 불타는 노을을 배경으로 펼쳐진 반딧불이들의 황홀한 군무에 까무룩 넋을 잃었다.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인도의 북쪽 끝 다람살라에 도착한 건 아직 캄캄한 꼭두새벽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수염이 무성한 사내들이 내 팔이 마치 자기들 것인 양 서로 잡아끌었다. 나는 화도 내지 못하고 그중 억센 한 사내가 끄는 대로 끌려갔다. 알고 봤더니 그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더 없이 착한 무슬림이었다. --- p.15 1993년의 첫 번째 일본 여행에서 ‘재일조선인작가를 읽는 회’라는 모임을 만났다. 대부분은 나고야 일대에 사는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모임이 처음 발족한 것은 1977년 12월이었다. 월 1회 정도로 독서회를 열었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1980년부터는 연 1회 『가교』라는 동인지를 펴내기 시작했다. 그 후 “문학을 통해 재일동포의 생활과 사상을 접하고, 스스로의 차별 의식과 제도의 차별을 극복하는 관점에서 민중 연대의 기저를 찾겠습니다”고 한 기치를 43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모임은 2020년 4월로 무려 466회째를 기록했다. 그동안 이들은 김석범·김시종·이회성·양석일·유미리 등 저명 작가 외에도 여러 신진 작가들까지 눈여겨보며 쉬지 않고 작품을 읽어왔다. 나는 무엇보다 평범한 시민들이 모여 그처럼 열심히 공부를 한다는 사실 자체에 큰 충격을 받았다. --- p.18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아시아 작가들의 소설 작품 총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분량상 특수한 경우라 할 수 있는 중국과 일본은 제외했고, 타이완과 홍콩과 티베트와 오키나와를 따로 분류했다. 하지만 제국주의자가 아닌 이상, ‘국경’을 정하고 ‘국적’을 부여하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비매품에, 아마추어 역자들이 학교 교지에 번역한 단편들까지 다 따져도 1,300여 편이었다. 그중 중복 출판이 한 100편은 될 것이고, 이중국적이나 디아스포라 등 국적이 애매한 경우도 꽤 많았다. 또 타고르처럼 한 사람이 150편 넘게 소개된 경우도 고려해야 한다. 이것저것 다 빼면 어떻게 될까.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 하나하나를 다 꼽아도 1,000편이 되지 않는 건 분명했다. 세상에, 근대 100년간 최소 마흔다섯 개 이상의 ‘나라’를 대상으로 이 땅에서 출판한 모든 작품의 양 치고는 터무니없이 빈약했다. 단 한 편의 단편조차 번역되지 않은 나라도 수두룩했다. 상황이 이러매, 메이지 유신 무렵부터 워낙 번역에 공을 들인 일본하고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게 우리의 아시아였다. --- p.21 아시아의 근대는 대개 식민의 역사로 문을 연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외국 세력이 처음 침략의 발길을 내디딘 곳은 중부의 다낭이었다. 1887년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연방의 일원이 된다. 같은 보호령이라도 북부 ‘통킹’과 달리, 중부는 ‘안남’이라는 이름으로 명목상 베트남 황제의 자치가 허용되었다. 반면 ‘코친차이나’라고 불린 남부는 말 그대로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고, 외세의 개입 역시 가장 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베트남 문학을 접하면서 뒤늦게 깨달은 것은 대개의 소설가들이 하노이를 포함해 북부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현재 활동 중인 작가들만 따져도 레민퀘, 바오닌, 호안타이, 도안레, 마반캉, 판티방안, 응우옌후이티엡, 호앙밍뜨엉, 이반 등이 모두 북부 출신이다. 물론 우리말로 번역된 작품들을 대상으로 할 때 그렇다는 말이고 당연히 내 견문이 좁은 탓이겠지만, 실제 응우옌옥뜨를 빼면 남부 출신 작가로서 얼른 떠오르는 이름은 없다.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의 작가 반레는 바오닌과 마찬가지로 열일곱의 나이로 전쟁에 뛰어들어 마지막 통일의 순간까지 전선을 누볐다. --- p.34 어딘가 낯설었다. 뭐지, 싶었다. 시계탑 아래 우뚝 선 동상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호찌민이 일어섰다! 그가 어린아이를 안고 인자한 눈길을 보내던 좌상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 자세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평양이나 경북 구미 시의 황금 동상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박한 크기였지만, 그래도 그건 이미 내가 알던 사이공이 아니었다. 동상을 일으켜 세우는 순간, 호찌민의 이름을 딴 도시는 아시아의 그 어떤 도시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었던 최고의 매력 중 하나를 스스로 없애버린 셈이었다. 20년 전 내가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사람들은 너나없이 자랑스럽게 “박 호(호 아저씨)”를 말했다. 그때 도시는 무척 가난했지만, 좌상을 가리키며 설명을 보태던 베트남 사람들의 눈빛에는 자부심이 넘쳤다. 껌팔이 소년도, 그림엽서를 파는 아주머니도, 시클로 운전수도, 외국인의 난데없는 질문에 얼굴이 빨개지던 여대생도. 나 역시 가슴에 기꺼이 외경심을 담고서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고 또 찍혔다. 그런데 이제 호찌민은 더 이상 ‘호 아저씨’가 아니었다. 아이들과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그는 갑자기 소환되었다. 서방의 연출자라면 그걸 ‘죽은 왕의 귀환’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소환된 순간, 그는 아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이웃집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헌 타이어를 잘라 만든 슬리퍼를 신고서도 당당하게 사회주의 형제국의 지도자들을 만나던 그가 아니었고, 허름한 카키색 옷을 입고서도 입가에 늘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가 아니었고, 나라를 되찾은 이후에도 평생 우거를 떠나지 않았던 그가 아니었다. 이제껏 스무 번도 넘게 베트남을 들락거렸지만, 나는 그날 비로소 ‘내 베트남’에도 어딘가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 p.58 동아시아의 주요 도시들은 저마다 다른 처지에서, 또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근대를 맞이했다. 가장 먼저 근대를 맞이한 것은 과거와 가장 명징한 단절을 선택한 도쿄였다. 가장 명징한 단절을 선택했기에 가장 먼저 근대를 맞이했는지도 몰랐다. 그때까지 존재조차 희미했던 천황이 ‘얼굴’을 지닌 현인신現人神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자, 과거는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사무라이는 칼을 놓았고, 중들은 절에서 쫓겨났다. 도쿄는 스스로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슬로건을 내세웠다. 동아시아의 다른 도시들은? 베이징과 서울과 하노이는 완강히 빗장을 걸어 잠갔다. 칼과 창 몇 자루와 자존심으로 군함과 대포를 상대하려 했다. 분투했고, 장렬했다.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처참한 능욕이었다. 강제로 당한 탈아입구. --- p.110 춘원 이광수가 상하이에 나타났다. 그것이 1913년 연말, 그가 아직 고주孤舟라는 호를 쓸 때였다. 그는 일엽편주, 말 그대로 외로운 배 같은 신세였다. 정주 오산학교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두었고, 그저 착하기만 한 아내와는 기약도 없이 헤어졌다. 압록강 강변에서 그가 올라탔던 배가 어느덧 황푸강 강변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실 그는 국제도시 상하이에 어울리는 인상과 차림이 전혀 아니었다. 값싼 청복에서 번진 푸른 물 때문에 모가지며 손이며 온통 퍼렇게 물이 들었는데, 그나마 배를 탄 일주일 동안 한 번도 갈아입지 못해 퀴퀴한 제 몸 냄새에 제가 먼저 코를 돌릴 정도였다. 어쨌거나 그는 궁상스러운 보퉁이를 들고 황푸 부두에 내렸다. 그런 다음 곧 안개 속에 잠긴 상하이의 시가, 강에 뜬 각국 병선과 상선, 뚜벅뚜벅 다니는 양인들과 헬레헬레 떠들기만 하는 청인들, 그 속으로 들어갔다. …이광수가 찾아간 그 집은 장차 『임꺽정』을 쓰고 신간회를 주도할 벽초 홍명희가 다른 조선인 망명자들과 함께 살던 셋집이었다. 이광수가 고주라는 호를 썼던 것처럼 홍명희도 그때는 가인可人이라는 호를 썼다.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떠올리다 보면, 그 시절 어떤 이유로든 조선을 떠나온 그들은 우리가 지금 말하는 상하이가 아니라 우리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도시 ‘상해’에서 살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 p.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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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을 담은 아시아 근대문학, 여행자의 지도가 되다
“아시아는 소수, 주변, 방언의 다른 이름이었다 인구가 전 세계의 5분의 3을 차지해도 늘 소수였고 서구 문명에 토대를 두지 않은 이상 늘 주변이었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니 늘 방언이었다. 문제는 이때의 방언이 비단 언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인데 그건 사실 표준의 외부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발길은 시간 위를 걷고 눈길은 정신을 따라 흐른다 하늘에 비행기가 없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절, 소설가 김남일이 가까운 나라의 여러 도시를 여행한 기록을 모아 책으로 묶었다. 베트남의 사이공과 하노이, 중국의 상하이와 대만의 타이베이, 일본의 교토와 도쿄와 오키나와, 그리고 서울. 모두 그가 가보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책으로 읽은 도시들이다. 저자는 스스로 이 글을 ‘기행문일 수도, 독후감일 수도, 또 어쩌면 몽상의 기록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땅 위에서 시작된 발걸음은 영락없이 글 속으로 이어진다. 혹은 거꾸로, 글 한 자락을 따라 걷기 시작한 걸음이 시간도 공간도 뛰어넘어 금세 지금의 그 도시로 내닫는다. 감정이, 욕망이, 사상이, 시대가 담기는 문학은 ‘도시’가 그러하듯 이미 그 자체로 공간인 셈이다. 중요한 건 땅이 아니라 사람이다 김남일은 뇌리에 깊이 박인 문학 작품을 지도 삼아 도시를 걸었다. 이 땅에서 소설가로 평생을 살고도 한국 문학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며 우리 근대 작가들이 숨 쉬던 세상으로 들어갔던 것처럼(『염치와 수치』), 『어제 그곳 오늘 여기』의 여행 역시 그에게는 역사의 궤 안에서 등을 기댄 이웃 나라의 ‘그때’를 더듬는 순례 길이었다. 도시를 보는 것은 곧 그곳에 사는 사람을 보는 것이다. 글을 읽는 것 역시 사람을, 삶을 읽는 것이다. 김남일이 찾은 도시들은 좋든 싫든 이방인의 흔적이 짙게 드리운 곳, 한참 뒤늦게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곳이다. 낯설 것도 없는 이 도시들의 이름이 우리 귀에 익은 것은 언제라도 쉽게 날아가 소비하고 돌아올 수 있게 된 최근 30여 년간의 경험에서 비롯됐을 뿐이다. 해묵은 더께마저 낭만적인 관광지. 그런 도시에서 저자는 포장 아래 켜켜이 쌓인 본토박이의 오래된 체취와 정념의 응어리를 읽어냈다. 여느 관광과는 시작도, 끝도 판이한 소설가의 여정은 결코 물리적인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고 ‘지나간 현재’를 좇는 그의 뒤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100년 전 어느 광장과 50년 전 골목이 펼쳐지고, 이제는 글로 남은 사람들의 밭은 숨과 땀내가 공기에 맴돈다. 식민의 역사로 근대를 맞이한 동아시아의 이웃 도시들 사이공과 하노이 앙드레 말로와 조지 오웰, 헤르만 헤세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그린 아시아는 식민지라는 렌즈 안에 존재했다. 프랑스에 이어 미국까지,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관통한 침탈의 흔적이 사이공과 하노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서구 제국이 남긴 흔적 위에서 베트남은 통일이 될 때까지 흉악하기 그지없는 전쟁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앞을 보고 내달리기 시작한 베트남은 이후 50년간 대단히 변화무쌍했다. 그리고 ‘통일 베트남의 자존심’ 하노이는 2019년 2월, 북미 정상회담의 무대로 다시 한 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지난 세기 큰 전쟁을 세 번이나 끝냈다는 자부심이 ‘평화의 수도 하노이’라는 수식어로 빛을 발했다. 때마침 저자 김남일은 문학하는 동료들과 함께 그날 그곳에 있었다. 상하이 상하이의 풍경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다. 반식민지 조계 시절의 유럽풍 건물 꼭대기마다 오성홍기가 펄럭인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를 맞은 곳은 ‘탈아입구’의 슬로건을 내걸고 과거와 단절한 도쿄였지만, 베이징과 서울과 하노이는 완강히 빗장을 걸어 잠갔다. 그런 가운데 상하이는 극적인 방식으로 근대를 맞이했다. 영국이 조계를 설치한 와이탄에는 곧 프랑스가, 또 다음에는 영국과 미국이 공동 조계를 세웠다. 도로가 깔리고 은행과 극장과 양행이 쑥쑥 자라나면서 도시의 모습은 급격히 달라졌다. 이 도시 구상에는 미국도 빠지지 않았다. 대륙에 남은 제국주의의 유산은 혼돈의 기억을 품은 채 ‘중국몽 아적몽’ 구호와 더불어 천연덕스럽게 21세기의 첨단을 달리고 있다. 도쿄 이광수가 세계 일주를 하겠다며 건너간 상하이에서 우리는 그와 함께 망명자 홍명희를 만난다. 이후 두 사람은 도쿄에서 유학하며 함께 지낸다. 대문호 루쉰으로 하여금 조국의 현실을 고민하게 만든 도쿄, 훗날 전쟁에서 패하고 불안과 자조가 지배하던 시기에 미시마 유키오가 천황제 국가 재건을 외치고 롤랑 바르트가 기호화한 그 도쿄였다. 일본 유학 시절 루쉰은 나쓰메 소세키를 읽었다. 심지어 루쉰이 한때 기거한 집이 소세키가 살던 바로 그 집이었다. 그러나 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라는 소세키는 실상 영국 유학에서 잔뜩 주눅이 든 터였다. 그런 소세키를 이광수 역시 중학 시절부터 애독했다. 타이베이 김남일의 아시아 목록에서 대만과 홍콩과 티베트와 오키나와는 다른 갈래로 자리한다. 그는 타이베이에서 대만의 또 다른 켜를 보았다. 한때 일본의 포장이 씌워졌던 이곳에는 중국과의 단층이 오히려 더 뚜렷하다. 대만의 근현대는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배경으로 한다. 사회 인프라는 물론이고 서양의 관습과 제도, 문화예술 사조, 음악과 연극 등이 모두 일본어로 전수되고 학습되었다. 일본을 통한 서구화는 한국의 형편과 다르지 않지만 대만은 이를 ‘현대화’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중국과의 관계는 양상이 달랐다. 일본이 빠진 뒤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이 권력을 차지했고, 대만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라는 2·28 사건이 일어났다. 본성인과 외성인의 갈등, 족군(성적) 문제가 대만 문화예술의 저변에 깔리기 시작했다. 본성인들은 “차라리 일본이 있을 때가 나았다”는 말을 가리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누군가 “일제 때가 나았다”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이어서 그는 본섬과 구분되는 대만의 다른 토박이들, 산과 바다에서 태어난 원주민 작가들을 만난다. 타이베이를 이야기하면서 작은 섬의 부족이 입는 차별과 피해를 빠뜨리지 않는 것은 저자의 단단한 작가 정신이 발동한 결과일 것이다. 오키나와 오키나와에 남아 있는 비극의 정서도 마찬가지다. 일찍이 일본 본섬과는 문화도, 풍속도 달랐던 이곳에는 복속의 설움과 태평양전쟁의 상흔이 깊이 새겨졌다. 섬을 제 것으로 흡수 처리한 일본은 결정적인 순간 오키나와를 버리다시피 했다. 한때 왕국이던 섬은 군사 기지로 전락했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기지촌’의 정서가 오키나와에 자리 잡았다. 패전 이후 거듭된 피해와 참혹한 희생, 나아가 왜곡되고 삭제되는 역사 속에서 오키나와는 이제 더 이상 추상적인 평화 따위를 믿지 않는다. 근대의 기억이 남지 않은 도시, 서울 그렇다면 서울은 어떤 곳일까. 소설가는 서울의 어떤 빛을 보았을까.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감격은 아득하고 눈물은 말라버린 도시.’ 그리고 연이어 이렇게 적었다. ‘회고와 향수야말로 서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서울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길을 잃는’ 쪽을 택했다. 발길은 갈지자다. 소년 염상섭을 따라 골목을 걸었고, 심훈의 신혼집을 찾았다. 김동인과 김유정의 한때를 엿본 뒤에는 참담한 마음으로 이상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다시 이광수를 만난다. 메이지 시대의 나쓰메 소세키, 신해혁명과 루쉰의 시대로 연결되는 우리 근대문학의 불편한 상징 이광수. 소설가로서는 시베리아의 광야와 일본의 뒷골목을 부유하다 서울에 몸과 마음을 맡긴 춘원을 피할 길이 없다. ‘아시아의 근대’라는 범주 안에서 우리의 당시를 이야기할 때, 이런저런 삶이 속속들이 포개진 가운데서 이광수가 갖는 상징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근대,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믿음직한 돋보기 김남일의 여정은 결코 평평하지 않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단편적인 정보들이 그의 여행과 더불어 입체가 된다. 지금의 모습을 있게 한 과거의 공간, 우리 모두가 주연이기도 조연이기도 한 문학 작품이 그가 거닌 세상이다. 여행에서 그는 문학을 이룬 사람들, 그 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만난다. 후대 사람의 한 가지 권한으로 시대와 무대를 종횡으로 엮으면서 실재했던 사람들, 결코 남 같지 않은 작품 속 인물들을 끄집어낸다. 『어제 그곳 오늘 여기』는 그 안에 품은 풍성한 작품들과 더불어 또 하나의 행선지가 되고 지도가 된다. 담백한 목소리, 땅과 가까운 눈높이 덕분에 뚜벅뚜벅 제 발을 믿고 걸어간 여행자 김남일의 발자국은 믿음직한 이정표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