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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부 왜 근친혼인가? 신화 속의 근친혼 프랑스인 10명 중 9명은 샤를마뉴의 후손? 유럽 왕실의 근친혼 근친혼을 보는 다른 시각: 교회 vs. 유럽 왕조 근친혼 계수 2부 카페 왕조 롤랑은 샤를마뉴의 아들인가, 조카인가? 샤를마뉴는 누구인가?|근친혼과 이데올로기 전前부인과 사돈 맺은 루이 7세 알리에노르, 여걸인가? 요부인가?|파경을 맞은 결혼|제국의 운명 전前할머니의 손녀와 결혼한 루이 8세 80세의 알리에노르, 손녀딸을 위해 피레네를 넘다|로미오와 줄리엣|그 아버지에 그 아들|철의 여인, 블랑슈 드 카스티유 봉신의 약혼녀를 빼앗은 존 왕 영악한 막내아들|갑질로 봉신의 약혼녀를 빼앗은 주군|대헌장에 서명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군주 루이 9세와 헨리 3세, 동서지간의 군주 남불의 진주, 프로방스 백작령|중세의 웨딩 세레모니|두 자매의 사랑|영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프랑스인 필립 4세, 카페 왕조의 대가 끊어지다 미남왕 필립Philippe le Bel|필립의 계략|필립, 성당기사단을 공중분해하다|몰레의 저주|며느리들의 간통|카페 왕조의 종말 3부 발루아 왕조 중세의 세계 대전, 백년전쟁 누가 새 왕이 될 것인가?|중세의 세계 대전|백년전쟁의 진짜 이유|프랑스인에게 비춰진 백년전쟁 백년전쟁 때의 미치광이 왕, 샤를 6세 근친혼의 유전|천형天刑을 받은 샤를 6세|샤를 6세 vs. 헨리 5세, 불공정한 게임 프랑수아 1세, 장인이자 숙부인 루이 12세 루이 12세, 끝까지 아들을 원하다|탐탁지 않은 사위|이탈리아, 프랑스 군주를 부르다|프랑수아와 다빈치 프랑수아, 카를 그리고 헨리 혼인으로 연결된 트로이카|트로이카의 이력서 비교|프랑수아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도전하다! |이지력과 결단력의 군주, 카를 5세|황제 도전의 진짜 이유|프랑수아, 카를의 포로가 되다|반복되는 역사|프랑수아 1세, 카를 5세의 매형이 되다|황제의 이모를 버린 헨리 8세|헨리 8세의 선택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치 귀천상혼貴賤相婚|앙리 2세의 불행|카트린 드 메디치 여왕|3명 의 자식이 왕이 되다 4부 부르봉 왕조 부르봉 왕조의 시조, 앙리 4세 가톨릭 왕국의 신교도 국왕|바르톨로메오 대학살|여왕 마고Margot|선군善君의 최후 태양왕, 고모의 딸과 결혼하다 반복되는 근친혼|베르사유, 민중의 고혈|그랑 도팽Grand Dauphin, 사도세자|근친혼의 결실, 스페인을 접수하다 루이 15세, 친애왕에서 경멸왕으로 부르봉 왕가와 오를레앙 왕가의 근친혼|폴란드 공주와 결혼하다|퐁파두르 부인의 치마폭|실정의 연속과 왕조의 붕괴 조짐 루이 16세, 마지막 근친혼 마리 앙투아네트|국왕의 탈주|국왕과 왕비의 처형 5부 데이터를 통해 본 근친혼: 카페 왕조에서 부르봉 왕조까지 카페 왕조, 근친혼의 시작|발루아 왕조, 반복되는 근친혼|부르봉 왕조, 근친혼의 몰락 에필로그 주석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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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영적인 통제, 즉 근친혼의 금지를 통해서 세속 제후들이 세력을 키워 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같은 집안의 혼인이 빈번하면 할수록 그 집안은 교회의 통제 아래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세속 제후들은 교회의 통제로부터 기득권을 지키는 것에 집안의 명운을 걸었다.
--- p.33 카롤링거 왕조의 궁정에서 성적인 문란은 실제로 확인된다. 9세기경 카롤링거 왕국 내에서는 아직 기독교적인 도덕률이 정착되기 전이었다. 성적 문란의 원인은 동류 결혼(근친혼)이 당시 궁정에서 일반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9세기의 많은 필사본에서 근친혼의 예들이 자주 발견된다. 이를테면 4촌 간의 결혼, 촌수가 가까운 친척 간의 혼인 그리고 동일 가문의 혼인에 대한 금지들이 당대의 혼인 풍습에서 가장 이슈가 된 것들이었다. 이후 서기 743년에 열린 레스틴Lestines 공의회에서는 4대 이내의 조상이 같은 후손들은 결혼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다. --- p.49 열두 살인 블랑슈는 1200년 한 살 많은 루이 왕세자와 노르망디의 가이아르 성 아래의 작은 예배당에서 혼인서약을 하였다. 이 결혼으로 프랑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은 동맹국이 되었고, 영국도 프랑스와 먼 사돈이 되었다. 영국 왕비 알리에노르의 손녀가 프랑스의 왕자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 p.73 1214년 프랑스의 부빈Bouvines에서 필립 2세의 군대에 대패하고 귀국한 존을 기다린 것은 귀족들의 반란이었다. …… 노르망디를 잃은 존 왕은 잉글랜드 귀족과 신민들에게 무능한 왕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게다가 존 왕은 봉신의 여자를 빼앗은 파렴치한 군주였다. …… 존 왕은 분위기가 험악한 것을 눈치채고 마지못해 옥새를 내주었다. …… 이렇게 대헌장MagnaCarta은 탄생했지만……. --- p.89 루이 9세와 헨리 3세는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는데, 루이 9세는 남부 프랑스에 위치한 프로방스Provence 백작령의 마르그리트와, 헨리 3세는 프로방스의 엘에오노르와 결혼을 한다. 그런데 두 왕비는 자매 간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왕실이 동서지간이 된 것이다. --- p.91 필립 4세는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고 삼부회를 소집하여 신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낸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청을 남불의 아비뇽Avignon으로 옮겨 70년 동안 교황청을 프랑스 왕의 손아귀에 둔다. --- p.110 백년전쟁은 근사한 명분으로 포장된 전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발루아 왕조의 필립 6세와 그의 5촌 조카인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관을 놓고 벌인 왕실 간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발루아 왕가의 내전으로 볼 수도 있다. 필립 6세와 에드워드 3세의 공통 조상은 필립 3세이기 때문이다. --- p.138 프랑수아 1세(근친혼 계수 3.45퍼센트)와 루이 12세의 왕녀 클로드(근친혼 계수 5.784퍼센트) 사이에서 태어난 앙리 2세의 근친혼 계수는 무려 6.11퍼센트에 이른다. 발루아 왕들 중에서 가장 높다. 카페 왕조의 마지막 왕들의 근친혼 계수가 급증했던 것처럼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들도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 p.157 카를 5세는 이모인 캐서린이 헨리 8세에게 소박을 맞고 병까지 얻었기 때문에 헨리 8세를 증오하고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과 영국의 동맹은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카를 5세는 헨리 8세가 이모인 캐서린과 이혼을 하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승인한 책임이 교황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독일,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의 군대를 동원하여 로마를 약탈하였다. --- p.171 앙리 4세가 부르봉 왕조를 개창하면서 왕위에 오르지만, 그의 후손들은 부르봉 왕조의 시조인 루이 9세를 따라 루이라는 이름을 선호하였다. 영국에 헨리라는 이름이 왕이 많았던 이유는 플랜태저넷 제국을 일군 헨리 2세를 추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헨리 8세 이후 더이상 헨리가 안 보이는 것은 헨리 8세가 2명의 왕비를 사형에 처한 나쁜 이미지의 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 p.201 프랑수아 1세가 둘째 아들인 오를레앙 공 앙리를 피렌체 가문 출신인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s와 결혼시킨 이유는 그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심취된 이유도 있지만, 밀라노 공작령이 탐이 났기 때문이었다. --- p.205 앙리 4세의 가계도를 보면 첫 번째 왕비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와 친척 관계임을 알 수 있다. …… 정확히 말하면 앙리와 마르그리트는 6촌 간이다. 앙리 4세의 외할머니인 나바라의 마르그리트 왕비와 프랑수아 1세가 남매 간이기 때문이다. --- p.231 남편인 앙리 2세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왕국의 실권은 카트린 드 메디치의 손에 들어갔다. 게다가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샤를 9세는 그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카트린과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기즈Guise 가문은 위그노의 수장인 콜리니Coligny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 p.234 루이 14세는 1685년에 이 칙령을 폐지한다. 그 결과 무려 30만 명의 위그도들이 국외로 이주하였다. 이를 위그노의 ‘대탈출Huguenot Diaspora’이라고 부른다. 본래 엘리트가 많았던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프로이센으로 많이 이주하여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다. 프랑스가 근대를 거치면서 유럽의 최강국에서 미끄러진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위그노들의 대이주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 p.239 루이 14세도 아버지처럼 스페인의 왕녀 마리 테레즈Marie-Therese와 결혼한다. 그런데 촌수가 문제였다. 마리 테레즈는 펠리페 4세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루이 14세는 어머니(안 도트리슈)의 남동생(펠리페 4세)에게서 태어난 마리 테레즈와 결혼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루이 14세에게 펠리페 4세는 외삼촌이었다. 그런데 펠리페 4세는 동시에 루이 14세의 고모부이기도 했다. --- p.249 1700년에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루이 14세의 왕비이자 카를로스 2세의 고모인 마리 테레즈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립에게 스페인의 왕위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필립은 펠리페 5세로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한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를 계승한다는 것은 오스트리아에게 하나밖에 없는 선택을 남겨 주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훗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으로 유럽의 역학 구도는 크게 변하게 된다. --- p.264 위트레흐트 조약(1713)을 통해 부르봉 왕조의 필립 공은 스페인의 왕으로 인정을 받고 펠리페 5세로 스페인 왕위에 오른다. 단 펠리페 5세가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오늘날 스페인 왕조의 뿌리가 부르봉 왕조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이 14세는 마리 테레즈와 근친혼을 통해 결국 스페인 왕실을 손에 넣었다. --- p.265 당대에 유행했던 살롱문학의 본산을 제공한 것도 퐁파두르 부인이었다. 그녀의 살롱에는 볼테르 같은 계몽사상가도 자주 들렀다고 한다. 결국 18세기 말에 들이닥칠 프랑스혁명의 마중물 역할을 한 장본인이 프랑스 왕의 애첩이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 p.276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유럽에서 영향력이 약해졌고,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북미의 뉴프랑스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렇게 껍데기만 남은 프랑스 왕국을 루이 15세의 손자가 물려받는다. 1774년에 루이 16세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다. --- p.280 근친혼 계수 0퍼센트는 필립 1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다시 말해 이 책에 등장하는 3왕조의 33명 모두 근친혼을 통해 태어난 왕들이라는 뜻이다. 가장 높은 계수를 보이는 왕은 루이 14세의 증손자 루이 15세인데 그의 근친혼 계수는 9.52퍼센트에 이른다. 이 수치는 4촌보다도 더 가까운 근친혼의 관계를 의미한다. --- p.303 4촌 간의 결혼에서 태어난 자식의 근친혼 계수는 6.25퍼센트이고, 7촌 간이면 0.78퍼센트, 8촌이면 근친혼 계수가 0.39퍼센트……. --- p.303 프랑수와 1세는 루이 12세의 딸 클로드 드 프랑스와 결혼하는데, 두 사람은 5촌 당숙과 조카 사이였다. 즉 당숙부가 장인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서 태어난 앙리 2세의 근친혼 계수는 무려 6.11퍼센트에 이른다. 발루아 왕조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 p.309 루이 15세의 근친혼 계수는 카페 왕조 이래 가장 높은 9.52퍼센트에 이른다. 사촌 간의 근친혼 계수가 6.25퍼센트니까 9.52퍼센트는 3촌 정도라는 말이다. --- p.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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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 위주의 스캔들 모음이 아니다
‘근친혼’은 금기어다. 우리 사회에선 한때 동성동본 간의 결혼마저 금지했을 정도이니 당연하다. 때문에 근친혼 하면 음습하거나 다소 선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근대 이전 유럽 왕가에서는 근친혼이 흔한 일이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 왕실의 할머니’로 자리매김 되어 있고, 현재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노르웨이 국왕 하랄드 5세가 6촌 간이라는 사실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지은이는 근친혼의 역사적?정치적 배경과 사례를 짚어내어 근친혼을 정식으로 역사의 무대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에 따르면 근친혼은 가문의 재산을 보호하는 재산을 보호하는 좋은 방법으로 유럽 왕실에서는 삼촌과 조카의 혼인도 흔했다(34쪽). 여기에 교회는 ‘상속 재산’의 귀속을 노려 근친혼을 금지했지만 실제는 유명무실했다고 한다. 유럽 각국의 이합집산과 전쟁 이면에는 근친혼이 작용했음을 정색하고 다뤘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흥미 위주를 벗어난다. 유럽사의 숨은 동인動因을 드러내다 역사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뿌리 깊지만 숨겨진 동기와 배경이 작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왕이 국가의 정책을 좌우하는 군주국가에서는 왕들 간의 관계, 심리가 의외로 중요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를테면 책에 나오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이 그렇다. 이 전쟁은 프랑스 남서부 지방의 귀엔 영유권 다툼이 직접 원인이었지만 그 불씨는 12세기를 살아낸 아키텐의 알리에노르란 여성이다. 그녀는 루이 7세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넷과 결혼하는데 이 헨리가 뒤에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62쪽).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가 바뀌고 그 후손들 간에 프랑스 왕위계승권 논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데 그 알리에노르는 루이 7세와 5대 조부모가 같은 근친 간이었다. 영국 의회정치의 초석을 놓은 이가 프랑스 귀족이었다는 사실은 어떤가. 1263년 헨리 3세를 꺾고 영국 최초로 의회를 소집한 시몬 드 몽포르는 왕의 누이 엘에어노르와 결혼한 시몬 드 몽포르였다. 헨리 3세의 매제가 의회파의 수장이었던 셈인데 의회를 의미하는 ‘Parliament’는 프랑스어로 ‘말하다’라는 말(파를르망Parlement)에서 나왔다. 프랑스사를 이해하는 또 다른 틀 앙리 2세와 이탈리아 출신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는 모두 10대 조부가 루이 9세, 즉 성왕 루이였으니 이 역시 근친혼이다. 카트린은 1572년 신교도를 학살하는 ‘바르톨로메오의 학살’을 주도하는데 1598년 앙리 4세는 개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낭트칙령을 반포했다. 하지만 그의 손자인 루이 14세가 이를 폐지하면서 20만~100만 명의 위그노들이 해외로 이주한다. 산업과 경제의 주축이었던 위그노의 이탈로 프랑스의 쇠락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학자들 간의 정설이다. 국력의 쇠퇴가 뜻밖에도 신앙의 제약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프랑스 혁명으로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왕이 된 루이 16세는 어머니의 6촌 동생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했는데 이는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던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간의 정략결혼(287쪽)이긴 했다. 근친혼의 그림자는 짙었다. 요절한 인물도 많고, 거의 4촌에 가까운 근친혼으로 태어난 발루아 왕조의 샤를 6세는 ‘광인왕’이라 불릴 정도로 정신질환을 앓았다. 이 흥미로운 역사책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카페 왕조 초기에 미미했던 근친혼 계수는 왕조 말기에 2퍼센트에 이르고, 발루아 왕조에서는 6퍼센트를 넘기다가, 마지막 왕조인 부르봉 왕조에서는 거의 10퍼센트에 육박한다. 왕조의 몰락이 이렇게 다가오고 있었다.”(31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