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개인이 이루었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업적의 배경에는 세종만의 분명한 원칙이 있다. 국가 대사를 결정할 때는 충분한 토론을 통해 조정의 중론을 모으는 ‘숙의민주주의’를 원칙으로 삼았으며, 인재를 등용할 때는 출신 성분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에 따라 선발하는 ‘능력우선주의’를 인사 원칙으로 삼았다. 국가의 영토가 걸린 문제에서는 촌척도 양보하지 않았으며, 외교에서는 강대국에게 예를 갖춰 머리를 숙이되 철저하게 그에 상응하는 실리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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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조신들의 답변이 과장되거나 아부하는 면이 지나치면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갔다. 지방관들의 보고서 내용이 일의 본질과 무관하게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미사여구로 가득할 경우에도 주의를 주었다. 1437년 5월, 경기도 관찰사가 도내에서 보리가 한 줄기에 이삭이 네 개나 열린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관찰사는 사실 보고에 덧붙여 “신령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은 바로 육부와 삼사가 잘 다스려졌기 때문이니 상서로운 일을 경축하는 행사를 열자”고 제안했다. 세종은 기쁜 일이니 보리 종자를 개량하여 널리 보급하되 과장된 아부는 삼가라며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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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학문적 깊이에 더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키우려면 문학 공부에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시대정신은 융·복합이다.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 빅데이터, 양자컴퓨터 등 4차 산업혁명시대를 대표하는 기술들이 산업간 경계를 무너뜨리고, 가상과 현실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세종은 대표적인 융·복합형 지식인이자 리더다. 600년 전의 인물을 현재로 소환하여 살피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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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주자에 관한 일이라도 조신들에게 당당하게 소신을 밝혔다. 조신들도 임금의 혁명적인 발언에 더 이상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놀라운 것은 임금이 아니라 조신들이다. 승지 권채는 “주자의 제자 요씨도 가끔 주자의 이론을 반박하기도 했다”며 임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세종 19년이면 임금의 국정 철학이 농익을 때였고, 조신들도 임금의 별난 언행에 익숙해질 무렵이어서 이런 반응이 놀랍지만은 않다. 이처럼 세종은 기존의 질서와 학문체계를 끊임없이 의심했고, 이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의심이 가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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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소리라고 하면 고약해 못지않은 신하가 또 있는데, ‘소수의견의 대명사’라고 할 허조(許稠)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다 찬성하는 안건을 두고도 “혹시 이런 문제점이 있을지 모른다”며 반대하고 나서기 일쑤였다. 실록에는 “허조가 홀로 반대했다”는 대목이 자주 눈에 띈다. 다른 임금 같았으면 좌천시켜 한직이나 변방으로 돌렸거나 아예 파직시켜 내쳤을 테지만 세종은 오히려 그를 중용하여 중요한 일을 맡겼다. 나중에는 정승으로 올려 그를 최고로 예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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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최윤덕에게 4군 개척의 임무를 준 후 축성을 독려했다. 임금의 명을 받은 최윤덕은 농사일로 한창 바쁜 봄철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무리하게 축성 작업을 실시했다. 백성들의 민원이 그치지 않자 이조판서 권진이 세종에게 봄철의 역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권진은 농사가 끝나는 가을에 축성을 해도 늦지 않으므로 굳이 봄철에 서둘러서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에 세종은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다며 곧바로 잘못을 인정한다. 그리고 승정원에 명해 최윤덕으로 하여금 봄철에는 성을 쌓지 못하게 하라는 조치를 내린다. 실록에는 세종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부분의 표기를 ‘류(謬)’로 적고 있다. 세종이 자신의 잘못을 변명 차원에서 어물쩍 넘긴 것이 아니라 오류임을 깨끗이 인정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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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임금이 시시콜콜 국정 현안에 손수 개입해야 한다는 김정의 주장보다 인재를 뽑았으면 믿고 맡겨야 한다는 허조의 주장이 옳다고 봤다. 허조의 주장에는 바람직한 군왕의 인재관과 리더십 유형이 잘 제시되어 있다. 실제로 세종은 인재를 그렇게 뽑아 썼으며, 그런 원칙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세종 치세를 대표하는 명신(名臣)으로 평가되는 황희, 장영실, 김종서, 박연 등은 세종의 이런 인사 원칙과 리더십이 배출한 인재다. “의심이 나면 쓰지 않고, 썼으면 의심하지 않는다”는 세종의 리더십은 오늘날 글로벌 기업의 CEO들에게도 널리 영향을 미쳤다.
--- p.130
황희도 서얼 출신이라 출신 배경에 대한 편견이 없었으며, 맹사성은 양반 출신이었지만 사고가 유연해 여느 신하들과 달랐다. 두 사람이 세종 치세에서 중용된 것은 인재관이 임금의 코드와 잘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인으로 세종 때 벼슬이 2품까지 오른 윤득홍, 송희미 같은 장군도 천인 출신이다. 사헌부에서 특히 윤득홍의 출신을 문제 삼았지만 이때도 임금은 흔들리지 않고 그를 신뢰했다. 윤득홍이 일흔이 넘어 사직을 청했을 때도 허락하지 않았다. 군사전문가로서 그의 능력을 아꼈기 때문이었다.
--- p.141
세종의 귀는 늘 백성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 귀로 그는 백성의 고충을 들었고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물었다. 해답을 찾지 못할 때는 책 속으로 들어가 선인들의 지혜를 빌렸다. 재위 31년 6개월간 세종은 단 하루도 이 원칙을 저버리지 않았다. 세종의 듣는 법, 질문하는 법, 공부하는 법은 오직 백성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 원칙들이 그를 최고의 성군으로 만들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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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 해도 반드시 추진하는 실용적 관점을 취했다. 바쁜 가운데서도 단출한 변복 차림으로 최소한의 수행원만 데리고 자주 민생 탐방에 나서곤 했던 임금은 아무리 땀 흘려 일해도 가난을 벗지 못하는 고단한 백성의 삶을 몸소 살폈다. 그런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이것이 오직 백성을 위해 쓸모 있는 것이냐?”는 실용주의적 질문을 국정철학의 제1원칙으로 삼았다.
--- p.173
살인죄는 최종으로 임금의 재가를 거쳐야 관련자 처벌이 결정되었는데, 조서를 본 세종은 그 허술함에 조작을 의심했다. 임금이 의금부에 재조사를 명하여 마침내 진상이 밝혀졌다. 당시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은 이 일로 파면되었으며, 형조참판 신개와 대사헌 조계생을 비롯한 고위직 십여 명이 유배에 처해졌다. 세종은 법을 어긴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하게 처벌했다. 자신의 오른팔이고 왼팔인 황희와 맹사성도 원칙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 p.179
중요한 사실은 임금의 대책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화재를 계기로 도성과 궁궐의 화재 예방 매뉴얼을 만들도록 했고, 화재 발생 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도로를 넓히고 소방 방재시스템을 갖추도록 했다. 한양의 행랑에 방화벽을 쌓고 일정한 간격으로 우물을 파도록 했고, 종묘와 궁궐, 종루에 불을 끄는 기계를 설치하도록 했다. 특히 궁궐은 화재가 나면 무방비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를 지시했다.
--- p.193
세종은 자신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한 효령대군에게 군왕이 아니라 동생으로서 예를 갖춰 성심을 다해 모셨다. 술자리에서도 효령이 술을 따를 때 앉아서 받지 않고 반드시 서서 술을 받았다. 중국 사신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할 정도로 임금은 효령을 형으로 깍듯이 예우했다. 중국 사신의 지적에 대해 황희는 임금이 국가의 질서보다 천륜을 더 중시한다고 답했는데, 황희의 이 답변에 형제를 대하는 임금의 진심이 잘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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