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학자가 죽음과 슬픔, 운명의 현장에 있다가 스위치를 전환해 현재와 미래를 즐겼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느껴지는가? 어떤 이들은 나의 태도가 경건하지 않고 부적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내 생각은 다르다. 매일같이 덧없는 삶의 모습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목격하기 때문에 그리고 너무 많은 고통과 슬픔, 폭력을 경험하기 때문에 적어도 나 자신은 매우 행복하고 단단한 현실에 기반을 둔다는 느낌으로 살아가고 싶다. (…) 나는 작은 일에 흥분하는 일이 거의 없으며, 우울한 분위기와도 거리가 멀다.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축하할 이유이지 않을까?
---「트렁크 속의 여인」중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다비드는 분노에 차 있었고, 그것도 매우 큰 분노에 차 있었다. 그는 부엌에서 닥치는 대로 칼을 집어들었다. 그는 베른트의 목과 배를 찌르려고 두 번 시도했지만, 무작위로 잡은 무기는 둔하고 불안정해서 적절치 않았다. 그는 눈으로 간이 주방을 훑었다. 더 크고 두꺼운 다른 칼이 보였다. 그는 그것을 들었다. (…) 베른트는 흉부에 깊이 약 5센티미터의 자창을 입었다. 폐가 손상되었고, 긴장성기흉의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 첫 번째 공격은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공격을 받고 도망쳤다. 거실을 지나, 창문 쪽으로 가서 블라인드까지 갔다. 다비드는 그 뒤를 쫓았다. 그가 베른트를 두 번째로 찔렀을 때, 베른트는 그에게 등을 보인 상태였다.
---「소년의 복수」중에서
나는 단순히 부검뿐만 아니라 나의 의학적 소견을 판사, 검사, 변호사, 그리고 의사들에게도 알리고 대중과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법의학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법의학자가 아니라면 누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겠는가? (…) 예를 들어 머리를 발로 차는 행위는 법적으로 수십 년 전과 다르게 해석된다. 과거에는 판사들이 머리를 발로 차는 것이 목숨을 위협하는 행동까지는 아니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와 같은 법적 해석이 유효했던 긴 기간 동안 많은 피해자가 발을 사용한 공격 때문에 두개골이 손상되어 사망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이 판결에 고려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어떤 법조인도 머리를 차는 행위가 치명적이지 않은 주먹다짐의 일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았거나」중에서
많은 이가 법의학자가 하는 일이 매우 끔찍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일 시신을 검시한다. 그중에는 젊거나 나이 들거나 크거나 작은 이들도 있고, 훼손되거나 심하게 부패해서 알아보기 힘든 시신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부검이 부담되거나 힘들지 않다. 내가 무뎌져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전혀 다른 이유가 있다.
죽은 이들은 이미 죽음을 겪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죽은 이들은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다. 그에 비해 살아 있는 우리는 아직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것은 오히려 잔혹한 일일 수 있다.
---「폭격의 한가운데」중에서
나는 현장에서 받은 인상을 기록하기 위해 보고서를 작성한다. 나중에 피해자의 부상 유형과 범행 장소의 사물을 매칭하거나 이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 분명한 사실은 그곳에서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거실장의 유리는 부서져 있었고, 벽에는 끈적한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누군가가 처음에는 침대에 앉은 상태로 얻어맞다가 나중에는 바닥에 눕혀진 것처럼 보였다. 핏자국의 패턴이 그렇게 읽혔다. 일부는 침대 주변에서 점의 형태를 띠고 있었고, 일부는 느낌표의 형태였다. 몇몇 핏방울은 천장과 거실장 아래쪽까지 튀어 있었다. 그곳에서 육중하고 뭉툭한 형태의 폭력이 사용되었음이 확실했다.
---「생일 파티」중에서
2020년 봄, 코로나 사태로 인한 봉쇄령 조치가 처음 시행되었을 때도 비슷한 편지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새로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거나, 앞으로 분명히 감염되어 곧 죽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죽음이 두려웠던 이들은 자유로운 죽음을 택했다. 비극적인 논리다. 하지만 자살을 택한 이들 중 누구도 바이러스에는 감염되지 않았었다. 나는 초코스 교수와 사례 몇 가지를 모아 2020년 초여름 과학 논문의 일부로 발표했다. 이를 통해 사회적 고립, 지속적인 미디어 경고, 봉쇄령이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알려주고 싶었다. (…)
법의학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우리는 부검대에서 사람들이 어떠한 상태인지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사람들이 어떤 원인 때문에 사망하고, 어떤 건강 상태를 지녔고, 어떤 심리적 부담을 가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터널 속의 발」중에서
목격자도, 흔적도, 범행 도구도, 시신도 발견되지 않는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흔히 말하는 ‘완전범죄’일 것이다. 법의학자가 할 일도, 경찰이 수사에 착수할 만한 실마리도, 배정된 검사와 판사도 없는 사건. 그러한 사건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진 피해자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만이 있을 뿐이다.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완전범죄는 수많은 추리소설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시신이 사라지는 일은 거의 없으며, 경찰이 수사를 시작한 살인사건이 미해결로 남는 일도 매우 드물다. 그 사건의 범인이 유죄판결을 받게 되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어쨌거나 시신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처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절반의 시체」중에서
법정 진술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한 중년 남성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지 않고, 그저 진지하고 슬픈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빠른 죽음이었나요?”그 질문을 듣는 순간 그가 피해자의 아버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는 내가 그의 딸이 입은 모든 상처를 하나하나 세세하게 묘사하던, 그것을 묘사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 내내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법의학자의 역할을 잠시 잊고 싶다. 잠시 내려놓고, 그저 같은 사람이고 싶다. 마음 같아서는 그 남성을 안아주고, 애도와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
남성은 대답을 듣지 못한 상태로 그 자리에 있었다. 가족을 떠나보낸 뒤, 슬픔에 빠진 모든 유족이 알고 싶어 하는 그 질문. 오랫동안 고통스러웠을까요? 아니면 적어도 빠르게 지나갔나요?
그를 안심시켜야 할까? 미화하거나 상대화해서 이야기해야 할까? 거짓말을 섞어서 위로를 건네야 할까? 하지만 나는 결국 법정에서 진술한 대로, 진실을 택해야만 한다.
---「최후의 사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