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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2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292쪽 | 364g | 128*188*16mm
ISBN13 9791160406856
ISBN10 116040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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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흠모하는 소년의 피부는 도자기처럼 하얗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부드러웠고, 도자기 같은 피부에 종종 나타나는 분홍빛이 없었다. 그녀는 그 창백한 색깔을, 그 얼굴 속의 짙은 눈동자를, 이마의 윤곽과 완벽하게 나란한 앞머리를 사랑했다.
걸어가는 동안 그의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의 목소리는 오래전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그 소년들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짐작했듯이, 그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도 비슷한 부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제나 비슷한 부류를 알아보았다. --- p.46

그때, 지속될 수 없는 것은 시작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의 취향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가능성처럼 보였던 것이 흔히 그렇듯 45분이 지나자 더 이상 가능성으로 보이지 않았다. 많은 것이 괜찮았다고, 에벌린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즐거운 만남이었고, 당신 또한 즐거웠길 바란다고 말하고 싶었다. 에벌린의 잔은 여전히 채워져 있었고, 제프리의 잔도 마찬가지였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 p.89~90

그들은 자기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대화는 그렇지 않았으나, 본인들이 모르는 사이 그들의 우정으로 전과 달라진 방 안에는 그들의 삶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감정을 건드리지 않았고, 후회나 과거에 있었을지 모를 것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단어를 통제하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지나간 과거를, 그는 아직 그곳에 있는 것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녀가 커피를 내오면 그는 내리는 비나 차가운 봄의 햇살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고, 다시 와일드펠 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넓은 현관을 배경으로 계단 위에 서 있었고, 그의 백미러에 보이던 그녀의 모습은 곧 버드나무로 바뀌었다. --- p.117

남자가 비틀거리다 난간을 붙잡는다. 그리고 마치 재미로 그랬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얼굴에 난 땀이 보인다. 꼭 이마에 빗방울이 떨어진 것 같다. 또 한 칸 계단을 오를 때 그의 두 눈이 감겨 있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온다. 한 칸, 그리고 또 한 칸. 남자의 입 끝에 침이 묻어 있고, 입에 물었던 담배 두 개비는 계단 카펫 위에 떨어졌다. 이제 손을 뻗으면 남자를 만질 수 있다. 내 손끝이 그의 검은 옷소매에 닿고, 그 아래 있는 팔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가 굴러떨어진다. 난간이 부서진다. 쿵 소리가 나고, 또 쿵, 또다시 쿵 소리가 난다. 그리고 고요해진다. 업실라 부인이 나를 올려다본다. --- p.132~133

이 음악은 쏜살같이 달려나가다 부드러워졌고, 잔잔했고, 느렸다. 진홍색 벽지와 초상화 속 인물들의 시선 위에서 음악이 춤을 추었다. 음악은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 위에, 꽃병과 장식품 위에 머물렀다. 그러다 점점 위로 떠올라 천장의 새하얀 꽃잎에 닿았다. 브리지드가 두 눈을 감았고, 무용 선생의 음악이 어둠 속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음악의 선율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달라졌다. 개똥지빠귀의 노랫소리가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과, 브리지드가 스케나킬라 언덕을 넘을 때 옆에서 세차게 밀려들다 졸졸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음악이 멈췄을 때 침묵은 전과 같지 않았다. 마치 음악이 침묵을 바꿔놓은 듯했다. --- p.262

두 사람이 포옹하는 모습이 백화점 유리창에 반사되어 새겨졌다. 두 사람은 순간 그 이미지에서 우아함이 드러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 우아함이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연애에서 자신들에게 우아함이 있었으리라 짐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말하지 않았으나 이해한 사랑의 규칙은 끝나지 않은 것을 끝내는 괴로움 속에서도 깨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것이었다. 오늘 사랑은 조금도 부서지지 않았다.
--- p.28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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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소설을 읽다 가슴이 벅차올라 어쩔 줄 몰라 하던 어린아이였던 때가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남몰래 생각하며 밤잠을 설치던. 트레버의 소설들을 읽으며 그때 그 아이를 다시 만났다. 아아, 이건 너무 좋잖아. 트레버는 이 소설들을 통해서 누구나 마음속 깊이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그 비밀이 우리를 끝내 고독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놀랍게도 트레버 덕분에, 그 고독이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 백수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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