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움직임에 조급해진 러시아는 1884년 조선과 수교를 맺고 1890년 한성 내 최초의 서구식 공사관을 정동 언덕에 짓는다. 가톨릭 선교의 자유를 얻으려다 수교가 늦어진 프랑스는 1896년 창덕여중 자리에 무척 아름답기로 소문난 공사관을 건립하는데, 강제병합 뒤 조선총독부가 사용하다가 심상소학교를 세우는 과정에서 헐리고 만다. 벨기에는 1901년 수교 이후 회현동에 영사관을 짓는데,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보험회사와 군사시설로 사용되다가 1970년 옛 상업은행 소유가 된다. 회현동 부지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건물은 남현동으로 통째로 옮겨졌고, 지금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으로 사용 중이다. 한반도에 들어온 열강들이 공관 부지를 확보하고, 건축물을 짓고, 그들 의도에 맞게 운용하는 과정을 살피다 보면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몸부림치던 조선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엿볼 수 있다.
---「1장 서로를 경계하며 우후죽순 밀려드는 외국 공관들」중에서
신학교는 1891년 5월 정초를 놓고, 코스트 신부의 설계와 청나라 기술자의 시공으로 1892년 6월 25일 축성된다. 이 신학교가 조선 최초의 성직자 양성소 ‘용산신학교’다. 이를 소小신학교라 불렀는데, 이 학교는 1928년 혜화동으로 이전한다. 그후 건물은 성직자 휴양소와 주교관으로 사용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1960년대에 철거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대大신학교 교사는 소신학교 인근에 1911년에 건축되어 일제가 강제로 폐쇄하는 1942년까지 그 역할을 이어갔다. 건물은 잠시 공백기를 거쳐 1944년부터 성모병원 분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덕에 온전히 존치될 수 있었다. 1956년 성심수녀회가 설립되면서 건물을 인수했고, 수녀원과 사무소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성심기념관으로 쓰고 있다.
---「2장 순교하는 가톨릭, 병원과 학교를 앞세운 개신교」중에서
가로가 정비되자 한성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불결함이 급격히 줄어들고 옹색해 보이던 생활 환경은 활기를 띠었다. 아울러 상업도 보다 활발해졌는데, 모두 가로 정비에 따른 부수 효과였다. 넓은 도로는 산책하기에 맞춤이었고, 가게는 많은 물건을 진열해 장사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넓혀진 도로에는 가로등이 밤을 밝혔다. 가로 정비는 단순히 도로 폭을 넓히고 깨끗하게 정돈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도로망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는데, 이는 정궁으로 삼고자 한 경운궁을 중심에 둔 도시 공간구조 개편의 일환이었다. 고종은 개선문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가로망처럼, 경운궁을 중심에 두어 권위를 드러내려는 방사형 가로망을 꿈꾼 것이다. 이는 한 지점에서 각 가로의 움직임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을 갖춘 체계다. 방사형을 선택한 이유는 정세상 일본을 경계하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3장 근대화를 향한 몸부림, 경운궁 중건과 서양관」중에서
1908년과 비교해 용산기지는 군인 수는 물론이고 각종 중화기와 야포가 늘었고, 공병대대까지 주둔하면서 확장이 불가피했다. 그만큼 한반도에 주둔하는 일본 육군의 규모는 괄목할 만했다. 연병장, 사격장, 숙소, 공급처리시설 등 대규모 시설에 대한 소요가 생겨나면서 기지는 1916년 12월 2차 확장공사에 들어간다. 사단장 숙소를 시작으로 연병장, 사격장, 사병 숙소, 공급처리시설은 물론 매장지와 화장장까지 설치하는데, 확장이 완료된 때는 1922년 3월이다. 면적은 907만 제곱미터(약 274만 5000여 평)였다. 이때의 용산기지 공간구조는 해방 때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진다. 기지 북서쪽에는 보병부대와 야포부대가, 남동쪽에는 기병부대가 자리했는데, 이 과정에서 둔지산 자락 둔지미 마을 주민들이 보광동 쪽으로 강제로 이주당한다. 농토와 분묘가 또다시 훼손되면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앗긴 것이다.
---「4장 침략의 첨병으로서 우리를 옥죈 기구들」중에서
1908년경에는 일본인들이 한일 공동공원을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남산 서북서 자락의 약 100만 제곱미터(약 30만 2500평) 땅을 차입하겠다고 청원한다. 이에 송병준 등 친일파 관료들이 앞장서서 그 땅을 무상으로 일본인에게 영구 대여한다. 옛 남산식물원에서 3호 터널에 이르는 공간이다. 이 땅을 차지한 일제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이곳은 둘로 분리된 일본인 중심지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남산 기슭의 진고개와 왜성대 일대 그리고 군사용 조차장이었던 용산역과 군사기지로 조성 중이던 용산기지를 잇는 결절점이었던 것이다. 일제는 1908년 봄 공원 조성에 착수해 2년 만인 1910년 5월 29일 성대한 개원식을 치른다. 이 행사에 20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고종은 이를 기념해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이름을 친필로 하사하기까지 한다.
---「5장 치밀한 흉계로 경성을 장악한 통치기구들」중에서
일제는 일찍부터 경부선에 눈독을 들였고, 자기들 마음대로 조선 강토를 활보하며 불법을 자행하고 있었다. 일본 밀정은 이미 1885년부터 4년에 걸쳐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지리와 인문 정보, 경제 현황, 교통 등을 은밀히 조사한 바 있다. 또 사냥꾼으로 가장한 철도 기술자가 일제의 비호 아래 경부선 철도 예정지를 답사하고 측량한 뒤 1892년 보고서와 도면을 일본 정부에 제출한 사례도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한반도 침략이 자행된 1894년과 1899년, 1900년, 1901년 등 네 차례에 걸쳐 보완 조사를 시행했다. 그리고 일제는 실질적으로 전 국민을 동원하다시피 해서 1901년 6월 25일 반관반민의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한다.
---「6장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철마로 밀려온 근대」중에서
김윤식은 현실을 올곧게 직시했다. 나라 재정은 몹시 열악했고, 내부 분열과 외세의 참견, 간섭이 극심했기에 대포나 군함 같은 대형 무기를 제조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다. 이에 장차 만들어질 기기국 규모를 염두에 두고 급하게 전략을 수정한다. 유학생들이 당장 이룰 수 있는 기술부터 익히도록 조치한 것이다. 손기술로 만들 수 있는 탄약이나 화약, 소총 같은 작은 무기 제조에 학습 역점을 두었다. 어느 정도 학습이 되면 얼마 남지 않은 유학생들을 조기에 귀국시키고, 따로 기계를 사들여 국局을 설치한 다음 신무기를 제조할 생각이었다. 원대한 꿈을 꾸며 69명의 유학생을 데리고 떠난 지 불과 일 년 남짓이었다.
---「7장 이식된 근대화의 길 위에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