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소설을 썼을 때의 상황은 끔찍했다. 나는 첫 작품의 원고를 버려야 했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만은 버리지 않았고, 결국 그 아이디어는 『디 인비저블 서커스』로 다시 태어났다.
스물아홉 살 때 나는 미국국립예술기금의 후원금을 받았고, 그 돈으로 1년간 『서커스』라는 작품에 전념할 수 있었다. 나는 내심 멋진 작품이기를 기대하며 완성된 초고를 읽었지만, 읽을수록 형편없는 글이라는 점만 확실해질 뿐이었다. 많이 읽을 수도 없었다. 중반도 못 가서 분통이 터졌다. 팔릴 것 같은 책, 읽고 싶은 책과 너무나 동떨어진 원고라서 겁이 날 정도였다.
3일간 극단적인 패닉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심리 치료라는 걸 받아본 적도 없는 때였다. 서른이 코앞이었고, 이전에 하던 개인 비서일도 국립예술기금 후원금을 받으면서 그만둔 상태였다. 그나마 후원금마저 바닥이 보이는 상황이라 다른 일자리를 구해야 했지만, 임시직 말고는 내세울 만한 경력도 전무했다. (…)
아무튼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수습했고, 나흘 만에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나는 소설을 분해하고 재구성했다. 내가 불안에 떨고, 우울해하고, 오열하는 동안 나의 뇌 일부는 어떻게 하면 원고가 더 나아질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생각해놓은 방법들을 실행에 옮기고 싶어졌다. 다시 일에 몰두하고, 원고를 수정하면서 나는 어느새 안정을 찾았다. 걷잡을 수 없는 방황과 고뇌를 거치며 명쾌하고 논리적인 계획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더 좋은’ 글에 관한 멈출 수 없는 욕망 - 제니퍼 이건」
1992년 12월 6일, 내 딸 파울라가 죽었다. 1993년 1월 7일,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내일이 1월 8일이구나. 글을 써라. 안 그러면 너는 죽는다.”
어머니는 파울라가 코마 상태에 있는 동안 내가 어머니께 썼던 180통의 편지를 내게 건네고, 당신은 백화점에 가셨다. 여섯 시간 후 어머니가 돌아오셨을 때 내 얼굴은 눈물범벅이었지만, 내 손에는 『파울라』의 첫 페이지가 쥐어져 있었다. 글쓰기는 언제나 혼란한 삶에 일종의 질서를 가져다준다. 글은 삶과 기억을 정돈해준다. 지금까지도 『파울라』를 읽고, 반응을 보여주는 독자들 덕분에 나는 내 딸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소설은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과제를 정했다. 정치나 축구 얘기만 빼고 뭐든 쓰기로 했다. 파울라와 가능한 아무 상관없는 주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섹스와 폭식증에 관한 논픽션 『아프로디테』였다.
이제는 슬럼프에 빠져도 상관없다. 논픽션으로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고록도 나름의 이점이 있다. 감추는 것이 없으니, 아무도 나를 협박할 수 없다. ---「글쓰기에 미친다는 것 - 이사벨 아옌데」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나는 다시는 이전처럼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심한 두려움을 느낀다.
수술대에 누워 있는데 의사가 와서 “나는 오른손잡이지만, 오늘은 왼손으로 집도하겠소”라고 말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글쓰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난번보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는 매번 다른 방식을 찾도록 스스로를 다그쳐야 한다. 작가는 기계장치나 기술의 제약을 받지 않는 만큼 스스로에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고, 바로 그 점이 피를 말린다.
『앱솔루트 파워』의 각본을 쓴 윌리엄 골드먼은 아주 훌륭한 조언을 해주었다. “매번 처음 글을 써보는 사람처럼 쓸 것. 어떻게 쓰는지 이제 감 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작가로서는 마지막이니까.” 그의 말이 옳았다. 작가가 직업이 되는 순간, 한 번 해본 일이니까 이번에는 좀 수월하게 해보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끝이 보이는 것이다. ---「문학성과 대중성의 담장 위쯤에서 - 데이비드 발다치」
캐나다에서 살던 나는 1999년 기술 매뉴얼을 쓰는 일자리가 있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글을 써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2001년 정리해고로 일자리를 잃었을 때에는 절망적이었다. 한 직장에서 근속 연수가 늘어날수록 자리가 점점 창가에 가까워지는데, 새 직장을 구하면 엘리베이터 옆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남편과 나는 일찍 은퇴해서 전업소설가의 길을 걷는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 첫 아이를 낳고 출산휴가 기간에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는 망상을 품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갓난아기를 돌보는 일이, 또는 장편소설을 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겪어보지 않았던 나의 착각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실현 불가능했다. 그래서 정리해고를 당했을 때에는 일단 기한을 정해두고 전업소설가로 일해보기로 했다. 기한은 2년 또는 두 권의 소설이 나오는 동안, 둘 중 먼저 도래하는 시점까지로 정하고, 그 기간 내에 기술서 저자로 일할 때의 수입만큼 벌어들이지 못하면 다시 기술서 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남편 혼자 일을 해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주택담보대출도 갚아야 했고, 아이도 셋이나 있었다. 그야말로 둘이 손을 잡고 벼랑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이었다. ---「누구나 처음은 무명작가다 - 새러 그루언」
공공연한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건설적인 비판을 기대하고 내 책에 대한 서평을 읽었지만 『키스』에 대한 서평들은 나를 향한 비열한 인신공격과 중상모략이었다.
내가 사람들이 그저 무난하게 골라 읽을 수 있는 작가가 아님을 나도 알고 있다. 어떤 이들은 내 작품을 정말 좋아하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내가 선택한 주제, 아니 나를 선택한 주제에 대해 불쾌하게 여긴다. 나는 스스로 그런 작가임이 좋다. 한 번 읽고 잊어버리는 작가는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작가가 되고 싶다. 내 책을 읽고 구원받았다는 반응도, 나 같은 작가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반응도 모두 좋다. 이도 저도 아닌 미지근한 반응은 내가 작가로서 실패했다고 느끼게 만든다. 나는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그리지는 않는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린다. (…)
여론의 뭇매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내게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무슨 짓을 한들 이보다 더 심하게 욕먹을 일은 없겠다 싶으니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어졌다. 결국 그 덕택에 자유로워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작가의 조건 - 캐스린 해리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