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는 음악과 기기, 인간의 세 축으로 이루어진다. 음악성이 빠진 오디오는 공허하다. 오디오적인 섬세함이 빠진 음악도 마찬가지다. 이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나는 진정한 주체다. 오디오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사운드의 완성을 통해 음악의 도취를 이끌어내는 작업이다. 결국 인간의 문제다. 수많은 사람들의 취향과 고뇌가 얽혀있는 오디오는 그 이면에 숱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p.10, 글을 시작하며)'
--- p.10
어쨌든 열심히 그리고 미친 듯이 음악을 들었다. 친구들이 길거리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며 화염병과 깨진 보도블록으로 진압대를 향해 돌팔매질을 해대고 경찰의 닭장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 뜬 눈으로 밤을 새울 때, 나는 그 울분을 낡은 레코드 판이나 돌리며 달래고 있었다. 존경하는 선배가 찬 콘크리트 바닥에 내팽겨쳐져 피범벅이 되도록 맞고 있을 때 나는 숨죽여 흐느끼며 존 바에즈의 <우리 승리하리라>, 피터 폴 엔 메리가 부르는 <탈주병>, 밥 딜런의 <블로잉 인더 윈드>를 들었다. 동료들이 온몸으로 저항하고 자신의 미래를 저당잡히는 동안, 나는 위대한 아티스트들로부터 자유와 희망, 절망과 고독을 하나씩 배워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치졸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아편 중독자처럼 매일매일 단위를 높여 음악과 오디오 속에 몸을 숨겼다. 내 인생의 반 정도는 이때의 비겁함과 두려움을 자양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 p.26
수천 년 전 돌판에 새긴 로제타스톤이나 파피루스에 쓰인 상형문자의 내용을 지금 바로 읽을 수 있는 것은 문자라는 아날로그 기호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디지털로 기록되었다면 변환 코드를 일치시키지 않는 한 그 자체는 오래된 돌멩이나 갈대 잎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 문자는 어디에 새겨 넣든 시공을 초월해서 그 자체로 바로 읽히는 직독 개념의 기록이다.
또한 여기에 새겨진 내용은 문자가 갖는 상징과 은유로, 적은 분량으로도 많은 의미를 포함할 수 있다. 반대로 이를 판독하는 방법은 쉽다. 문자를 읽을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한다. 판독의 질이 문제가 되겠지만, 고도의 지적 능력과 상상력이 결합된 판독이라면… 이건 문제가 달라진다. 기록해놓은 사람도 몰랐던 새로운 의미의 발견과 새로운 해석의 여지는 전적으로 읽는 쪽의 능력에 달려 있다.
기록 밀도가 높은 함축된 정보를 비교적 간단하게 담는 건 역시 아날로그가 유리하다. 1972년 발사된 행성 탐사선 파이오니어 10호에 실린 미지의 외계인에게 보내는 지구인의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로제타스톤' 같은 아날로그다. 얇은 알루미늄 판에 금박을 입힌 편지에는 불과 몇 개의 그림만이 담겨 있다. 이 그림엔 외계인에게 지구와 지구인을 소개하는 수많은 내용들이 담긴다. 지구인보다 훨씬 높은 문명 수준에 도달해 있을 외계인에게 읽힐 수단이란 게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란 점이 흥미롭다.
--- pp.162~163
마크 레빈슨은 하나의 신화다. 단지 제품의 완성도만으로 신화가 유지된다면 그 이후 만든 더 우수한 성능의 앰프들도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겠지만, 마크 레빈슨이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새로운 개념의 앰프를 처음 만들어냈다는 점 때문이다. 마크 레빈슨은 과거의 답습을 거부하고 독창적인 양식을 만들어, 끊임없이 완성도를 높여갔다.
여기 담긴 한 인간의 이상 추구와 집념의 실현은 가히 한편의 드라마다. 막연히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하지 않았던 것,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것을 가능한 현실로 만든 사람이 마크 레빈슨이다.
--- p.199
때론 그것이 아니면 안되는 물건이 있다. 그 물건을 선택하는 건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표시이다. 사소하게 보이는 물건에 담긴 보이지않는 의미는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 p.62
그 많은 레코드를 언제 듣느냐고 물어보지만 한번도 시원하게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 레코드 래크의 빈틈을 보면 거기에 채워 넣을 새로운 레퍼토리를 찾느라 여념이 없다. 레코드 컬렉터들은 빈틈에 무엇인가 채워넣는 테트리스 게임을 잘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레코드를 모으면서 그 안에 담겨있는 내용 확인에는 이상하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 p.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