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10년 04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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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76쪽 | 564g | 150*215*30mm |
ISBN13 | 9788992650274 |
ISBN10 | 8992650272 |
출간일 | 2010년 04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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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76쪽 | 564g | 150*215*30mm |
ISBN13 | 9788992650274 |
ISBN10 | 8992650272 |
장석주 시인의 더없이 유려하고 심미적인 문장 속에서 현대적 의미로 재생된 장자는 다름 아닌 ‘느림과 비움’을 예찬한다. ‘느림을 사는 자만이 비울 수 있고 비운 자만이 느림을 누린다’라는 단순한 명제를 통하여 느림과 비움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여백과 울림의 미가 돋보이는 이 책은 총 열한 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에는 저자가 가려 뽑은 장자의 가르침은 물론 저자의 실제 생활에 투영된 모습까지 함께 담아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현대인들에 대해 돈과 명예를 쫓아 바빠지는 일에는 반드시 게을러지고, 그들이 게을리 하는 '한가로움을 구하고 유유자적 하는 것'에는 바빠지고자 한다고 비판하며 장자의 느림을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생물학적 필요 이상의 소유를 갖지 않는 것. 달리 말하면 자발적 가난에 드는 것. 그냥 버려서 얻는 경지가 아니라 제 것을 기꺼이 남과 나눔으로써 비움에 드는 것"이란 말로 장자의 비움을 말하고 있다. 스스로를 ‘고요의 달인’이라 선언하는 저자는 실직 위기가 넘실대고 파산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 시대의 독자들에게 『장자』 읽기를 권한다. 기존 정치와 체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연에서의 물아일체를 삶의 이상으로 삼았던 장자에게서 우리가 배우고 익힐 것은 바로 ‘존재의 기술’이며 이는 단순히 존재함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지혜롭게’ 존재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임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저자가 오랫동안 장자를 벗 삼아왔듯, 그렇게 곁에 두고 읽으며 장자의 가르침을 되새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벗이 되어줄 것이다. |
1 자유롭게 노닐다 1. 호접몽胡蝶夢 2. 천하를 자유롭게 노닐다 3. 상상하라! 변화하라! 2 변화의 바람을 타고 가라 1. 물고기를 잡은 뒤 통발을 버려라 2. 여희의 후회함 3 도둑에게는 도둑의 도가 있다 1. 말을 사랑하는 법 2. 화공이 알몸인 채로 앉아 있었네 4 비워라, 비워야 채운다 1. 빈 배 2. 열자 이야기 3.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 속에서 4. 장자의 죽음 5. 어부가 배를 골짜기에 감추다 5 본성을 거스르지 말고 살아라 1. 바닷새 2. 오리 다리가 짧다고 늘여줄까 3. 진흙탕에서 꼬리를 끌지언정 4. 꿩은 열 걸음 걸어 모이를 쪼고 5. 장과 곡은 양을 잃어버렸네 6 운명에 맞서지 마라 1. 달려오는 수레를 막는 사마귀 2. 아내의 주검 앞에서 노래하다 3. 남의 발을 밟으면 7 쓸모없음의 쓸모를 구하라 1. 쓸모없는 나무가 큰 나무가 되었네 2. 작은 재주를 뽐내다가는 3. 송나라 모자 장수의 어리석음 8 배워 익힌 것은 잊어라 1. 아낌없이 잊어라 2. 물의 길 사람의 길 9 진인으로 사는 법 1. 애태타 2. 누가 진인인가? 3. 진인으로 사는 법 4. 이 순간이 큰 꿈인 것을! 5. 살려면 죽고 죽으려면 산다 10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를 보라 1. 우물 안 개구리 2. 조릉 이야기 3. 얼음처럼 차고 눈처럼 흰 사람 4. 그림자가 그림자를 탓하다 11 마음의 눈으로 보라 1. 포정 이야기 2. 누가 바람을 부러워하랴 3. 드러난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4. 장자가 해골을 베고 잠들다 - 에필로그 / 다시 느림과 비움을 노래하자! |
잘나가던 출판사의 대표이며 시인이었던 저자 장석주는 2000년 도심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시골로 향한다. 안성의 한 호숫가에 수졸재라 이름한 집을 마련하고 책읽기와 글쓰기, 산책과 명상 등을 하며 단순한 삶을 살고 있다. 저자는 도심에서의 분노와 세상에 대한 질타에 대한 마음을 다스리고자 매일을 하루같이 머리맡에 놓아둔 “장자”를 읽었다고 한다. 저자는 장자를 읽으며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것을 지켜보았고, 마침내 고요해 졌다고 고백한다.
장자가 누구인가?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장자는 몽(蒙) 지방 사람으로 이름은 주(周)이고 칠원(漆園)이라는 고을에서 관리를 지냈는데, 양(梁)나라의 혜왕(惠王), 제(齊)나라의 선왕(宣王)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박학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10만여 자나 되는 글을 지었고 「어부(漁父)」, 「도척(盜跖)」, 「거협(胠篋)」 등을 지어 공자의 무리를 비방하고 노자의 학설을 천명하였다는 게 사기 기록의 전부이다.
2천 3백년전에 살았던 현인 장자. 장자는 이 나라 저 나라를 바람처럼 떠도는 방랑자였고, 예기치 않은 은유와 환유로 잠든 뇌를 깨어나게 하는 수사학의 달인이었다. 사마천에 따르면 장자는 본디 10여만자에 이르는 책이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전해져온 장자는 곽상이 편집한 것으로 내편 일곱 편, 외편 열다섯 편, 잡편 열한 편으로 서른 세편으로 이루어진 판본이다. 곽상은 장자보다 6백년 뒤에 살았던 위진 시대의 학자였다. 장자는 《노자》 《주역》과 함께 삼현으로 꼽히기도 했다. 내편은 이치의 근본을 밝히고, 외편은 구체적 사실을 끌어다 내편에서 말한 것을 입증하고, 잡편은 이치와 구체적 사실을 뒤섞어 알기 쉽게 만들었다. 원래 장자는 52편이었으나 지금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33편뿐이다.
우리가 흔히 장자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호접몽과 대붕에 대한 이야기이다. 호접몽은 장자가 어느 날 꿈에 나비가 되어 세상을 돌아다녔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장자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꾼 것인지,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구분이 안가더라는 우화와 북해의 거대한 물고기 곤이 커다란 붕새로 변화하여 남명으로 날아가는 이야기이다. 대붕은 한번 바람을 일으켜 구만리상공으로 날아가서 여섯 달 동안 쉬지 않고 날아간다. 앞의 호접몽은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뒤의 대붕의 이야기는 장자의 첫 구절인 소요유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난 장자의 호접몽을 볼 때마다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난다. 장석주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참이라고 믿는 이 세상과 우리가 꿈이라고 믿는 거짓세상의 구분이 의미가 없음을 장자는 호접몽의 비유를 통해 역설하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참이라고 믿는 세상이 실상은 가상의 공간이었고, 모든 것이 프로그램밍 된 허상이었다. 세상이 허상임을 알게 된 주인공 네오는 현재라는 세상이 갖고 있는 모든 규율과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완벽한 자유를 구사하게 되고 무한한 능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허상과 실상의 경계를 허무는 그 순간, 세상을 그의 자유의지로 조절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소요유다.
“앎과 모름, 삶과 죽음, 너와 나, 그 분별이 없을 때 꿈과 현실은 하나다. 무분별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무궁의 시계에 머물 수 있다. 무분별은 일월을 품고 우주를 품는다. (20쪽)
대붕의 이야기는 변신을 뜻한다. 세상의 구속에 얽매여 조그만 메추라기의 눈으로 볼 때는 대붕의 날개짓도 한갓 부질없는 짓이지만 대붕이 보는 세상과 메추라기가 보는 세상은 다르다. 즉 크게 자라야 비로소 크게 변화한다. 변화한다는 것은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메추라기의 시선으로 세상을 관조하는 이에게는 대붕의 날개 짓이 부질없다. 고작 옆에 있는 나뭇가지로 옮기는데 그런 큰 날개와 바람은 부질없는 짓이다. 본디 모든 존재는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자유롭지 못하는 것은 물(物)에 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物)은 그저 관념이다. 관념이라 불리는 오감과 세상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면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없다. 곤이 붕으로 변화하는 순간 천지의 모든 이치를 통달하고,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마음껏 창공을 날수 있다. 그렇기 위해서는 곤이 붕으로 변해야 한다. 곤에게 있어서의 물(物)이라는 개념이 바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욕망이다. 즉 필요이상을 추구하는 탐욕이다. 세상적인 물질의 욕망에 사로잡힌 시선과 관념으로는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곤이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물에서 벗어나듯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러한 변화의 열정이후에 붕으로 변해 한 날개 짓에 수천 리를 날수 있는 도약이 가능하다.
“변화의 본질은 나를 바꾸는 것, 나를 잊거나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불확실성 속에 뛰어듦이고, 이것은 스트레스를 낳는다. 그러니까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33쪽)
장석주 시인은 10년을 하루같이 읽었던 장자를 한 마디로 느림과 비움의 미학이라고 애기한다.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문물이 선사해준 속도감에 이제는 젖을 대로 젖은 우린 모든 것을 빨리만 처리하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우리의 짧은 생의 발걸음으로 볼 때에는 한순간도 바쁠 수 있겠지만 수억 년을 지내온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루살이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시간의 개념은 우리와 다르다. 수천 년을 살아온 고목의 나이와 그저 백년도 못사는 우리네 시간의 개념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린 우리의 시간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개념으로 접근한다. 그리곤 서두른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이유도 없다 그저 남들이 뛰니 나도 뛴다. 남보다 무조건 앞서가야 하고 남보다 무조건 빨라야 한다. 이유는 다음이다. 하지만 그런 속도감으로 목표지점에 도달했지만 생각 없이 지나온 발걸음은 목표지점에 도달한 이후 우리에게 만족은커녕 허망함만을 더한다. 목표는 단순히 한번 지나가야하는 포스트에 불과하다. 그 목표에 도달하고 나서는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뛴다. 거기에 자본주의의 탐욕의 논리에 갇혀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벌기위해 열심히 산다. 남보다 더 넓은 아파트, 더 좋은 차를 가져야 한다. 그런 물질적인 욕망에 갇히니 눈앞에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런 물질적인 욕망을 성취한 순간 그것은 최고봉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욕망의 봉우리가 마주 할 뿐이다. 이렇듯 한없는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산다. 그게 우리네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다. 속도가 빠르니 주위를 돌아볼 여력도 없다. 일상의 삶에서 느끼는 행복과 사색 또한 끼어들 여력이 없다. 삶의 관조자가 아닌 그저 시간의 노예가 되어 쫒겨갈 뿐이다. 무엇이 나를 쫒아오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매일 한결같은 발걸음을 옮긴다.
오랫동안 객지 생활을 해오면서 머무르는 곳마다 많은 짐을 가지고 다녔다. 기본적으로 침대를 비롯하여, 수십 벌의 옷, 그리고 커다란 TV를 비롯하여 수백 권의 책. 이런 많은 짐들은 한번 씩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상당한 번거로움을 야기했다. 비용상의 문제도 문제이거니와 시간적,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불편한 사항들이 많이 초래되었다. 하여 작년에 모든 짐을 본가에 가져다놓고 일상적으로 입을 간단한 옷가지 몇 개만 숙소에 비축해두었다. 그 뒤로는 거주지를 옮기는 것이 아주 간단해졌다. 쓰지도 않는 물건과 입지도 않는 옷들과 수많은 책들로 인해 이사하고 나서 정리하는데 며칠씩 걸리던 짐들이 이제는 한 두 시간만 들여도 정리가 된다. 생활자체도 단순해졌다. 거주지가 바뀌면 트렁크 하나면 된다. 그동안 이삿짐센터에 연락하고 이사를 하고 짐을 정리하고 하면서 소요되던 그 많던 시간과 비용이 현저히 줄었다. 그렇다고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그저 습관적으로 많은 짐을 싸들고 다녔다. 당장 필요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린 당장 쓰지도 않는 물건을 소유하고 순간의 만족을 얻기 위해 수없이 많은 물건을 사들인다. 그 물건들을 보유하기 위해 더 넓은 공간은 필수적이다. 그런 물건들을 사들이기 위한 경제적인 능력을 얻기 위해 더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러니 더 바쁘다. 시간이 없다. 쫒기듯이 살아간다. 그런 악순환은 계속된다. 비움이던, 느림이던 어느 한가지라도 먼저 선행이 되면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에 여유라는 단어가 자리 잡는다. 그 여유야말로 나를 돌아보고, 세상을 돌아보고, 내가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장석주 시인은 장자를 통해 자본주의의 흐름에 갇혀 그저 물(水)을 벗어나서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는 물고기처럼 정해진 틀에 갇혀 살고 있는 우리에게 외친다. 그 틀에서 벗어나라고, 그 틀에서 벗어나면 물을 벗어난 물고기처럼 죽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곤에서 붕으로 변신을 하면 죽지 않는다. 붕은 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직 날아오르기 위한 바람만이 필요하다. 하지만 변신은 그저 오지 않는다. 내가 기존의 틀을 떨치고 일어나 변해야 한다. 그 변화를 거쳐야 만이 곤이 대붕이 될 수 있다. 그리고선 천하를 날아오를 수 있다. 어쩌면 장자는 세상을 등지고 나만의 세상을 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각과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얘기하고 있다. 구만리 상공에서 나는 대붕과 싸리나무를 오가며 짧은 날개 짓을 하며 그저 먹고살기에 바쁜 메추라기의 눈으로 사는 삶은 정녕 다르다.
장자의 구절을 예로 들어 각각의 구절에 대한 작가 자신의 해석과 때로는 화두와도 같은 예와 삶에서 경험하는 경우 등을 번갈아 예를 들어가며 풀어가는 작가의 글쓰기가 재미있다.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두서없이 오고가는 그의 논조는 장자의 구절구절을 이해하는데 적격이다. 물론 그렇다고 장자를 10년동안 읽어낸 작가의 사고를 올곧이 받아들이기에는 나의 지식이 텃없이 짧지만, 장자를 접하는 입문서로서는 부족함이 없다. 장석주 시인은 2500년전에 쓰여진 장자가 지금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고 말한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함이 지금 이 시대에 역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는 전쟁의 혼란함에, 지금 이 시대는 신자본주의에 의한 물질문명의 혼란함에 갇혀있다고 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지 않더라도 자본주의의 논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현대인들을 향해 그 자본주의의 물을 헤치고 붕으로 변하여 모든 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창공으로 날아오르라는 장자의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는 아닐까 한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장자가 청바지를 입고 번화한 홍대거리에 나서서 그 시절과 똑같은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의 가르침을 듣고 안 듣고는 개인의 취사선택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그저 귀동냥으로 들어왔던 장자가 장석주 시인의 깨달음과 만나 새롭게 다가온다. 이제는 장석주시인의 입을 빌어 보는 장자가 아닌 나의 시선만으로 올곧이 장자를 만나야겠다.
요 몇 년 사이에 '장자'가 좀 유행이였나보다.
도서는 물론이거니와 영화든 패션이든...'트렌드는 쫓는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어
남들이 좋아하다고 우르르 쫓아가는 건 그닥 내켜하지 않아 그런지도 모르고 살았다.
어쨌거나, 이 책이 세일 한다기에...앞에 몇 페이지를 보고 맘에 들어 구입을 했는데...읽지 않았다면 후회할 뻔했다.
일단,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으나, '장자'의 오리지날 원본은 아니다. 해석판이라고 하기도 뭣하고..그냥 '장자'에 담긴 내용을 작자가 읽기 편하게 한 번 더 풀어 놓았다. 그의 일상 에세이와 더불어 말이다.
그래서, 일단 책이 술술 잘 읽혔다.
이런 저런 '장자'의 에피소드들을 서두에 옮긴 다음, 장석주의 느낌을 적은 것은..아마 '장자'를 떠올리면 일단 골치 아프지 않을까? 하고 지레 겁을 먹게되는 나같은 사람에게 딱 안성맞춤이였다.
읽으면서 접고 줄 그은 부분은 얼마나 많은지.
이 책을 읽고 나니 '장자'를 제대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동안 '장자'를 읽으면서 한 없이 마음이 고요해졌다는 장석주와 같이, 내 마음도..더 고요하고 평화로울 수 있을까 하는 기대마저.
연초에 국립현대 미술관에 다녀왔다.
거기서 '세한 연립주택'이라는 김정희의 '세한도'를 모티브로한 작품을 봤었는데,
이 책에서도 잠깐 언급되는 부분이 재미났다.
새삼 꾸준한 독서나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슬슬 빛을 보는 것 같은 자부심마저 들었다.
책에선 많은 것을 비우라하는데...딴건 모르겠고, 독서하는 마음, 배우고자하는 마음은 지키고 가야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이런 저런 욕심들...사심들...시기심...집착. 살면서 조금씩 조금씩 버리는 연습...이미 하고 있었지만...흔들리지 않게 내공을 쌓아야겠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책에는 몇 컷의 사진이 나온다.
1. 장석주가 서재에 앉아 있는 사진
2. 장석주가 나비넥타이를 하고 동네를 거니는 모습
3. 장석주의 상반신 컷.
솔직히 좀 생뚱 맞았고..책 내용과 어울리지 않아...살짝 당황스러웠다. (특히, 이 책이 '장자'를 다루고 있고..책 제목이 '느림과 비움의 미학' 임을 고려했을때...편안한 마음으로 읽다가 '어므나!!'하고 깜짝 놀랐다) 좀 자연스럽게 찍은 사진이 삽입을 할 것이지.
그.리.고.
위에 좋게 생각했던 장석주의 에피소드들도...뒤로가면 갈수록...살짝 처지거나 억지스러운 구석이 있다.
조금 더 담담하게 쓰여졌더라면 좋을텐데...그의 나이에서 오는...살짝 올드한 자기연민같은 느낌은 옥의 티라고 할 수 있겠다.
뭐 이정도.
우리가 동양고전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한자를 알아서 원문을 읽을 수 있고, 그래서 읽고, 또 읽어 원문의 뜻을 깨우치며 사유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대부분은 그러지를 못하는 까닭에 해설서를 찾게 된다. 해설서에도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해설서가 있는가 하면, 원문의 편제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 풀어 쓴 해설서도 있다. 대부분의 해설서가 전자라면 아마 돌베개에서 나오는 교양강의 시리즈는 후자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책 [느림과 비움의 미학 - 장석주의 장자읽기]는 그간의 동양고전 읽기와는 다른, 또 하나의 독법을 나에게 알려주는 것 같다. 장자 전편을 통해 흐르는 키워드를 느림과 비움으로 설정하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를 자신이 직접 장자에서 가려 뽑은 장자의 말과 함께 알려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고전에 대한 해설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느낌과 자세를 써 내려간 산문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고전을 읽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어리둥절 했지만, 이내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의 고요를 찾을 수가 있었다는 느낌이다. 저자가 젊어서 어떤 고통과 상처들을 안고 있었는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10년 동안 장자를 읽으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을 지켜보았다는 그의 고백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도 그대로 전이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 느낌은, 저자에 대해서는 대단한 독서 광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나에게, 어쩌면 그의 전작읽기에 빠져들게 할 것 같은 불길한(?) 전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우리는 종종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힌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책들이 나와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애써왔다. 과거의 위대했던 철학자들이나, 현재를 사는 사람들 모두 그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래서 그 답을 찾기 위해 성찰과 사유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막상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되면, 막막함을 느끼는 것은 많은 답들이 내 맘속의 답과는 일정부분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살아오면서, 그리고 많은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답을 구하고자 했지만, 그나마 가슴속에서 공감을 하고 동의한 것은 그 물음을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치환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치환한 것이 허기진 그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마음은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지를 않는다. 그런데 장석주는 이 책에서 그 물음을 또 다른 말, 어떻게 밥을 구할 것인가로 치환한다. 그 대목을 읽는 순간 내가 불안해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막막함을 느꼈는지에 대해 비로소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먹고 사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애써 외면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기에 저자는 자발적인 가난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가져서 행복한 게 아니라 가진 것의 진정한 가치를 앎으로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적게 가져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의 기쁨을 몰라서 불행하다는 말로 바꿀 수가 있다. 그가 장자를 읽으면서 우리의 존재이유를 단순한 존재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존재하느냐로 바꾸는 존재의 기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장자는 기존의 정치질서와 체제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물아일체의 삶을 이상으로 삼았었다. 우리가 장자를 따라서 그렇게 살수는 없지만, 현재의 모든 조건들이 그때와는 판이하게 다르기에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 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느리게 살고, 비우며 산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될 수가 있다. 배는 인생이라는 강을 타고 흘러 내려간다고 한다. 우리가 그 배를 무겁게 채우는 것은 욕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욕망은 끝이 없기에 욕망이 뻗어가는 대로 두면 그것은 이내 탐욕으로 변질된다. 탐욕은 마음을 시끄럽게 하고 불필요한 근심들을 키울 뿐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그러기에 채우는 사람은 채움에 메이게 되고, 비우는 자는 비움으로 인해 자유로워 진다고 장자를 빌어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장자는 우리들의 삶이란 뇌가 만들어 낸 하나의 환몽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평생 그 환몽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는 것을 호접몽, 즉 나비 꿈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경쟁과 절망만이 넘실대는 환몽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느림과 비움만이 답이라는 사실을 장자에게서 발견한다. 느리게 사는 사람만이 비울 수가 있고, 비운 자만이 느림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느림과 비움은 미학이 된다. 모두가 물질과 명예를 쫓기에 바쁜 세상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면, 그리고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기꺼이 남과 나눔으로써 비움에 든다면 그것이 바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아닐까 싶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먹고 사는 문제로 귀결됨을 마음속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이 욕망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 일 게다.
저자가 만난 장자를 읽으면서, 지금까지 나는 어떤 장자를 만났었는지 생각해 본다. 왜 나는 장자가 이야기했던 느림과 비움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 했을까? 장자는 배워 익힌 것은 모두 잊으라고 했다. 그리고 저자는 이것을 고독한 길에 제 삶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독하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느림과 비움을 미학으로 삼는 삶은 분명 힘들게 눈에 선히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장자읽기를 보면서 나 또한 새로운 장자를 만나리라는 기대를 안고 장자를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 정말 고독한 자는 타인에 대해 너그럽고 자신에 대해 엄격하다고 한다. 지금까지 만난 장자를 모두 잊고, 고독하게 장자를 다시 만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