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정말 내 얼굴을 보고 책이 연상된다면, 이 직업이 내게 꼭 맞는 옷은 아니더라도 이제는 활동하기에 불편하지 않고 내게도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p.6
서점이 뭐라고_‘조만간’이라는 녀석은 참!
아버지는 삼십 년 넘도록 속초에서 작은 동네서점을 운영했다. (…) 사람들이 서점에 줄 서서 책을 구매하던 풍경, 하루가 꼬박 다 가도록 쉴 새 없이 장부에 뭔지 모를 숫자를 적던 아버지의 모습도 희미하게 기억나는 한편,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돼서 분류도 상태도 엉망인 책장, 힘없이 목을 늘어뜨린 채 졸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도 내 기억 속에 또렷했다.--- p.19
어쩌다 보니 책이다_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
나는 ‘어쩌다 보니 서점을 하기로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당시 하던 일의 계약 기간도 끝나가고, 더 일할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고 싶은지 확신도 서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곳저곳 다시 입사 원서를 쓰자니 대책 없이 막막한데, 서울에서의 먼 미래를 그려보니 아찔하고 아득하기만 하던 처지에, 아버지로부터 서점 제안을 받고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승낙해 버린 것이었다.--- p.22~23
아버지의 서점_거기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가 졸고 있을 때 서점을 방문한 손님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대부분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으리라 짐작한다. 손님은 계산하기 위해 주인을 깨워야 해서 여간 못마땅했을 수도 있고, 찾는 책을 물어보지 못해 찾다 찾다 그만 포기하고 가버렸을 수도 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경우는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다 조용히 나가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아버지는 졸고 있었으므로, 당신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나 다름없었다.--- p.25
책과 나_그럼 책은 원 없이 읽었겠네요
“책을 좋아하면 서점을 하지 말고 그냥 독자로 남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충고가 적어도 내겐 뼛속 깊이 와 닿는다. 느긋하게 앉아서 책 읽을 시간은커녕, 책 표지만 훑고 지나가기에도 시간이 턱없이 모자란다. 가장 큰 요인은 서점 일이라는 게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의 손이 가는 일인만큼 가만히 앉아서 넋 놓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p.29~30
양가감정_책도 된장찌개처럼
도서정가제가 말 그대로 ‘정가제’가 될 수 있을까? 언젠가는 책도 된장찌개처럼 정해진 가격 그대로 판매할 수 있는 날이 올까?--- p.34~35
삼 분의 이_속초에 뭐가 있는데요?
속초엔 바다가 있지. 원할 때면 언제나 산책할 수 있지. 그리운 감자전과 도루묵과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있지. 거리의 소음도 없지. 버스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부대낄 일도 없지. (…) 인구가 팔만 정도인데도 인구 밀도가 매우 조밀한 이 작고 이상한 곳. 바닷가를 따라 마을이 긴 모양으로 늘어서 있어 언제 어디서고 조금만 방향을 틀면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곳. 어느 맑은 날, 시내를 따라 걷다 보면 저 멀리 울산바위가 어떤 거룩한 속삭임처럼 드러나는 곳. 바다와 이어지는 곳에 바다였던 옛 시간의 흔적이 무려 두 곳이나 호수로 남아 있는 곳. 걸어서 어디든 다다를 수 있고, 그곳으로부터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곳. 근래에 스타벅스와 맥도날드가 생긴 곳. 사람들의 말투는 다소 거칠지만 대체로 친절한 곳. 그곳에서 나는 아버지의 서점을 다시 열었다.--- p.38~39
나의 서점 탐방기_기능과 아름다움은 왜 공존할 수 없을까?
물론 당시 한국에도 예쁜 서점은 많이 존재했다. 하지만 나의 방향성과 맞닿는 서점, 그러니까 ‘종합서점’이라는 정체성으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는 서점은 눈을 씻고 찾아보기 어려웠다. 미의 기준은 저마다 다른 것이라고반박한다면 할 말은 딱히 없지만, 서점이라는 공간이 그렇고 그렇게 용인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잖은가. 서점의 외관부터 진열된 책의 모양새에 이르기까지, 서점은 지금껏 ‘사고 싶게 만드는 상품의 진열’이라는 사실을 줄곧 외면해온 것만 같았다. 기능과 아름다움은 왜 공존할 수 없을까?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걸까?--- p.42~43
반품의 맛_이토록 많은 책이 왔다가 간다는 것
모든 책을 반품하고 새로운 책들로 서가를 다시 채운 일.그게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이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때로 돌아가는 꿈을 꾸고, 꿈에서 깨면 현실임을 여러 번 확인하면서도, 아직도 똑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확실한 건 그 일로부터 서점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한 가지를 배웠다는 것이다. 바로 이 많은 책이 대수롭지 않게 왔다가, 아무렇지 않게 가버리는 게 아니라는 것. 이 많은 책이 오고 가려면 내 작은 몸뚱어리 하나 주저앉도록 굴려야 한다는 것.--- p.49~50
개업 전 철야 작업_마치 코끼리라도 삼킨 것처럼
이만 권의 책은 거대한 화물트럭에 실려왔다. 대형트럭 뒤에는 마치 코끼리라도 삼킨 것처럼 자기 몸집만 한 무언가가 천으로 덮여 있었다. 트럭에서 어렴풋이 바다 냄새가 났다. 대도시로부터 속초까지 오는 동안, 단언컨대 저 거대한 트럭 뒤에 실린 무언가가 책일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나 역시 살아오는 동안 그렇게 큰 트럭에 다름 아닌 책이 담겨 있는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이 말을 아버지에게 전하자, 당신은 예전에 수없이 본 장면이고 수없이 겪은 일이라고 했다.--- p.51~52
서가 분류법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맞다”라는 얘기처럼, 어쩌면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보다 훨씬 무책임하고 자유분방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한 권의 책을 두고 어디에 꽂아야 할지 고민한다. 고민을 거듭한 그 책이 잘 팔리지 않았을 때 전보다 훨씬 더 마음 아프고, 반대로 잘 팔렸을 때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기쁨이 차오른다. 서가의 분류도 서점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인터넷 서점이 아닌 ‘서점’에 갈 최소한 한 가지 이유는 확보한 셈일 것이다.--- p.60~61
눈물의 캘리그라피_어차피 예쁘자고 한 건 아니니까
처음 몇몇 장소에 손글씨를 써서 부착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한 한 커플이 웃으며 얘기하는 걸 그만 들어버렸다. 여기 손글씨 좀 봐. 순간 너무 창피해서 당장에 다 떼어버리고 싶은 걸 꾹 참고 견뎠다. 어차피 예쁘자고 한 건 아니니까…. 몇 번이나 나를 위로했다.
--- p.65
책을 꿰뚫는 맛_새로 나온 책 있어요?
나는 서점 일을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신간 배본을 받아본 적이 없다. 처음엔 뭣도 모른 채 그렇게 했던 게 사실이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수많은 책을 그저 왔다가 보내는 일이 영 내키지 않았다. 반품에 트라우마가 생긴 것일까? 책을 속절없이 반품해야 한다는 것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일단 한 번 우리 서점에 입고된 책은, 그게 한 권이든 다섯 권이든 열 권이든, 어떻게든 다 팔아보자는 담대하고도 청순한 마음이었다.--- p.67
검색대가 없는 서점_도서 위치의 미학
나는 다름 아닌 책의 ‘편집 진열’을 중요하게 여기는 서점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때로는 책이 출간되는 경향에 의해, 가끔은 시국에 의해, 드물게도 어떤 날에는 책 표지 색깔이나 제목의 연관성에 따르는 등, 서점원 저마다의 고유한 맥락 속에서 책을 자유롭게 편집하여 배열하는 게 서점의 묘미이자 경쟁력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문제는 이렇게 책이 왔다 갔다 하는 만큼 책의 위치 데이터를 매번 수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책의 위치는 매입 시점에 단 한 번 정해지지만, 실제 책의 자리는 처음 정해진 위치로부터 하염없이 미끄러진다. 이러한 이유로 여전히 우리 서점은 도서 검색대가 없는 ‘희귀 서점’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p.74
서점과 문학상의 관계_이거 정말 축하할 일이군!
결과적으로 행운인지 불행인지, 나 같은 게으른 인간에게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 결과는 꽤 복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상 소식을 뒤늦게 듣고 책을 주문하려고 보니, 아뿔싸. 출간된 책이 자서전 한 권밖에 없었다. 그렇다. 밥 딜런은 뮤지션이다. 노벨문학상 발표날이 지났는데도 서점은 작년과는 다르게, 하지만 그 전날과는 다름없이 잠잠했다. 노벨문학상이라는 작지 않은 사건에서 책과 서점의 입지가 조금은 줄어든 듯하여 섭섭함이 느껴지는 한편, 당장엔 별다르게 분주할 것 없는 이 흐름에 씁쓸하게 몸을 맡긴다.--- p.79
납품_어찌 됐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
도서 납품은 한 건에 커다란 규모의 돈을 서점에 벌어다 준다. 그 규모가 클 때는 한 달 매출액과 맞먹기도 하고, 그 규모가 작을 때조차도 하루 매상에 버금갈 만하다. 그렇다. 대체 왜 서점은 도서관 청구기호 생성법을 익혀야 하고, 왜 책에 라벨을 붙여야 하는지 따위의 질문은 고이 접어두자. 지금껏 쭉 그래 왔고, 따라서 하던 대로만 하면 약속된 금액이 고스란히 지급된다. 서점 업계가 불황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 이 같은 불평할 여유가 있다면, 지금 당장 라벨을 붙이자. 그리고 도장을 찍자.--- p.84
서점발 베스트셀러_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애석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내가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들은 대체로 전국적인 베스트셀러가 될 것 같은 책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는 ‘서점발 베스트셀러’보다도 손님들로부터 ‘최소한의 답장’을 받는 일이다. 베스트셀러만 소개하고 잘 팔릴 것 같은 책들만 진열했다면 아마 묻혀버리고 말지도 모르는 책. 그렇게 묻혀버리고 말기엔 아까운 책. 그런 책들을 손님들에게 어떻게 소개해야 그들로부터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당신이 이 목소리를 듣고 책을 펼칠 수 있을까?--- p.91~92
추천의 기술_고작 책 한 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책 추천하는 일에 대해서라면, 나는 여기에 한 가지 항목을 더 추가하고 싶다. 이 책, 정말 추천해도 되는 것일까? 이 책을 추천하고 나서도 나는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추천하기 전에 마지막 한 번 망설이는 일.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좋지만, 한 번쯤은 멈춰서 망설이며 자문해보는 일. 거창하게 말해서 이것을 책 추천에 관한 윤리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p.97
직거래와 도매상_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짠한
강원도 어느 바닷마을 서점에서 책이 팔려봤자 얼마나 팔리겠느냐마는, 책 뒤에 새겨진 가격 말고도 다른 무언가가 눈에 어른거린다면, 책에 대한 당신의 그 애정 어린 마음 덕분에 우리 서점은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p.103
나 홀로 예약_정말로 해드릴까요?
그분이 분명 살 것 같은데…. 내 상상 속에서만 예약된 손님은 며칠째 발길이 뜸한데, 괜히 진열에 더 박차를 가하게 된다.
눈에 잘 안 띄나? 더 잘 보이게 여기에 안내 문구를 써 붙여야겠군. 저 자리보단 이 자리가 더 좋겠다. 아니야. 두 곳 모두 진열해야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이 각도 보다는 이 각도가 아무래도…. 마침내 오늘 기다리던 손님이 왔다. 브라보. 그분은 정말로 나 홀로 예약한 책을 샀고, 나는 표정에서 일말의 미동 없이, 아무렇지 않은 듯 책을 봉투에 담아 드렸다. ‘나 홀로 예약’한 사실에 대해선 결단코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았다. 이 괴상한 예약제도는 축하 방식 또한 괴상하다.--- p.107
독립출판물_우리 서점에 오는 한 가지 이유
제작자분들께 매달 죄송하고도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든 메일로 전해 드리려고 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고 싶다. 여러분의 책은 여기에 아주 잘 놓여 있어요. 강원도 속초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에서 환한 빛을 발하고 있어요.--- p.112~113
도시의 공원_얼토당토않은 무언가
이 책은 현재까지 우리 서점에서 딱 한 권 팔렸다. 게다가 이 책은 장르를 분류하기가 영 애매하다. 심지어 가격까지 이만육천 원으로 비싸다. 나는 다소 확신에 가깝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세상에 두 종류의 서점이 있다면, 그건 『도시의 공원』이 있는 서점과 『도시의 공원』이 없는 서점이다.--- p.116
아버지의 자리_그 아저씨 어디 있어요?
아버지는 올해 예순네 살이다. 손님을 앞에 두고 책을 계산하는 속도가 다소 느리고, 목소리마저도 희미해져 잘 들리지 않는다. 아버지를 찾는 손님이 다 있네요. 나는 짓궂게 놀릴 심산이었는데 아버지가 겸연쩍은 듯 자진하여 ‘자학의 시’를 읊는다. 거참. 살다 보니, 나를 찾는 분이 다 계시네. 이렇게 늙어빠진 나를…. 나는 웃어넘겼지만 못내 흐뭇했던 내 심정을 전하진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나에게도 할머니와 같은 손님이 생길까? 할머니와 가족들은 각자 고른 책을 계산하고 나갔다. 나는 잠시 그들의 컬렉션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p.124~125
옛날 손님_저 지금 잘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서점 문을 열고 들어와 서가 곳곳을 걸어 다니며 책을 살펴보고 책을 골라 계산대로 오는 일. 슬로모션처럼 느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손님이 아닌 증인과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네가 모르는 세월 위에 너는 지금 서 있다. 그들은 그저 책을 고르고 살 뿐인데, 나는 시간의 심판대 위에 자진해서 나 자신을 올리고 만다. 그리고 묻는다. 저 지금 잘하고 있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으므로 나는 그들의 다음번 방문으로 대답을 유예한다.--- p.129
언제까지라도_저 역시 침이 고입니다
서점을 새로 가꾸며 나는 ‘매장에선 절대 음식 섭취 금지’라는 강령을 내세웠다. 일손이 허다하게 부족하여 식사 교대하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 적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매장에서의 식사를 금지했다. 정 인원이 없을 땐 혹여나 방문할 손님에 대비하여 매장 바깥에 이 단짜리 구루마를 식탁 삼아 밥을 먹을지언정 매장 안에서는 결단코 안 되었다. 잠깐 마시는 커피조차도 손님의 눈에 띄게 하지 않으려고 뒤편에 숨겨두곤 했다. 마치 그렇게라도 하면 쇠락의 길로 접어든 옛 서점의 기억을 잊을 수 있는 것처럼. 모두가 얘기하는 ‘서점 불황기’로부터 애써 고개를 돌릴 수 있는 것처럼.--- p.133
명문당_곧 오시겠지
현재까지도 깜깜무소식이니, 아마도 그는 앞으로도 서점에 오지 않을 것인지도, 마술사의 카드처럼 활짝 펼쳐진 만 원짜리 지폐와 그 뒤로 보이는 듬성듬성한 이가 숨김없이 드러나는 순박한 웃음을 더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점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어딘가에서 그를 마주치게 된다면 꼭 얘기해주고 싶다. ‘명문당’ 새 책들이 서점에 많이 들어왔어요.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는 작년 11월 돌아가셨습니다.--- p.137~138
고요서사_없어져선 안 되는 서점
문학의 초입에 있어서든 문학에 진절머리가 나서든, 문학이라는 이름 앞에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면, 고요서사에 가서 서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시라. 그는 당신에게 몰랐던 작품을 추천할 수도 있고, 새로운 작품 소식을 알려줄 수도 있으며, 만일 그것도 아니면 그저 당신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줄지도 모른다. ‘맞춤형 서점’이 서점이 나아갈 미래 중 하나라면, 그러한 표현은 고요서사처럼 특정 분야를 전문으로 다루는 동네서점에 특히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p.144
꼰대와의 투쟁_내가 너만 했을 때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경험을 반추하여 조금씩 다른 기준으로 ‘꼰대’를 이야기한다. 물론 그중에 공통으로 뽑아낼 수 있는 특징들도 꽤 있다. 말하자면 경향성 같은 게 있는 셈인데,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나이가 어려 보이면 반말부터 하는 사람. 조언을 구하지 않았는데 조언하는 사람. “내가 너만 했을 때”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 서점원처럼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이들에겐 더욱 다채로운 ‘꼰대’의 향연이 벌어진다. 직원한테 다짜고짜 반말하는 손님. 서점에 대해 얼토당토않는 조언이나 악담을 퍼붓는 손님.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이용하여 할인 및 기타 서비스를 요구하는 손님. 무엇보다도,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그저 무례한 손님.--- p.148
아내_벌써 여름이구나
그날은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역시 분명하게 기억나는 건 빛이 환히 쏟아져 서점 안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서점 안에는 손님이 서너 명가량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멀리 떨어져서 조용히 책을 고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수북이 쌓인 신간을 정리하고 있었다. 얼굴에 땀이 맺혀서 안경이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러던 와중에 누군가 계산을 하러 계산대에 왔다. 손님은 민소매의 얇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 옷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벌써 여름이구나. 나는 그 손님에게 첫눈에 반했다.--- p.153
아내_함께 일하다는 진실의 무게
아내와 함께 일하기를 망설였던 나의 첫 번째 이유, 그러니까 그가 서점에 싫증을 느끼면 어떡하느냐며 가졌던 두려움은 한마디로 괜한 걱정이었다. 실제로 그는 나보다 강인했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토록 취약한 일과 삶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쉽게 기뻐하는 만큼 쉽게 지치는 나와는 달리, 그는 기쁨과 낙담, 그 모두로부터 얼마간 자신을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p.159
여행자의 책_누구나 멋진 사람
당신들은 대다수 사람과는 다른, 비범한 라이프스타일을 지닌 사람들이다. 누구나 멋진 사람을 동경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을 존경한다.--- p.164
시 쓰기의 바이블_시 언어 책이 있어요?
하지만 속마음은 ‘시 언어’만을 모아 따로 수록한다는 전제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아이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다른 모든 말과 마찬가지로, ‘시어’ 또한 저마다의 맥락 안에서 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그렇기에 그것만을 따로 떼어내어 지니고 다닌다는 것은 얼마간 ‘시’라는 장르 자체를 모독하는 편리한 소망이 아니냐고 힐책하고 싶었다.--- p.168
포켓몬 고_포켓몬문고
포켓몬도 잡고, 서점 구경도 하고. 그것은 메마른 서점 사람 마음에 불을 지폈고, 번져가는 불길은 이미 걷잡을 길 없었다. 거리를 방황하는 괴수들이 별안간 속초에 사람들을 불러들인 것이라면, 그것이 속초의 어느 서점인들 예외를 두겠는가. 어린 시절 학교 앞 슈퍼에서 스티커 하나 들어 있는 빵을 사기 위해 긴 줄로 늘어섰던 풍경까진 아니더라도, 이렇게까지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면 지나가는 길에라도 서점에 들를 것 같았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무언가 사소한 채비라도 해두어야 할 터였다.--- p.173~174
마지막 책_인생이 농담을 하면 우리는 책을 산다
때때로 나는 얼마나 서점에 가고 싶었는가. 서점에서 얼마나 책을 사고 싶었는가. 서점 사람이면 매일 원하는 책을 마음껏 볼 수 있을 텐데 대체 무슨 소리냐며, 틀림없이 어처구니없어할 테지만, 이것이 우리의 실제 모습이다.--- p.177
속초에서의 겨울_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속초에서의 겨울』은 소설이었다. 다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점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어로 쓰인 소설이 아니라는 것. 제목에는 ‘속초’라고 버젓이 적혀 있는데, 한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쓰인 소설이었다. 물론 프랑스인이 집필한 소설이었다. 반대의 경우를 떠올려보았다. 『파리의 사생활』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알자스』 등 한국인이 프랑스 지명을 제목의 일부로 삼아 쓴 책들. 주저할 것도 없이 매끄럽게 읽히는 이 제목들이, 왜 반대의 경우에서만 저리도 멋쩍었을까.--- p.181~182
아버지와 서점_나의 작은 손등과 빛바랜 책
그날 아버지는, 내가 없는 곳에 가서, 나 때문에 울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손이 문 사이에 있는 줄도 모르고 문을 닫아버린 아버지가 미웠던 아이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p.189
에필로그
아버지. 서점을 새로 가꾼 후에 당신과 함께 일하며, 때로는 깨끗하고 반짝이는 서점 안에 서 있는 당신을 보며 어색해하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럴 때마다 저는 당신과 우리 서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있는 것만 같다고 느꼈습니다.
--- p.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