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함께 쓴 《공산당 선언》은 따로 설명할 필요 없는 유명한 고전입니다. 독재정권 시절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쉽게 동네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을 수 있는 교양서입니다. 선언서이다 보니 분량도 적은 편이어서 부담감 느끼지 않고 집어드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자본론》은 어렵지만 그래도《공산당 선언》은 읽을 만하다는 얘기도 종종 들었고요. 그런데 도대체 누가 쉽다고 했을까요? 1990년대 초반 대학생이었던 저는 부끄럽게도 《공산당 선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분명 활자를 읽고 있는데 그에 상응하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억지로 끝까지 읽기는 했지만 머릿속에 남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처참할 정도로 효율성 떨어지는 독서를 한 자신에게 무척 실망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느덧 20여 년이 지나서 다시 읽은 《공산당 선언》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짧은 선언문 안에 마르크스 사상의 정수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똑같은 글인데도 이렇게 느낌이 다르다니! 그동안 꽤 성장했구나 싶어 내심 스스로에게 기특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읽었을 때에 이 맛을 느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으니, 한편으로는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 p.5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존재하는 인간 집단인 계급 사이의 투쟁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말한 것입니다. --- p.23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현대 부르주아사회(자본주의) 역시 인간 역사의 종착역이 아닌 중간 정거장이라고 봤다는 것입니다. 과거 사회는 그 내부에서 계급 사이의 모순과 갈등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로 이행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역시 그 내부에 계급 사이의 모순과 갈등이 존재하며 그것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로 이행할 것이라는 말이지요. 모두 잘 알다시피 자본주의사회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는 격렬한 모순과 갈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모순과 갈등이 존재하는 곳에는 언제나 변화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 p.27
마르크스는 사회의 변화 발전 과정을 새로운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과 갈등이라는 틀을 통해 분석하고 해명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마르크스의 ‘역사 유물론’입니다. --- p.69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보기에 공황을 회피하기 위한 조치들은 미봉책일 뿐입니다. 그런 조치들을 취하면 취할수록 향후 공황 시기가 왔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대처 방법이 줄어들 수밖에 없으며, 결국 더 강력한 공황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입니다. 부르주아 계급이 봉건제를 타도하는 데에 사용한 무기(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는 이제 부르주아 계급 자신을 겨누고 있습니다. --- p.77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본문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양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냅니다. 노동자 계급이 단결할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처지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개별 기업에서의 노동자와 자본가가 충돌하던 양상은 노동자 계급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점점 계급 간의 충돌 형태를 띠게 되고, 노동자는 투쟁을 통해 지역과 업종의 한계를 넘어 연대하고 단결합니다. 나아가 전국적인 조직을 건설하며 파업과 투쟁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도 하지요. --- p.99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해 소수만을 살찌우는 일체의 사회 경제 시스템을 폐기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프롤레타리아 계급 스스로가 사회적 생산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지배계급에게 착취당하는 노예가 아닌 스스로가 사회적 생산의 주인이 된다는 의미). 왜냐면 프롤레타리아 계급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사회 경제 시스템에서 지켜내고 강화해야 할 만한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 p.123
노예 없는 노예주, 농노 없는 봉건영주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자본가 계급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노동자 계급이 존재해야 하는데,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노동자들의 기본적 생존조차 보장해줄 수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부르주아 계급을 먹여살려야 하는데, 오히려 빈곤에 빠진 노동자를 부르주아가 긴급하게 구조해야 할 정도로 모순 덩어리인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라는 말입니다. 초창기 자본주의의 비참한 참상을 보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 p.129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 계급 공동의 이익, 운동 전체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야기했습니다. --- p.143
공산주의는 즉 ‘소유 일반의 폐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기를 지향하는 운동입니다. 요컨대 공산주의는 ‘소유 일반의 폐기’가 아니라 ‘사적 소유의 폐기’를 지향하는 운동이며, 기업이나 공장 같은 생산수단을 사회적 차원에서 ‘공동으로 소유’해서 공익에 기초해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것입니다. --- p.149
마르크스는 왜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은 부자가 되고 노동자 계급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지를, 불후의 명저 《자본론》에서 숫자로 풀어서 증명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받는 임금은 자신이 수행한 노동량에 비해 필연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렇게 빼앗긴 노동에서 자본가의 이윤이 발생한다는 것을 명쾌한 수식으로 증명합니다. 예컨대 하루에 8시간을 일한다면 3시간은 나 자신을 위해 일하지만, 5시간은 자본가를 위해 일한다는 이야기지요. 노동자는 자신이 일한 만큼 임금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적응해 생존하고 번식하는 데에 필요한 수준의 생활비를 받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임금을 ‘노동의 대가’라 하지 않고 ‘노동력의 대가’라고 했습니다. --- p.153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이미 사회 구성원 대다수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사적 소유가 ‘사실상’ 폐기되어 있습니다. 빚까지 지며 생계를 유지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그 무슨 사적 소유가 존재한단 말입니까. --- p.167
약 사회가 나태함과 게으름 때문에 망한다면, 일하지 않는 나태하고 게으른 자들이 거대한 부를 챙기는 반면 부지런히 일하는 자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자본주의사회야말로 가장 먼저 망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지금도 자본주의사회의 부자는 노동이 아니라 생산수단 및 부동산 등의 소유와 매매를 통한 ‘재테크’로 거대한 부를 획득하지요. --- p.173
자본주의 국가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공권력을 행사합니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익을 위해 부르주아 계급에게 공권력을 행사합니다.마르크스는 인류가 공산주의 단계에 진입하면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경제 시스템에서 계획성과 공공성이 확대되어 주기적인 공황에 의한 생산력 파괴 현상은 일소되고, 생산력이 끊임없이 발전해 사람들은 더 적은 시간을 노동하고도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전혀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충분한 생산이 이루어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껏 생산 활동에 참여하며, 넉넉한 여가 시간을 활용해 삶을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활동에 참가합니다. --- p.219쪽
부르주아 계급의 구성원 중에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조리와 모순, 갈등을 목도하며 이런 문제들을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개혁(개량)주의자들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은 사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를 보수적 사회주의 또는 부르주아 사회주의라고 부릅니다.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의 오류는 모든 문제를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만 해결하려고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 p.269
마르크스는 독방 감옥을 마련해놓은 것도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냐고 독설을 퍼붓습니다. 부르주아는 자신이 부르주아인 것도 ‘노동자 계급을 위해서’라고 할 판입니다. 어려운 사람 도와주려고 부자 됐다는 ‘초딩 같은 이야기’와 다를 게 하나도 없지요. --- p.277
물론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고통 받는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명백한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거기에서 그들의 인식이 멈춘다는 데에 있습니다.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조직하는 능동적인 노동자 계급의 모습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노동자 계급이란 그저 누군가의 도움과 지도가 필요한 수동적인 존재에 그칩니다. 게다가 생시몽, 푸리에, 오언은 각각 귀족, 자산가, 자수성가형 사업가였지요. 프롤레타리아 계급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수동적인 존재로 가정한다면 능력이 되는 사람들(자산가)이 도와서 이들의 처지를 개선해줘야 한다는 결론은 필연입니다. --- p.289
공상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은 그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많은 부분 혁명적 역할을 했지만, 그들의 제자들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몰라보게 성장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량을 간과했습니다. 때문에 그저 스승들의 낡은 견해만을 고집하며 사회변혁의 불씨가 될 계급투쟁을 무마하고 중재하려는 반동적 입장에 섰지요. 흔히 ‘교조주의’(현실을 무시하면서 특정 이데올로기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의 폐해라고 부르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295
부연하자면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와의 차이도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가 계급에게서 세금을 걷어 서민들을 위한 복지 재원으로 사용하는 정책을 추진합니다. 일종의 부의 재분배 정책이지요. 하지만 사회민주주의는 바로 그 지점이 최종 목표지입니다.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는 단순히 조세 정책을 통한 부의 재분배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개혁(혁명)을 추동합니다. 이를 프롤레타리아 계급 스스로의 힘으로 실현하려는 것이지요. 즉, 사회민주주의와는 최종 목표가 다른 것입니다. --- p.309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착취와 억압이고, 얻을 것은 해방된 세상입니다. 망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승리를 예감하며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선포합니다. 아마 유사 이래 가장 강렬하고 성공적인 마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p.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