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잠에서 깬 고델은 폐허가 된 온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게 그을린 온실에서는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엄마의 얼굴이 고통 속에서 잿더미로 내려앉던 장면을 도저히 뇌리에서 떨쳐낼 수 없었다. 고델이 지금껏 봤던 가장 끔찍한 장면이었다. ‘게다가 내 손으로 그랬어. 내가 엄마를 죽인 거야.’ 온몸에 무시무시한 전율이 흘렀다. 속이 메스꺼워지면서 두려움과 죄책감이라는 족쇄가 몸뚱이를 휘감았다. ‘이젠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 p.71
“네 뜻대로 될 거다, 고델. 꽃의 마법으로 말이야. 그 힘으로 우리도 이렇게 오랫동안 살게 된 거고!” “네, 엄마.” “좋아. 이제 가서 꽃을 심으려무나. 허드렛일은 제이콥에게 맡기고. 꽃을 심고 나면 선조들에게 날 어떻게 돌려보낼지 어미가 알려주마.” 고델은 망토 주머니에서 꽃을 꺼내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신들이시여, 아직 꽃이 시들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 라푼젤은 다른 꽃들보다 오래 살지. 그렇다고 아주 오랜 기간 방치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야. 자, 이제 시작하렴.” --- p.98
고델은 책을 홱 덮어버렸다. 엄마의 피가 해결책임을 뻔히 알면서 하루 종일 치료법을 찾아다니며 시간 낭비를 하다니,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 방법이 먹힌다는 걸 고델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고델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알고 있었다. “엄마의 피가 네 몸속에 흐르고 있잖아. 그래서 알게 된 거야.” --- p.124
이따금 우린 스스로가 좋아하는 이미지로 다른 사람들을 형상화한 뒤 마음속으로는 그들을 증오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려놓은 그 이미지는 때로 우리의 시야를 가리기도 한다. 심지어 그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을 때조차도. 설령 그 사람을 괴물이라고 이미 단정지었다고 해도 실제 눈앞에서 마주하면 더 충격적일 수 있다. --- p.225
“어딜 가려는 거지? 그 남자는 너를 찾지 않을 거야!”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그 악당은 죗값을 치를 거야.” “안 돼요.” “자, 괜찮단다. 엄마 말을 들으렴. 될 대로 되고 있는 것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