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혹시 선생님도 길을 잃은 듯한 경험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예, 매일 길을 잃고 허둥거린 것이 제 문학인생 50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글 쓰는 일이란 순간순간마다 혼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극한적 고통의 길입니다. 그 길 걷기의 고통스러움을 어느 때부터인가 문인들은 ‘절대 고독’이라고 표현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우리 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포들로 이루어졌듯 소설도 수없이 많은 문장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우리 몸은 세포 하나하나가 전부 건강해야만 탄력적인 활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소설의 성패와 감동의 농도는 한 문장, 한 문장의 완벽도가 쌓여 결정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작가들은 한 문장, 한 문장을 쓸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초긴장 상태에 처하며 혼신의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그 상태를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때가 아마 귀하가 말한 ‘길을 잃은 듯한 경험’을 할 때가 아닐까요. 새로운 문장을 쓰려고 하는 그 순간순간의 긴장은 어쩌면 작가들에게는 순간순간 닥쳐오는 좌절이 아닐까 합니다. 그 무수하게 밀어닥치는 좌절을 박차며 새 문장 하나를 이루어내는 것, 그것이 소설 쓰기의 어려움이고 고통일 것입니다.
--- 「나도 매일 길을 잃는다」 중에서
Q. 만약 쉰이 넘어서 첫 글, 첫 책을 쓰는 운명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심정과 자세이실까요?
저는 28세부터 3년 동안 중고등학교 선생을 했고, 유신 바람에 휘말려 교직을 떠난 다음에 5년여 동안 불안하게 잡지사와 출판사를 떠돌며 글을 많이 쓰려고 애썼고, 그다음 3~4년은 전업작가로 살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직접 출판사를 차려 사장 노릇부터 전국 출장을 다니는 영업부장까지 도맡느라고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쓰라린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동대 출신으로 쓸 만한 인간 하나 있나 보다 했더니 출판쟁이로 버려버렸군.”
어느 선배가 술자리에서 했다는 이 말을 전해 들으며 저는 쓰라린 마음으로 이를 악물었습니다.
‘출판쟁이? 두고 봐라, 내가 어떤 글을 쓰는지. 내가 글을 쓰지 않으려면 아예 이 짓을 시작하지 않았다.’
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전라도 땅으로 내려가며, 비가 퍼붓는 속에, 밤버스를 타고 경상도 땅을 달리며, ‘두고 봐라, 두고 봐라’를 이뿌리가 저리도록 씹어서 삼키고 또 삼켰습니다.
그리고 세 식구가 세끼 밥만 몇 년 먹을 수 있게 저축을 하게 되자 출판사를 넘기고, 그리고 가슴 저리게 벼르고 있었던 글쓰기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태백산맥』이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40세였던 겁니다.
--- 「늦을수록 치열하게」 중에서
Q. 직업병을 몇 번이나 앓으신 건가요?
『천년의 질문』을 두 권 반쯤 썼을 때 오른쪽 아랫배가 또 불룩 솟긴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미련하게도 그때서야 저는 ‘아차, 또 탈장!’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뒤였습니다. 첫 수술을 받았을 때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허리가 똑 부러지는 것처럼 아파 한숨도 못 자고 밤새껏 신음하며 고통당했던 기억이 끔찍스럽게 끼쳐왔습니다.
‘그 고통을 어찌 또 당하지……?’ 싫고, 두렵고,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거야말로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또 아랫배를 지그시 꾹꾹 누르며 정면 책꽂이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동안 써낸 책들이 순서대로 쭉 꽂혀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 때문에…….’
그 책들이 사죄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괜찮아. 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인걸 뭐.’
저는 책들에게 고개 끄덕여주었습니다. 그 책들이 준 즐거움과 보람은 다시 탈장 수술을 하며 당해야 하는 고통쯤 아무것도 아니게 큰 것이었습니다. (중략)
그런데 저는 이번 책까지 하면 65권을 써냈으니 다산보다 훨씬 심하고, 더 많은 직업병들을 앓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엉덩이 종기가 효과 좋은 현대의 연고로도 다스려지지가 않아 결국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여러 가지 직업병들이 저를 습격해 왔습니다. 그것들 또한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제가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글쓰기 인생의 증거이고 훈장들이니까요.
--- 「문학인생의 훈장이 되어버린 직업병」 중에서
Q. 선생님의 인생 황금기에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조명에 몰입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나는 왜 하필 이렇게 슬프고 처참한 역사의 땅에 태어났을까? 그런데 왜 하필 소설을 쓰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이 화두와 맞서서 저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거듭거듭 고뇌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얻
었습니다.
‘상처 많고 고통 많은 우리의 참담한 역사에 대해서 쓰자!’
그것을 피해 서거나, 그것을 외면해서는 진정한 이 땅의 작가라고 할 수 없다는 의식의 푯대를 세웠습니다. 저는 그 길이 가장 올바른 작가의 길이라고 생각했고, 우리의 처절한 민족사를 진실하고 생생하게 엮어내서 앞으로 다시는 그런 처참하고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작은 거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작가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반도 땅에 갇히는 작가로 한계에 부딪힌다 해도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작가가 된다면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고 한 누군가의 말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했습니다.
--- 「내가 역사에 대해 쓰는 이유」 중에서
Q. 대하소설을 쓰시기 전에 기획단계 기간은 얼마나 걸리시는지요?
초등학교 6학년 사회생활 시간에 일제식민지시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짧게 요약된 교과서에는 우리가 비참하게 당한 이야기들만 가득했습니다. 저는 참다못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무얼 했다는 것입니까?”
이 느닷없고 당돌한 질문에,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담임 선생은 씨익 웃으며 말했습니다.
“담에 크면 다 알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저의 가슴에 품고 있었던 일본과 일본 놈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몇 배로 커져 있었습니다. 일본이 저지른 잔악상을 그만큼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여러 가지 책을 통해 식민지시대를 독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되었을 때는 일본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로 양쪽 가슴에 깊이 심어졌습니다. 그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는 『아리랑』을 쓰도록 추동한 절대적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리랑』 또한 그 뿌리는 초등학생 때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 정신 체험의 필연성이 의식을 형성해 가고, 그 의식이 세월 따라 성장하고 강화되어 가면서 작품 탄생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 「열두 살 소년이 품고 있던 문제의식」 중에서
Q. 앞으로 인공지능과 4차 산업 시대가 더욱 더 발전하게 될 텐데 그럴수록 인간이 어떤 마음가짐과 철학,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할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고, 그 미완성적 영혼은 존재와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갖고 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공지능이 제아무리 발달해 봤자 그 본질적 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인공위성과 함께 20세기 획기적 발명품으로 꼽히는 것이 플라스틱입니다. 그것은 싸고 질기고 편리해서 비행기 부품들에서부터 온갖 생활도구까지 못 만들어내는 물건이 없이 전성시대를 구가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썩는 데 500년이나 걸리고, 그 쓰레기가 상상할 수 없는 양으로 쌓이고, 하천이나 바다에서 물살의 힘에 못 견뎌 그것들이 조각조각 깨지다 못해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보일 정도로 미세먼지화함으로써 이미 3차, 4차 오염로를 거쳐 우리 인간의 핏속까지 침투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고 있습니다. 바닷새며, 물고기며, 거북이며, 고래까지 위에 플라스틱 조각들이 가득 차서 죽어버린 사실이 끔찍스럽도록 실감나게 텔레비전 화면에 비쳐지고 있습니다. 플라스틱은 이미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인간 발명품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입니다. 플라스틱이 가해오는 위협적 불행에 비해 그동안 누려온 행복이 얼마일까요.
--- 「‘속도’와 ‘편리’ 속의 ‘본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