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감상한다는 것은 작품을 둘러싼 사회적, 역사적 환경에 대한, 그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것과 같다. 그 그림과 조각을 예민한 예술가들로 하여금 만들게 한 시대적 배경, 그 작품을 외면하게 만든 당대인들의 한계, 그들을 찬양하게 만든 그 사회 특유의 취향을 읽는다는 뜻이다. 이 책은 그러한 읽기의 향연에 기꺼이 발을 디딘 이들에게 작은 안내서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제작 연도순에 따라 작품을 소개하여 미술사적 정보를 제공하면서 그 전후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을 엮어 미술과 역사가 어우러지는 현장에 함께할 수 있도록 했다.
--- p.6, 「여는 글」 중에서
여성 조각상인 코레는 늘 ‘페플로스’라는, 긴 천을 늘어뜨려 몸을 감싼 뒤 끈으로 고정하는 옷을 입고 있다. 그에 비해 남성들은 김나지온이라고 불리는 체육관에서 운동을 할 때, 나아가 올림픽 경기에서도 옷을 벗는 것이 원칙으로, 조각상 역시 완전 누드로 제작되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을 가진 젊은 남성의 몸은 그 자체로 신성시되었다. 따라서 남성 누드는 남성들만이 입을 수 있는 새로운 의미의 옷이었고, 여성에게는 당연히 그러한 특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 p.37, 「쿠로스〉와 〈코레」 중에서
그리스 조각상이 신체의 비율을 정한 뒤 그에 맞추어 눈코입까지 재단하여 아름다운 얼굴의 보편적인 모습을 담았다면, 로마인들은 대체로 있는 그대로의 얼굴과 흡사하게 제작하곤 했다. 너무 생긴 그대로 찍어놓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동네 사진관의 증명사진 같은 느낌이 로마의 초상 조각이라면, 그리스는 아름답게 성형한 얼굴을 사진으로 찍은 뒤, 다시 보정까지 해서 나이지만 내가 아닌 사진을 보는 느낌이다.
--- p.55, 「조상의 초상을 들고 있는 귀족의 초상」 중에서
마리아와 예수의 머리에는 후광이 드리워져 있다. 아기 예수는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나이 든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를 ‘어른이 덜 된 존재’로 그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p.87, 「블라디미르의 성모」 중에서
교황 율리오 2세는 앞으로 자신이 죽어 묻힐 영묘 장식을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했다. 평소 조각이 회화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던 미켈란젤로로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제안이었다. 그는 대리석 채석장으로 유명한 카라라에 무려 여덟 달이나 머물면서 질 좋은 대리석을 준비, 40여 점 이상의 영묘 조각과 청동 부조들로 교황의 무덤을 장식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교황이 제작비 지불을 미루고 심지어 면담조차 거부하자 피렌체로 돌아가 버렸다.
--- p.136, 「모세」 중에서
종교개혁 이전 화가들은 주 고객층인 교회의 주문을 받고, 그에 맞추어 그림을 그렸다. 즉 선주문 후작업인 셈이다. 그러나 교회를 화려하게 짓고 또 장식하는 것에 반감을 느낀 신교 국가에서는 큰손의 주문이 점점 사라졌다. 그러자 예술 시장은 화가들이 가장 자신 있는 장르의 그림을 먼저 그린 뒤 직접 시장에 내다 팔거나, 화상을 통해 판매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 p.175, 「꽃이 있는 정물」 중에서
쿠르베는 “내게 천사를 보여다오,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라는 유명한 말로 자신이 추구하는 회화에 대해 역설했다. 아카데미가 선호하는 이전까지의 회화가 ‘과거’ 속, 성서나 신화의 인물들을 과장하거나 상상하여 그렸다면, 자신의 눈으로 확인 가능한 ‘현재’를, ‘사실’을 그리겠다는 사실주의의 선언과도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쿠르베는 회화를 과거로부터 현재로 돌려놓은, 모더니즘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 p.217, 「오르낭의 매장」 중에서
아마도 어린아이들에게 산을 그려보라고 하면, 수많은 산들이 가지는 가장 공통적인 형태, 즉 삼각형 모양을 그릴 것이다. 삼각형은 어쩌면 어린아이가 알고 있는 산의 가장 결정적인 형태일 것이다. 세잔이 파리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마을로 돌아가 그린 생트빅투아르산은 그야말로 가능한 한 형태를 단순화시킨, 어느 계절, 어느 시간대에도 나올 수밖에 없는, 그 산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p.246, 「생트빅투아르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