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리옌첸(李衍?) 현장을 뛰어다니며 유골과 시체를 마주하고 그들의 신원을 찾는 일에 앞장서는 신진 법의인류학자다. 미국 오리건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홍콩 중문대학교에서 인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마이애미 시체안치소와 관련 기관에서 인턴 업무를 했다. 방치되어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유골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영국 레스터대학교에서 법의인류학과 법의고고학을 전공했다. 그 기간 동안 동티모르 경찰의 법의인류학자로 일하면서 독립 운동 과정에서 학살당한 무연고 시체의 잔해를 수습했다. 그 외에도 폴란드, 미국, 키프로스, 파푸아뉴기니 등에서 유해 발굴을 비롯 여러 법의학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홍콩의 온라인 뉴스 플랫폼인 《스탠드 뉴스》에 정기적으로 법의학 및 법의인류학과 관련된 글을 기고했으며, 2017년에는 페이스북 페이지 〈The Bone Room(存骨房)〉을 개설하여 영어와 중국어로 세계의 법의인류학 소식을 나누고 있다. 2019년부터는 홍콩 RTHK Radio 1에서 〈법의연구소〉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옮긴이 ∥ 정세경 북경영화대학에서 공부한 뒤 싸이더스 픽처스에서 근무했다. 현재 중국어 출판 기획자 및 번역가로 활동하며 심리학, 철학, 자기계발, 소설, 교양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뇌는 당신이 왜 우울한지 알고 있다』, 『서른이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인민의 이름으로』 등이 있다.
사막에서 뼈를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오랜 시간 햇볕을 쬔 탓에 유골이 표백되어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이날은 열 달 전쯤 밀수업자를 따라나섰다가 소식이 끊긴 가족을 찾아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새벽부터 모인 사람들은 ‘사막의 독수리(Aguilas del Desierto)’라 불리는 조직의 자원봉사자들이었다. 미국 국경을 넘다가 실종된 사람들을 애타게 찾는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만든 단체다. 사막에 서식하는 독수리는 시각이 예민해서 먹잇감을 잘 찾는다고 한다. 이들은 독수리가 사냥을 하듯 실종자들을 찾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pp.13~14
진상이 밝혀진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뼈에 남겨진 흔적을 토대로 우리는 망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법의인류학자의 본분은 말할 수 없는 망자를 대신해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p.24
법의인류학자의 마지막 목표 가운데 하나는 죽은 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누구든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든, 심지어 배후에 군대나 정부가 있든지 간에 상관없이 말이다. 억압받고 착취당한 사람들, 살해된 사람들, 학대를 당하고 연고자도 없이 아무 데나 묻힌 사람들, 집단 무덤에 묻힌 사람들을 위해 더욱 그래야만 한다. ---p.35
기록에 따르면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포춘의 자녀들은 다른 곳으로 팔려 갔다고 한다. 박물관은 포춘의 DNA와 동위 원소 분석 기술을 이용해 팔려 간 후손과 그들의 현재 거주지를 추적해나갔다. 포춘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가정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도록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법의인류학자들은 뼈를 통해 이름이 없었던 유골에게 잊혔던 신원을 되돌려주었다. 포춘은 세상을 떠난 지 215년 만인 2013년에야 비로소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다. ---p.48
드라마에서는 브레넌 박사가 검시한 유골이 정말 케네디 대통령이 맞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드라마를 보며 또 다른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과연 실제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 조사에는 법의인류학자가 참여했을까? (…) 유골의 신원을 확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생전의 엑스선 사진과 치아 기록을 유골과 비교하는 방법과 전두동 대조법을 자주 사용한다. 학자들이 애용하는 전두동 감정법은 1927년에 시작되었다. ‘이마굴’이라고도 부르는 전두동은 눈썹활에 자리한 두개골 외골과 내골 사이의 공간을 가리킨다. 이 공간은 사람마다 형태가 다르며 대칭을 이루는 경우는 드물다. 그 덕분에 전두동 엑스선 사진을 비교하면 동일인인지 판별할 수 있다. 심지어는 화장한 유골의 앞이마 엑스선 사진과 비교해도 알아낼 수 있다. ---pp.67~68
이미 다 죽었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종족이 멸절하다시피 한 살상지를 찾아가 보면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유족들은 오로지 한 가지 답만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사랑했던 가족, 친척, 친구를 그리워하고 애도하며 앞으로 열심히 살아가게 해줄 이정표를 바라는 것이다. 듣게 될 답이 원하던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을 찾아주려는 노력이 생존자들과 유족의 마음에 난 구멍을 조금은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p.91
인도에서는 종교적·사회적인 이유로 시체를 갠지스강 같은 곳에 흘려보내 그대로 부패하도록 놔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족들이 시체를 물에 흘려보냈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용도로 아무렇게나 쓰여도 된다는 뜻일까? 과학 지식을 얻는 것이 정말 죽은 사람을 존중하고 그의 존엄을 지켜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할까? ---p.117
유골을 전시하거나 연구하는 것으로 역사가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무례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과학 발전에 기여한다는 이유로 사람에 대한 존중과 그 너머의 윤리를 포기해야 할까? 유골이나 인체 표본 전시는 사람들이 인체 구조의 오묘함을 배울 좋은 기회다. 전시회들은 하나같이 언론 매체나 문헌, 각종 조명에 소리 효과까지 동원해서 관람자들을 과거 그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려고 애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전시회 관람 과정이 죽은 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준 그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의 경험과 이야기를 배우는 시간이어야 한다.
아주 가끔 시신 사진을 볼 때마다 답 없는 수수께끼를 푸는 느낌이 든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면담이라도 할 텐데 시신과는 말 한마디조차 나눌 수 없으니 이만저만 답답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어렴풋하게나마 궁금증을 해결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새로운 지식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