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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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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8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324쪽 | 346g | 128*188*20mm
ISBN13 9788984374294
ISBN10 8984374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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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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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거 알아?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걸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넌 또?”
본가 아파트의 뒷산에 ‘뒷산’이 아닌 이름이 붙어있단 걸 나는 서른셋이 되어서야 처음 알았다. ‘낙가산’. 그 산줄기를 한 시간 정도 타고 가다 보면 어느새 산 이름이 ‘것대산’이라고 슬그머니 바뀌었다. 엄마와 나는 낙가산과 것대산의 중간 즈음에서, 한참 동안의 오르막을 드디어 끝내고 내리막에 접어들며 호흡을 가다듬는 참이었다.
오늘의 코스는, 낙가산에서 출발해 것대산을 지나 산성 마을에 도착한 후 엄마와 막걸리를 한 잔씩 시원하게 마시는 것이었다.
“솔직히 엄마도 알잖아. 나 분노 조절 안 되는 거.”
“알지.”
“뭘 알아, 알긴. 엄만 반의반도 몰라.”
“왜 이랬다저랬다 해. 방금은 알 거라며.”
“엄마는 내가 연애하는 거 옆에서 본 적 없잖아. 엄마 그거 알아? 나 지금까지 연애할 때마다 남친들을 완전 음식물 쓰레기통처럼 썼어. 먹기 싫은 거, 상한 거, 그런 거 다 갖다 부었어. 술만 마시면 꼬장에 폭언에…. 지금까지 한 대도 안 맞은 게 신기하다니까. 내가 일하면서 맞는 여자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겠어. 그럴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린다고.”
“뭔 소리야. 네가 남자한테 왜 맞아!”
“안 맞았다니까, 좀 집중해서 들어. 엄마가 나한테 왜 맨날 말라빠졌는데 키까지 더 작은 남자 만나냐고 속상해 했잖아. 왜 학벌도 안 좋고 벌이도 시원찮고 말주변도 없이 수줍기만 한 애들 만나냐고 했잖아. 왜 그 잘하던 탁구나 계속 치지, 남 목 조르고 잡아채는 운동만 하냐고 13년째 혼내고 있잖아. 근데 엄마, 솔직히 말해줄까? 내가 왜 그랬는지?”
“너 갑자기 왜 이러니, 술도 안 마셨으면서.”
몸을 움직이고 호흡이 거칠어지면 아드레날린이 나와서인지 이상하게 평소 할 수 없던 말들을 마구 뱉게 된다.
“내가 술 먹고 아무리 쓰레기처럼 굴어도, 날 때릴 수 없을 만한 애들을 골라 사귄 거야.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 같았던 걸 나는 알고 있거든. 엄마, 그게 바로 내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이유야. 내가 남자로 태어났잖아? 학교 다닐 때 애들 괴롭히고, 연애하면서 여자 괴롭히고, 자식 낳으면 맨날 소리나 지르고, 그랬을 거야. 때렸을지도 몰라. 진짜로.”
“무슨 소리야, 너 인성 그렇게 나쁜 애 아니고, 엄마가 그렇게 안 키우려고 기를 썼을 거야.”
그다음에 이어 하고 싶던 대답은 속으로만 뱉었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인서울 해서 해방될 때까지 집에서 보고 배운 게 그것뿐인데, 엄마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별수 있었을 것 같아? 십여 년을 그런 집구석에서 커야 했던 아이가 짠, 하고 성인군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어쨌든 그래서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선천적으로 힘이 달리니까 나쁜 짓을 못하잖아. 저절로 착해졌어. 이러고 싶지 않은데.”
“…너 남자들 이겨먹으려고 유도 배웠지.”
“에에이, 못 그래. 사람들이 막, 여자가 격투기 하면 남자 이기겠네, 하고 기대하거든? 근데 너무 슬프지만 선천적인 하드웨어 차이가 있어. 엄마. 남녀는 타고난 근력이나 뼈대 자체가 아예 달라. 그러니까 싸움박질은 안 할 거야. 걱정하지 말고, 뭐 그냥 아, 이래서 얘가 연애를 더 이상 안 하는구나, 결혼할 마음도 없구나,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이거야. 쓰레기 되고 싶지 않으니까. 남 불행하게 하고 남의 삶 망치고,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귤이나 먹자.”
뭘 이렇게 무겁게 챙겨왔어? 나는 핀잔을 주며 앉은 자리에서 귤을 다섯 개나 까먹었다. 엄마는 겨우 하나를 먹더니, 부르튼 입술에 귤즙이 들어가 따갑다며 립밤을 빌려 달라고 했다. 갚을 거야? 나는 괜히 투덜댔다.
--- p.5-8

“초등학교 땐 H.O.T.에서 장우혁 좋아해서, 막 장우혁 부인이라고 복도에서 소리치고 다녔잖아요. 그러다 6학년 일진 언니한테 찍혀가지고 불려가지 않았어요? 신화에선 내내 김동완이었죠? 근육 너무 키워서 다 김동완 탈빠해도 혼자 김동완 목 놓아 부르고. 중학생 때 무심천에서, 무슨 행사였나, 하여간 그때 신화 왔었잖아요. 그때 학교 째고 맨 앞줄에 앉아서 기다렸죠?”
도박이었다. 어차피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외국 가수 중에선 아론 카터. 그러다 웨스트라이프로 갈아탔고. 왜냐하면 학교 영어 시간에 ‘마이 러브’를 하도 틀어줘 가지고. 언 엠티 스트릿, 언 엠티 하우스 따라 부르다가 정들어서 팬질하지 않았냐고요.”
최은빈은 내 얼굴과 손에 쥐여준 내 주민등록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경찰서에서 봤던 남자 엄주영의 주민등록증과 똑같은 생년월일, 그리고 똑같은 주소지가 적혀있었다.
“거의 맞아요. 하나만 빼고. 아론 카터 좋아한 적은 없어요. 그래서 최근에 걔가 성인 배우로 전향했다는 뉴스 보고 생각했죠. 내가 관상 하나는 잘 본다고.”
“…그래요. 뭐 제가 남자로 변한 세상에서 그 자그마한 사실 하나 정도는 충분히 달라지고도 남겠죠!”
“그런데 주영 님, 제가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쉽게 믿으리라고 기대하시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저 같았으면 벌써 정신병자 취급하고 쫓아냈어요. 은빈 님 인내심이랑 이해력이 진짜 쩌시는 거예요. 역시 한국 경찰의 미래는 밝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감동입니다. 근데 다만요.”
다만.
“제가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여자 엄주영이란 걸 믿지 않으셔도 좋아요. 다만 배중숙 씨가요.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이 세계에서조차 집안 남자들한테 겁나 시달리고 있는 게 빤히 보여요. 심지어 제가 살던 세계에선 아들이 없이 외동딸만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는데 이 세계에선 아들만 있고, 그 아들 개쓰레기라면서요, 은빈 님이 그러셨잖아요.
그래서 미칠 것 같아요. 배중숙 씨를, 그러니까 우리 엄마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 살게 도와주지 않고는 맘 편히 여길 떠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플러스, 남자 엄주영 혼쭐내주기. 어디서 감히 내 이름을 달고 망나니짓을 저질러요?”
“이해가 잘 안 돼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저를 헛소리하는 미친년으로 보셔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저의 세계에서 저는 엄용민 배중숙의 딸이었고 최은빈의 절친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의 남자 엄주영을 어떻게든 사람새끼로 만들어놓고 싶다. 아마 은빈 님도 저와 더불어 민중의 지팡이로서, 가녀린 저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거다, 뭐 그런 거죠. 더 나은 지역사회를! 살기 좋은 청주시를! 위해.”
누구 하나 잠을 깨고 귀를 열까 두려워 우리는 포차를 나와 고요한 길가에 서있었다.
“저도 그 새끼 잡아 처넣고 싶어요. 걔들한테 시달리는 바람에 경찰 된 건데. 말 다 했죠. 그런데, 정말로 잡아 처넣는 걸 원하세요? 아들이 감방 들어가면 주영 님 어머니… 어머니 맞나… 하여간 그 아주머니는요, 불행하시겠죠. 매일 눈물 찍어가며, 귀여웠던 아기 시절 추억하다가, 면회할 때면 바리바리 사식 싸들고 가서 먹이겠죠. 세상에 대한 원망만 깊어지고. 제가 이 일 하면서 얻은 결론이 뭔 줄 아세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결국 세상에서 제일 불행해지는 건요, 늙은 여자예요.”
그리고 우리도 늙은 여자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고요. 말을 마친 최은빈이 건물 벽에 등을 기댔다.
“…뭐라도 해봐야죠.”
“네?”
“이 꼴을 봤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하고 참아요, 제가. 게다가 전 어차피 이 세상 사람도 아니라서. 남의 세상 일이니까, 더 쉽게 간섭할래요. 그리고요, 저 보기보다 힘세요. 저 유도 오래 했거든요. 제 전완근 만져보실래요?”
--- p.48-51

자유자재로 원래 세계에 돌아갈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쵸. 식탁 맞은편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는 은빈에게 말했다. 그럼 그냥 확 뒤통수 갈겨 버리고 내 세계로 꺼지면 되는데. 잘못된 행동을 할 때마다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좀 교정이 되지 않을까요? 아 내가 천벌을 받는구나, 하고 말이에요.
“그러게. 아니, 그럼 거꾸로 생각해보죠.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그, 상당산성에 있는 막걸리 집에서 엄마랑 막걸리 먹다가 화장실엘 갔거든요. 그런데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까 남자 엄주영이 엄마 앞에 앉아있었어요. 그러고는 계속 여기예요.”
“헐, 음. 그럼 거길 다시 가볼까요?”
“네?”
“실험의 기본이잖아요. 똑같은 제한 조건 아래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는지 재차 확인하기. 저랑 같이 가서, 막걸리 마시고 화장실 다녀와봐요.”
나는 입을 헤 벌렸다. 그렇게 쉬운 생각을 왜 나는 하지 못했지?
“만약 성공하면요? 그러니까, 제 세계로 돌아가면요? 그런데 제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요…? 그냥 다 잊어야지, 골치 아프게 뭘 또 엮여, 하고요.”
“그렇게 약하고 책임감 없는 분이었다면 애당초 내 존재도 모르는 엄마를 위해 엄주영을 처단하겠다, 뭐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해요.” 맞아. 은빈은 칭찬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였지. “게다가, 제 절친이었다면서요. 저 나름 눈 높아요. 관상 잘 본다고는 저번에 얘기했죠? 함부로 말 섞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저는 주영 씨 절대적으로 믿어요.”
혼자 앉아서 나물 반찬을 리필해 먹는 엄마의 모습을 확인하고도 바로 뒷걸음질 쳐 다시 화장실로 달려간 것은 그, 절대적으로 믿는다, 는 옛 친구의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됐어요. 다녀왔어요. 저 화장실이에요. 막걸리 먹고 여자화장실 세 번째 칸에 들어가면 돼. 그럼 옮겨가요. 시점은 제가 떠나온 그 과거, 딱 거기예요. 그 세계는 아직 1분도 안 움직인 것 같아요.”
숨이 찼다.
“저, 엄마한테 말 한마디 안 걸고 다시 여기로 달려왔어요, 은빈 님. 그냥, 어… 알아달라고요. 내가 진짜 진지하다, 라는 마음. 알아달라고 말하는 거예요.”
“의심한 적 없어요. 생각보다도 훨씬 빨리 왔는데요.”
은빈이 환하게 웃었다. 엄마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내 모든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친구의 웃음. 십여 년만에 보는 은빈의 표정이었다.
“저 잘했죠?”
“네.”
“그럼 우리 말 놓아요.”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야 남자 엄주영을 손볼 수 있단 말인가.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탁구장 사람들이랑 친해진 후 이 막걸리 집에서 정기모임을 가져야 하나.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서, 남자 엄주영도 그 자리에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하나.
“은빈아, 아까 말한 것처럼 진짜로 뒤통수 겁나 때린 다음 화장실로 도망갈까?”
“한 백 번은 반복해야 할 텐데. 체력이 되겠어?”
“아니.”
“응, 그래.”
우리 둘의 머리로 내릴 수 있는 수는 겨우 그 정도였다. 한참을 바닥만 보았다. 머리를 너무 많이 써서 배만 고팠다. 그때 은빈이 나를 불렀다.
“주영아.”
“응?”
“동창들 사이에서 엄주영 재혼한단 얘기가 돌던데 진짜일까?”
은빈의 물음이 잊고 있던 기억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스위치를 올려 주었다. 반짝. 머릿속에 불이 들어왔다.
“어어. 그러고 보니 그 비슷한 얘길 들었어. 처음 여기 떨어졌을 때, 그 청국장집에서.”
“진짜 막아야 되는데. 세상에 불행한 여자 하나 더 생기는 것밖엔 안 되는데…….”
누군가 축 늘어져있던 풍선에 숨을 불어넣은 듯, 별안간 커다란 목표가 부풀어 올랐다.
“그럼 일단, 구체적인 목표는 이렇게 잡으면 어떨까. 결혼 파투내기. 이건 진짜로 누군가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너도 껄끄럽지 않을 거고. 불행해질 여자를 하나 구한다고 생각하자, 우리.”
--- p.5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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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이 이야기는 좋은 사고실험입니다. 가혹한 가정폭력의 목격자이자 피해자라는 트라우마를 공유하는 두 엄주영은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완전히 다른 인물로 자라납니다. 설재인 작가님은 이야기 전반에서 그 이유를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장르적 즐거움과 사회적 메시지를 둘 다 잡는 데 성공한 훌륭한 소설을 추천할 수 있어 기쁩니다.
- 심너울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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